소설리스트

강렬한 맛 (45/125)

      강렬한 맛

포크는 아주 천천히 엘시스의 입에 가까워졌다.

처음 먹어보는 음식에 대한 호기심과 약간의 경계가 그대로 드러났다.

라면은 소리 하나 없이 깔끔하게 엘시스의 입에 들어갔다.

그녀는 우물우물 입을 움직이며 맛을 음미했다.

꼴깍 음식을 삼킨 후의 표정은 조금 얼떨떨해 보였다.

“어···.”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눈만 깜빡거리는 엘시스.

지금까지의 우아하기만 했던 모습과 너무 달라 보였다.

“어때?”

내 질문에 엘시스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잘··· 잘 모르겠습니다. 이게 대체 무슨 맛입니까···?”

심지어 본인이 분명 맛을 봐놓고는 되레 나에게 되묻는다.

“맛을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는 한 번 더 맛보는 게 낫지 않겠어?”

“물론 그렇긴 한데···.”

라면을 그릇을 내려다보는 푸른 눈에 충격과 공포가 담겨있다.

대체 어떤 느낌을 받은 것인지,

“입맛에 안 맞는 것 같아?”

“그런 것이 아니오라··· 맛이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

다. 그냥 너무나, 너무나 강렬합니다.”

‘그럴 수도 있지.’

너무 새로운 것을 처음 접하면 호불호조차 판단하기 어려울 수 있다.

낯선 다른 나라의 음식만 해도 한입에 평가하기 어려운데, 하물며 지금 먹는

것은 아예 다른 세계의 음식이다.

게다가 자극적인 맛이기까지 하니, 충격받지 않는 게 더 이상할 것이다.

엘시스는 그릇 가까이에 얼굴을 가져다 대며 포크로 라면을 저었다.

“과거 맛보았던 대륙의 음식과는 전혀 다른 느낌입니다. 마치 면발에 입안을

얻어맞은 것처럼 얼얼합니다.”

“대륙의 음식은 어떻길래?”

“대륙의 인간들은 신선한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리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면

이 있었습니다. 물론 저 또한 세상 모든 음식을 먹어본 것은 아닌지라 확실히

말씀드릴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제가 과거 접해본 음식 중 이런 맛을 내는

요리는 없었습니다.”

단호하게 말하는 엘시스에게 하나 궁금한 게 생겼다.

“대륙에 아직 살아남은 인간들이 있나?”

“인간들··· 있습니다. 아주 소수이긴 하지만. 과거, 인간들은 대륙의 거의 모

든 땅을 지배했으나, 이제 그 영광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언젠가는 과

거의 전성기를 되찾을지도 모르겠지만, 머나먼 미래일 거라고 봅니다. 마계의

공격에 가장 큰 피해를 입었으니 재건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겁니다.”

“그렇군.”

단순한 궁금증이었기 때문에 더 자세한 질문은 하지 않았다.

엘시스는 주저주저하다가 아까보다 조금 더 많은 양의 면을 떠먹었다.

이번에도 진지하게 입을 우물거리며 맛을 음미하고 있었다.

혹시나 처음부터 라면을 준 건 너무 과했던 게 아닌가 싶어서 한 마디 덧붙였다.

“억지로 다 먹을 필요는 없어. 못 먹겠으면 다른 걸로 해줄테니까.”

“아닙니다. 조금만 더 먹어보겠습니다. 처음보다는 두 번째 먹었을 때 조금

더 맛을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 그럼 마음대로 해.”

엘시스는 정말로 라면 먹기를 계속했다.

고작 라면 하나 먹는 거라기에는 지나치게 진중한 태도로 한입 한입 음미했다.

면이 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느렸다.

용기 내어 국물을 한 모금 마시기까지 했다.

“오묘한 맛입니다. 맛이 너무 강하다는 생각도 들고···. 그렇지만 왜인지 자

꾸 한입 더 먹게 되는 매력이 있습니다.”

무슨 음식 평론가처럼 진지하게 평을 내리는 엘시스였다.

처음 반응을 봤을 땐 더 먹지 않을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꽤 잘 먹는다.

내친김에 단무지까지 내주었다.

