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돈가스 (47/125)

      돈가스

‘남서쪽 어느 숲의 엘프 마을에서 귀하게 여기는 허브를 말려 가루 낸 것이라

고 했지.’

신트라는 이름을 가진 이 허브는 긴장을 완화해주고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데

큰 효과가 있다고 한다.

이 선물을 확인하자마자 살짝만 찍어 맛보았는데 확실히 변화가 느껴졌다.

그냥 허브일 뿐인데 이 정도면 거의 의약품에 준하는 효능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크게 쓸 데가 없는 물건이었다.

애초에 긴장하거나 스트레스받을 일이 거의 없는 상황이다.

그리고 설사 피로가 쌓인다고 해도 쉽게 해결할 수 있다.

몸에 마나를 한 바퀴 순환시키는 것만으로도 깊이 숙면하고 깨어난 것과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나에게 쓸모없다고 귀하지 않은 물건은 아니지.’

감사의 선물로 받은 건데 어디 갖다 팔기도 그렇고, 그냥 창고에 넣어두는 것

도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다.

이왕이면 아깝게 여기지 말고 자기 쓰임새에 맞는 곳에 적절하게 쓰는 것이

좋겠지.

‘헌터들보다는 비각성자들에게 더 필요하지 않을까?’

전투에 나서야 하는 헌터들에게는 어느 정도의 긴장감이 필요하다.

너무 풀어지다 보면 도리어 부상을 입을 확률이 높아질 것이다.

이걸 어디 쓸까 생각하던 중에 마침 송혜연의 연락이 왔고, 헌터 관리국 직원

들에게 알맞을 거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임무를 배정받은 유희진이 열심히 돈가스에 신트 가루를 뿌렸다.

나는 남은 돈가스를 마저 튀겼고, 나머지 사람들도 각자 할 일에 집중했다.

그리고 마침내 80번째 도시락의 뚜껑이 닫혔다.

“···칠십칠, 칠십구, 팔십. 다시 세어봐도 맞아요. 완성입니다.”

배현지라는 여자 신입 헌터가 손가락으로 도시락을 가리키며 말했다.

“시간 딱 맞네요. 지금 배달 보내면 점심시간에 맞춰 도착하겠어요.”

“던전 바깥까지 가져가면 되는 거죠?”

“맞습니다. 관리국 직원이 직접 받아 가기로 했습니다.”

“저희가 옮길게요.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사장님은 괜히 이쪽으로 나가지 마

세요.”

F급의 전투 능력을 거의 비각성자 수준으로 생각하는 고영한의 말이었다.

“그래 주시면 고맙죠.”

내 말에 고영한과 헌터들이 도시락이 든 상자를 들어 옮겼다.

‘맛있게 먹었으면 좋겠네.’

신트 가루도 누구에게든 도움이 되면 더 좋겠고 말이다.

* * *

헌터 관리국 본부 1층에 위치한 헌터 지원팀은 관리국을 찾는 헌터들을 1차적

으로 응대하는 팀이었다.

“저기요! 저도 헌터인데 왜 대상자가 아니란 겁니까?”

화가 많이 난 남자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그의 맞은편에 앉은 헌터 관리국 직원, 김슬기가 조금 주눅 든 얼굴로 대답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전투계열 헌터는 해당되지 않는 내용이라서요. 그리고 그

부분은 저희 관리국에서 말씀하실 게 아니라···.”

“아니, 내 얘기를 안 들은 겁니까? 협회에서 이쪽으로 가보라고 했다고요. 다

시 한번 확인 해봐요.”

“아··· 예. 잠시만요.”

잠깐 컴퓨터 화면을 보던 김슬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네. 이쪽에서 확인하는 게 맞네요. 죄송합니다. 저는 다른 프로그램 애기

를 하시는 줄 알고.”

“아이고, 답답해라. 일을 왜 그런 식으로 해요? 지금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사람 말을 뭐로 듣는 건지 계속 딴소리나 하고.”

“처음에는 다른 말씀을 하셔서 잠깐 헷갈렸던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그 말은 그냥 내가 잘못했던 거다 이겁니까? 와, 진짜 너무하네.”

“그런 게 아니라··· 일단 진정하시고 다시 얘기를···.”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요? 그쪽이 상황을 이렇게 만들어놓고 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

남자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상대의 실수임이 확실해졌으니 점점 더 의기양양해진 것이다.

악화되는 상황에 옆자리의 동료가 사이로 끼어들었다.

