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시락 (46/125)

      도시락

사실 대륙의 물건을 던전으로 옮기는 것 자체는 크게 힘들지 않았다.

문제는 물건들을 분류하고, 그게 어떤 것인지 확인하는 거였다.

이건 다른 누군가가 대신 해줄 수도 없는 일이었으니까.

우선은 아주 간단하게 먹을 것과 물건으로 대충 분류했다.

먹을 것은 지구의 것과 비슷해 보이는 과일이나 아예 처음 보는 열매 같은 것

들이 있었다.

그런 것들은 대부분 바닥에 흩뿌려져 있었는데, 아무래도 산짐승들이 옮겨놓

은 게 아닌가 싶다.

아삭.

사과처럼 보이는 과일을 닦아서 한입 베어 물었다.

“음?”

달다.

상큼하기도 하고.

껍질만 봤을 때는 조금 오래된 게 아닐까 싶었는데, 꽤 신선하다.

“맛있는데?”

맛도 사과와 비슷한데 미묘하게 조금 더 맛있다는 느낌이 든다.

지난번 도토리를 먹었을 때도 느꼈던 건데, 이곳의 열매들은 맛 자체가 조금

더 진한 것 같다.

지구의 과일처럼 따로 개량을 한 것도 아닐텐데···.

‘그래서 재료의 맛을 살리는 요리법이 더 발달했던 건가?’

아까 엘시스가 그렇게 말했던 것 같은데.

어쨌든 좋았다.

마음에 드는 재료들이 많이 생겼다.

종류도 여럿이고 양도 꽤 많아서 오래 보존할 수 있도록 냉동실과 냉장실에

적당히 넣어두었다.

물건 또한 다양했다.

딱 봐도 귀해 보이는 보석에서부터 어설픈 손재주로 열심히 깎아 만든 것 같

은 나무 조각상까지.

돈으로 가치를 매기기보다는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들을 나에게 선물하고

싶었던 것 같다.

대부분의 상자에는 발신인의 정보가 적힌 쪽지가 들어있었다.

그중 인간은 없는 것 같았고 엘프와 드워프가 많았다.

선물을 살펴보면서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여기 사는 애들··· 너무 순진한 거 아닌가?”

어떤 상자에는 이런 걸 나한테 보내도 되는 건가 싶은 물건들도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고대의 어느 드워프가 인생의 역작으로 남겼다는 명검.

신의 축복을 받았다는 성수.

마나를 부여하는 것 만으로도 도시 하나를 날려버릴 만한 폭발력을 지닌 아티

팩트 등.

지구의 기준으로 따지면 S급에 가까울 듯한 아티팩트와 무기도 여럿 있었던

것이다.

물론 대륙을 장악한 몬스터들의 대부분을 내가 처리하긴 했다.

그게 결국 이세계 존재들을 구원한 것이나 다름없기도 하다.

내 의도는 그런 게 아니었는데 이들은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오직 나를 영

웅이자 구원자로만 취급하고 있다.

고마워하니까 나도 그러려니 하긴 하는데, 솔직히 말해서 나는 다른 차원에서

온 신원불명의 인간이 아닌가.

나에게 다른 꿍꿍이가 있으면 어쩌려고 이런 물건들까지 보내서 힘을 보태주

느냔 말이다.

물론 그럴 생각이 있는 건 아닌데 황당한 건 어쩔 수 없다.

이런 아티팩트들을 가지고 있었다면 알아서 몬스터쯤은 물리칠 수 있지 않았

을까 할 수도 있지만, 그건 또 아니다.

가지고만 있다고 쓸 수 있는 게 아니라, 어느 수준 이상의 마나를 부여하긴

해야 작동하니까

“흐음···. 이런 것도 있어? 오호···.”

생각보다 신기한 것들이 꽤 많았다.

제국어로 적은 감사의 편지도 있어서 읽어봤는데 꽤 재미있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것저것 살펴보는 사이 늦은 밤이 되어있을 정도로.

지난 50년간 떠나고만 싶었던 아스키나 대륙.

그러나 완전히 변화한 지금의 대륙은 조금 마음에 드는 것 같다.

* * *

아침 일찍 던전으로 들어와 홀을 정리했다.

몸은 평소의 루틴대로 움직이는데 사실 머릿속으로는 딴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어제 저녁, 헌터 관리국의 송혜연이 직원들이 먹을 도시락을 주문했다.

필요한 도시락의 수량은 총 80개.

“생각보다 너무 많은데···. 사람을 고용해야 하나···?”

지금껏 받아본 적 없는 양의 주문이었다.

비각성자들 중에서도 원하는 사람의 것만 주문한다기에 많아 봐야 2~30개 정

도로 예상했었는데, 그보다 훨씬 많은 수였다.

전날에 미리 만들어놓을 수도 없고, 당일 오전에 요리하는 게 최선인데, 혼자

서 하기에는 만만치 않은 양이다.

물론 못 하겠다고 하지는 않았다.

어떻게든 방법은 찾으면 되는 거니까.