김치를 줄까 하다가 그래도 처음 먹는 사람에게는 단무지가 더 무난할 것 같

아서 선택한 것이었다.

“오오···. 색이 정말 아름답습니다. 노랗고 납작한 것이 마치 꽃잎 같습니다.”

엘시스가 포크로 얇은 단무지를 꼭 집으며 감탄했다.

단무지 색 같은 건 생각 해본 적도 없는데,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아삭아삭.

엘시스가 단무지를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이것도 맛이 진한 느낌입니다. 지구의 음식은 정말 강렬하군요. 신선한

충격입니다.”

혼자 이런저런 말을 하면서 어느새 라면을 모두 먹어 치웠다.

국물은 많이 남았지만 면은 한 가닥도 남지 않은 듯했다.

“남길 줄 알았는데, 다 먹었네?”

“그게 한 입만 더 맛보자는 생각으로 먹었는데··· 이렇게 그릇이 비어버렸습

니다.”

“입맛에 맞았던 거 아닐까?”

“그런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한 엘시스가 이내 공손한 자세를 취했다.

“정말 잘 먹었습니다. 초월자님의 요리를 맛볼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다가 갑자기 추춤하며 동작을 멈추었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춘 채 입을 열었다.

“초월자님, 사실 아까부터 여쭙고 싶었던 것이 있습니다.”

“뭐지?”

“혹여나 무례한 질문으로 받아들이지 않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밑밥부터 깔고 있다.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엘시스가 옆쪽으로 눈길을 주며 물었다.

“저것들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식당 구석자리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이곳을 바라보고 있는 몬스터들을 향해

하는 말이었다.

베로와 슬라임들은 정령왕이 나타났을 때부터 그녀를 신기하게 구경하고 있었다.

하급 정령들과는 다르다는 게 느껴지는지 어느 정도 거리는 계속 유지했다.

녀석들은 식당까지 따라와서 엘시스가 라면을 다 해치울 때까지 한구석에서

지켜보는 중이었다.

그 사실을 애써 무시하던 엘시스가 결국 입을 열게 된 것이다.

그때, 순수하면서도 강력한 마나가 섞인 물줄기가 엘시스의 몸에서 불쑥 올라

왔다.

살기가 느껴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돌발상황이었다.

힘을 되찾은 정령왕의 능력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

휘익!

바로 앞에 있던 식칼을 위쪽으로 던졌다.

예기가 실린 식칼이 물줄기를 관통하며 미약한 폭발이 일어났다.

폭죽이 터진 정도의 작은 폭발이었으나, 엘시스의 몸에는 꽤 큰 영향을 주었다.

“으윽.”

나는 가슴팍을 부여잡고 힘겨워하는 엘시스를 싸늘하게 내려다보았다.

“뭐 하는 짓이지? 이곳에서 돌발행동은 용납하지 않는다.”

싸늘한 내 목소리에 엘시스가 공손히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여전히 조금 숨이 가빠 보인다.

“···죄송합니다. 마계의 몬스터라면 치가 떨리기에···. 그러지 않으려고 했는

데 존재를 의식하자마자 저도 모르게 분노가 치솟았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세

계가 마계에 의해 초토화되는 것을 보며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떠올라···.”

“대륙에 있던 마계의 몬스터들은 모두 죽었어. 지금 너는 그것과는 관계없는

애들에게 분풀이하려고 했던 것뿐이다.”

“······.”

엘시스의 고개가 더욱 아래로 향했다.

“···맞는 말씀이십니다. 부디 용서를···.”

“경고는 한 번뿐이야. 만일 저 애들에게 해를 입힌다면 난 너를 적으로 간주

하고 그에 상응하는 대우를 해줄 것이다.”

차가워진 분위기 속에서 엘시스가 입을 열었다.

“...저 몬스터들을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시는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현호

님. 하마터면 은혜를 원수로 갚을 뻔했습니다. 이 실수는 가슴 깊이 새기고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부디 선처를···.”

할 말이 끝난 듯 엘시스는 눈을 내리깔고 내 대답을 차분히 기다렸다.

순간 화가 나긴 했다.

하지만 그 마음 자체는 이해 못할 것이 아니다.

분을 참지 못했다고는 하지만, 무턱대고 공격한 것은 아니고···.