“무슨 일로 그러시죠? 저한테 말씀해주세요.”

“에이, 그게 낫겠네요. 이분은 왜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건지. 답답해서 혼났네.”

동료 직원이 김슬기에게 작게 속삭였다.

“잠깐 쉬고 있어. 내가 해결할 테니까.”

“죄송합니다···.”

그렇게 김슬기가 뒤로 물러나고 나서야 일이 수습되었다.

잔뜩 주눅 든 그녀는 뒤로 빠져있는 내내 깊은 한숨만 내쉬었다.

최근 실수가 유난히 잦았는데 오늘은 더 심했던 것 같다.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는데 스스로 생각해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자괴감에 빠져있는 사이, 어느새 점심시간이 가까워져 있었다.

남자 헌터의 일을 처리하고 돌려보낸 동료 직원이 그녀를 찾아와 말을 걸었다.

“슬기 씨, 요즘 많이 힘들어?”

“아···.”

괜한 실수로 뒤치다꺼리나 하게 만들어서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따뜻

하게 말을 걸어준다.

김슬기는 울컥하는 걸 참으며 머리를 떨궜다.

“죄송해요. 정신 바짝 차리려고 하는데 자꾸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더 잘

하겠습니다···.”

“아니, 화내는 건 아니고. 원래 안 이랬었는데 최근 들어서 실수가 잦아진 것

같아서. 무슨 일 있나 싶어서 그래.”

“특별히 힘든 일이 있는 건 아닌데···.”

“그래?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런가? 좀 릴렉스해. 너무 신경 쓰면 될 일

도 안 돼.”

맞는 말인 것 같았다.

요즘 그녀는 이상하게 신경이 많이 곤두서 있었다.

예전보다 출근할 때도 스트레스가 컸고, 일할 때도 사람 한 명 한 명을 상대

할 때마다 많이 긴장되었다.

‘원래부터 이렇진 않았는데···.’

생각해보면 몇 주 전 있었던 일이 지금 상태의 원인인 것도 같았다.

역대급 진상 헌터를 만났던 그날.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말 한마디 한마디 꼬투리를 잡으며 시비 걸

다가 언성이 높아졌었다.

그때는 자신이 잘못한 것도 없었다.

나중에 가서는 거의 깽판을 놓다가 헌터들에게 쫓겨났었는데, 당시 너무 놀라

서 심장이 쿵쾅거리고 손이 떨릴 지경이었다.

아무래도 그 일이 원인이 된 것 같다.

‘그만두고 싶다···.’

지금껏 그럭저럭 만족하며 다녔던 직장이었는데, 이대로라면 동료들한테 민폐

가 될 뿐이었다.

아직은 괜찮다고 다독여주지만,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모두 돌아서고 말 것이

었다.

“점심 먹으러 가자. 요 옆에 새로 생긴 돈가스집 가볼까? 거기 맛있다던데.”

동료 직원의 말에 김슬기는 상념에서 벗어났다.

계속 어두운 모습을 보이는 건 좋지 않을 거라는 걸 머릿속으로 상기하며 마

음을 다잡았다.

“어··· 오늘은 도시락 먹기로 한 날 아닌가요? 그 던전 식당 거 같이 주문했

었잖아요.”

“아, 그게 오늘이었어? 맛있는 거 사주려고 했는데 오늘은 안 되겠네.”

“도시락 메뉴도 돈가스래요.”

“음, 그래? 그런데 뭐, 크게 기대는 안 되네. 어차피 던전 가서 직접 먹는 것

도 아니고.”

“그쵸? 저도 그냥 분위기 타서 덩달아 주문했던 것 같아요. 아무래도 이번에

놓치면 맛볼 기회조차 없을 것 같아서.”

함께 걸어간 두 사람은 휴게실에 쌓인 도시락 두 개를 챙겨 마주 앉았다.

김슬기가 도시락 뚜껑을 열며 말했다.

“보기에는 생각보다 괜찮은데요?”

“그러게? 양도 많고 구성도 좋은데? 메뉴가 정해진 건 아니라고 들었는데, 돈

가스 전문점에서 나온 것처럼 보인다. 그치?”

그럴싸해 보이는 도시락의 모습에, 먹기 전에 공들여서 사진을 찍었다.

사실 던전 식당의 도시락에 두 사람 다 크게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맛으로 유명해진 곳이 아니었지만, 이런 때 아니면 맛볼 기회조차 없

다는 생각 때문에 시킨 것에 가까웠다.