사냥에 지친 헌터들이 아닌 비각성자들에게 내 음식이 어느 정도 통할지도 궁

금했다.

최지수를 일일 알바로 활용하는 게 제일 좋겠지만, 걔는 학교에 가야 한다.

‘흠, 어떻게 할까.’

머리를 굴리는 중에 뒤쪽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십니까. 오늘도 좋은 아침입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헌터님.”

한성 길드의 A급 헌터 고영한.

그는 휴게소에 들리는 날이면 밥을 먹지 않더라도 식당에 들렀다.

말수가 많은 사람은 아니라 간단하게 인사만 나누고 돌아가는 게 일상이었다.

그래도 그런 날이 매일 반복되다 보니 좀 친해진 것도 같다.

‘아니, 잠깐. 이 사람, 식당 일 도와주겠다고 했었지?’

잠시 잊고 있었다.

사실 뭐라도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기에 그냥 농담처럼 넘어갔던 거였는데.

이제 보니 가까운 곳에 아주 좋은 인적자원이 있었다.

나는 고영한을 불러 도시락 건에 대해 얘기해보았다.

“모레요?”

“네. 혹시 오전에만 시간을 좀 빼주실 수 있나 해서요.”

“마침 이번 사냥은 내일까집니다. 모레에 일이 있긴 한데··· 무조건 빼겠습니

다.”

“아니, 무조건 그럴 필요까진 없어요.”

그냥 가능하냐고 물어본 거지 강압적인 의미로 얘기한 건 아니었다.

어차피 해결할 방법은 많이 있다.

하지만 고영한은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아뇨. 약속은 약속입니다. 언제든지 시간 내겠다고 한 말, 빈말 아니고 진심

이었습니다. 아, 차라리 이번 기회에 아직 인사 못 드린 신입 길드원들까지

데려오는 게 좋겠군요.”

그냥 도시락 만드는 데 일손 좀 빌려달라고 한 것뿐인데 뭐 그렇게까지···.

“진짜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요.”

“제가 원하는 겁니다. 부담스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겨우 조금 도울 기회

가 왔는데 놓쳐버리면 제가 너무 아쉬울 것 같아서요. 편하게 생각하세요.”

그렇게 말한다고 마음이 편하진 않지만, 뭐 알아서 하겠다는데 극구 말리는

것도 이상하다.

그 정도로 얘기를 마무리하고 고영한은 휴게소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는 도시락 메뉴에 대해 구상하는 시간을 가졌다.

* * *

오늘은 식당 내부가 평소보다 훨씬 더 시끌벅적하다.

“잠깐, 그건 이쪽에 담아야 해. 그리고 도시락통이랑 뚜껑은 여기서 가져가고.”

“네. 알겠습니다!”

고영한의 말에 그와 함께 온 신입 헌터가 싹싹하게 대답했다.

“선배님, 여기 밥 다 펐습니다.”

“샐러드 소스도 추가로 더 만들었어요. 이쪽에 두겠습니다.”

“김치는 이 정도씩 담으면 되겠죠?”

“네. 딱 적당하네요. 계속 그렇게 하면 되겠어요.”

지금 식당에는 고영한과 한성 길드의 신입 헌터 두 명이 찾아와 나를 돕고 있

었다.

신입 헌터 두 사람은 나도 아는 얼굴들이었는데, 과거 고영한과 함께 골렘에

게 당해 던전에 들어왔던 이들이었다.

도시락 메뉴는 돈가스로 골랐다.

손이 많이 가는 요리라 처음에는 다른 걸 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고영한과 그의 동료들이 도와주기로 해서 일손이 몇 배나 늘었기에,

돈가스로 확정 지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난하게 좋아하는 음식이니까.

깨끗한 기름에 튀김가루를 묻힌 돈가스를 조심스럽게 빠트렸다.

타닥타닥.

뜨거운 기름에 곧바로 튀겨지기 시작하는 돈가스.

“돈가스 크기가 꽤 크네요?”

옆에서 말을 거는 남자 헌터는 한성 길드의 C급 헌터 오재영이었다.

동생 지수보다도 어려 보이는 그가 오늘의 주방보조를 맡게 된 것이었다.

“뚜껑 열었는데 양이 작으면 좀 실망스럽잖아요. 물론 맛이 제일 중요하겠지

만, 그래도 첫눈에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으면 좋겠어서요. 최대한 넉넉하게,

그리고 보기 좋게 담으려고 해요.”

사실 재료값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상황이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긴 했다.

“맞아요. 맞아요. 사 먹는 사람 입장에서 그것도 중요하죠.”

오재영이 맞장구를 쳤다.

그는 상당히 만족스럽게 주방보조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빠릿빠릿하게 말귀를 알아듣고, 말하지 않아도 깨끗하게 정돈을 잘해준다.

헌터가 되기 전에 식당 아르바이트 경험이 많다는 말이 사실인 것 같다.

“이렇게 도와주시니까 저야 좋은데. 한성 길드는 괜찮은 거예요? 너무 여러

명이 한꺼번에 빠진 거 아닌가?”

튀겨지는 중인 돈가스의 상태를 살펴보며 물어보았다.