슬쩍 베로와 슬라임 쪽을 쳐다보았다.

녀석들은 지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는 것 같다.

“···믿어보지. 더 이상의 기회는 없다.”

“명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초월자시여.”

몸을 일으킨 엘시스가 다시 격식을 차려 인사했다.

크게 티 나지는 않지만 아까와 비교했을 때 많이 의기소침해진 느낌이다.

“제가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은 것 같습니다. 이만,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만

약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불러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방

금 전의 일은··· 다시 한번 죄송하다는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다시 돌아온 강가에서 엘시스가 한 말이었다.

진삼으로 반성하는 모습에 마음이 많이 풀렸다.

“다른 것도 먹어보고 싶으면 가끔 놀러 와도 돼.”

나는 엘시스에게 그렇게 쌀쌀맞지 않은 태도로 말해주었다.

엘시스가 고개를 번쩍 들며 말했다.

“그, 그래도 되는 것입니까?”

“미리 얘기만 해주면 관계없지.”

“그러시다면··· 정말 송구합니다만, 후에 다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지구

의 음식은 저에게 정말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엘시스가 기쁜 기색으로 말했다.

새로운 세계의 음식을 접하고, 호기심이 해소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큰 관

심이 생긴 모양이었다.

“그럼, 초월자시여, 물의 정령왕 엘시스는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귀중

한 시간을 내주신 것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찾아뵙기 전에는 운디네를 통

해 미리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내 모습을 확인하고, 엘시스는 운디네들과 함께 물길을 따라

정령계로 돌아갔다.

* * *

내가 정령왕에게 라면을 끓여주는 일이 생길 줄은 몰랐다.

정령이라는 존재가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도 신기했다.

물로 그것도 최정점에 위치한 정령왕이기 때문에 가능한 거겠지만.

어쨌든, 약간의 불미스러운 일을 제외하면 꽤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그나저나···.

“대륙에 다시 나가보라고 했었지?”

엘시스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게이트를 하나 열었다.

아스키나 대륙과 직통으로 이어지는 게이트였다.

한 걸음 걸어 나가자 이제는 꽤 익숙해진 맑은 공기가 온몸을 감쌌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광경은··· 좀 황당했다.

“뭐야, 이게?”

이 게이트가 연결된 장소는 분명히 눈앞이 확 트인 언덕이었는데···.

그런데 지금 보이는 것은 상자들과 뭔지 모르게 쌓여있는 과일 같은 것들···.

게이트 근처에 알 수 없는 물건들이 주변을 가로 막고 있어 언덕 아래의 풍경

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나는 제일 가까이에 있는 물건으로 다가가 보았다.

뭔지 모를 열매가 탑처럼 쌓여있었다.

그 옆에 놓인 화려한 조각이 장식된 상자를 열어보니, 주먹만큼 커다란 검은

광석 같은 게 들어있다.

엘시스는 분명 대륙의 많은 생명들이 감사 표현을 하고 싶어 한다고 했었다.

“그럼 설마 이거··· 진상품 같은 거라고 봐야 하나···?”

“찌직!”

혼자 중얼거린 말에 아래쪽에서 작은 대답이 들려왔다.

다람쥐라고 생각했던 그 대륙의 동물, 카람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대답한 것

이었다.

“맞다는 거지?”

“찍!”

“네가 지키고 있었던 거야?”

“찌지직!”

카람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이 물건들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 꽤 인정받을 만한 일이라 여기는 모양이었다.

“아, 맞다. 지난번 도토리는 네가 가져다 둔 거 맞지? 잘 먹었어. 맛있더라고.”

“찍, 찌직! 찍!”

카람이 이번에는 기쁨을 억누르지 못하고 한번 폴짝 뛰기까지 했다.

가져갈 때는 긴가민가했었는데, 역시 이 녀석이 준비해둔 선물이 맞았던 것이다.

그건 그렇고···.

“···일단은 던전으로 옮겨야겠네.”

나는 제멋대로 쌓인 물건들을 보며 팔을 걷어붙였다.

이대로 두면 썩어버릴 것 같은 것들도 많이 있다.

좀 황당하지만 어쨌든 내 것이라고 하니,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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