행주로 조리대를 훔치던 오재영이 미소 지으며 대답한다.

“다른 길드원들이랑 잘 교대해서 문제 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저 혼자였으면

못했을 텐데 영한 선배님이 꼭 가야 한다고 대신 얘기를 잘해주신 것 같아요.”

“그럼 오늘 너무 무리해서 시간 뺀 거 아닙니까?”

“에이, 괜찮습니다. 늦었지만 이렇게라도 얼굴 뵙게 돼서 다행이에요. 고영한

선배님 얘기 듣고 저도 빨리 찾아와서 감사 인사해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게 잘 안되더라고요. 아직 길드 들어온 지 몇 달 되지도 않아서 그냥 일정 짜

여진 대로 따라가야 하는데, 그동안은 휴게소 들어올 수 있는 상황이 안 돼가

지고···. 오늘뿐만 아니라 도움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말해주세요.”

“이런 일이 많진 않을 것 같지만··· 그럴게요.”

들어보니까 조금 무리해서 시간 낸 게 맞는 거 같긴 하다.

그렇지만 진심 어린 호의는 거절하는 것보다 받는 게 서로에게 좋을 것이다.

게다가 이유가 없는 것도 아니고, 생명의 은인이라 여긴다고 하니, 받아줘야

마음의 부채가 조금이라도 해소되겠지.

식힘망 위에 돈가스가 계속해서 쌓여갔다.

오재영은 내가 튀긴 돈가스를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서 도시락통에 담았다.

이미 고영한과 배현지라는 신입 헌터가 밥과 샐러드, 소스 등을 담아놓은 상

태였다.

공장에서 분업해 일하는 것처럼 빠르게 도시락이 완성되어 갔다.

그때 한성 휴게소 방향에서 누군가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사장님! 어···? 고영한? 여기서 뭐 하는 거야?”

한성 길드의 유희진이었다.

유희진의 눈동자가 어정쩡하게 선 고영한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푸훗!”

“···왜 웃어.”

“아니, 그런 모습은···. 크흡!”

“······.”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음을 참으려 노력하는 것 같은데, 어깨가 계속 들썩거

리고 있다.

고영한을 제외한 모두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모두가 왜 웃는지 알고 있었다. 심지어 고영한 본인조차도.

나를 돕는 헌터들은 모두 평소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직접 요리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위생을 위해 마스크와 두건을 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다들 그냥저냥 어울리는데, 유독 고영한은 그 모습이 심하게 언밸런스했다.

그는 커다란 덩치에 근육질 몸을 가진 격투 계열 헌터였다.

전투복이 유난히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대신 이런 복장은

덩치에 비해 옹졸해 보이는 느낌이 있었던 것이다.

특히나 턱수염을 가리느라 유난히 꽁꽁 싸맸다는 점도 웃겨 보이는 것에 한몫

했다.

“크흑···. 휴···.”

겨우 웃음을 어느 정도 참아낸 유희진이 입술을 미약하게 떨면서 겨우 말을

꺼냈다.

“흠흠, 맨날 전투복 입고 있는 걸 보다가 갑자기 복장이 달라져서 놀랐네. 그

냥 어제 웃긴 일이 생각나서 웃은 거야. 잘 어울려.”

“······.”

전혀 믿지 않는 눈치에 유희진이 빠르게 말을 돌렸다.

“아, 너 오늘 사냥 갑자기 교대한 게 이것 때문이었어?”

“말했잖아. 그때 구해주신 분이 사장님이었다고. 일손 필요하시다기에 도와드

리려고 온 거야. 너는 여기 왜 온 건데?”

“왜냐니, 휴식 시간이라서 와본 거지. 그런데 너무 바빠 보이네. 흐음···.”

눈동자를 움직이며 도시락통이 쌓여있는 식당을 훑어본 유희진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사장님, 저도 도와드릴게요!”

“됐어. 너는 그냥···.”

유희진이 만류하는 고영한의 말을 끊었다.

“야, 동기 좋다는 게 뭐냐. 그리고 어차피 사장님이랑 잠깐 이야기 나누려고

온 건데, 도와드리면 좋지 뭐. 다 끝나가는 것 같긴 한데··· 그래도 뭐 할 거

없을까요, 사장님?”

아, 있었다.

생각해 둔 게 있었는데 빠뜨릴 뻔했다.

“그럼 헌터님은 돈가스에 이것 좀 뿌려주세요.”

나는 그녀에게 녹색 가루가 든 유리병을 건넸다.

“이거 파슬리예요?”

“네. 뭐 비슷한 거죠. 이 정도로만. 아시겠죠?”

대답하면서 돈가스에 파슬리 같은 녹색 가루를 톡톡 뿌려주었다.

유희진이 유리병을 받아 들면서 말했다.

“오, 역시 초록색이 좀 추가되니까 더 예쁘네요.”

보기에 좋은 건 맞다.

하지만 이건 그냥 장식용으로 추가한 건 아니었다.

이 녹색 가루는 이세계의 조금 특별한 재료로, 며칠 전 받은 선물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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