“먹자, 먹자. 힘들수록 더 잘 먹어야 돼. 우울하다고 굶으면 안 되는 거 알지?”

“네. 잘 챙겨 먹을게요.”

김슬기는 조금 쑥스러워져서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돈가스 한 조각을 젓가락으로 집었다.

통 속에 있었는데도 튀김옷이 물러지지 않았다.

소스에 푹 찍어 입으로 가져가 베어 물었다.

파삭.

돈가스는 아직 식지 않아 따뜻했다.

바삭한 겉면과 달리, 속의 고기는 너무나 부드러웠다.

고기 안쪽까지 간이 배어 있고, 촉촉했다.

“어? 맛있는데?”

“그러게요. 되게 괜찮은데요?”

기대하지 않았는데, 첫맛이 예상보다 훨씬 괜찮았다.

“엄청 부드러워요. 아니, 왜 이렇게 맛있는 거죠? 진짜 대박인데?”

“그냥 던전에 있는 식당이라서 유명해진 게 아닌 건가? 이 정도면 밖에서도

사 먹을 것 같아.”

“저도요. 진짜 맛있어요.”

작게 감탄하며 도시락을 먹는 사이, 김슬기의 기분도 많이 나아졌다.

역시 그 상황에 매몰되어 있는 것보다 일상적인 다른 일이라도 하는 것이 정

신 건강에 훨씬 좋은 것 같다.

그래도 다시 일을 시작하면 그 긴장감이 올라오겠지만···.

‘우선은 먹자.’

돈가스, 소스, 샐러드, 밥, 장국.

모두 평균 이상으로 괜찮았다.

양이 꽤 많았는데 어렵지 않게 도시락통을 모두 비웠다.

“나 오늘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

“진짜 다 드셨네요? 원래 먹던 거보다 훨씬 더 드신 것 같은데요?”

평소 입이 짧은 동료 직원마저 모두 먹었다.

그녀가 다 먹었다는 건 진짜로 입맛에 맞았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잠시 후, 오후 업무가 시작되었다.

‘실수하지 말아야지. 정신 바짝 차리고.’

김슬기가 속으로 생각했다.

요즘 일하면서 계속 혼자 되뇌는 말이었다.

그래도 막상 헌터가 다가와서 말을 걸면 저절로 머리가 굳어버리는 게 문제였

지만···.

그때, 한 남자가 그녀의 자리로 다가왔다.

김슬기는 몸에 밴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무슨 일로 오셨어요?”

“그게, 하필 저희 집 바로 입구 쪽에 돌발 던전이 생겨서요. 클리어되긴 했는

데 보상 관련해서는 여기 직접 와서 처리해야 한다고 하길래 왔습니다.”

“아, 네. 지역이 어디시죠?”

얘기를 이어나가는데 뭔가 이상하다.

최근 계속 자기도 모르게 긴장해서 말을 더듬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데 지금은 행동이나 말이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자연스럽다.

심장이 두근거리거나 입이 마르지도 않는다.

김슬기는 계속해서 헌터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럼 이제 다 된 거네요?”

“네. 진행 상황은 따로 연락 갈 거예요.”

“예. 설명을 알기 쉽게 해주시네요. 감사합니다.”

응대에 만족한 듯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떠나는 헌터를 보니, 뭔가 잘 해결했

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 좀 괜찮아진 건가?”

점심 먹기 전과 후의 차이일 뿐인데 뭔가 훨씬 마음이 편해진 것 같다.

크게 긴장되는 것고 없고 그래서인지 머리도 핑핑 잘 돌아간다.

원래라면 오전의 실수 때문에 더 위축되어 사소한 실수라도 했을 법한데 오히

려 모든게 다 자연스럽게 잘 흘러갔다.

그런 상태는 퇴근 시간까지 쭉 이어졌다.

“슬기 씨, 오늘은 좀 좋아 보이는데? 아니 정확하게는 오후 컨디션이 괜찮아

보여.”

“아, 그게 보였어요?”

“응. 최근에 본 중에 제일 표정도 좋고.”

남의 눈에도 그렇게 보일 정도면 상태가 괜찮은 것은 확실하다.

“이상하게 마음이 좀 편하네요. 아까 실수했던 것도 크게 신경 안 쓰이고.”

“그거 다행이다. 그런 거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 게 좋지. 근데 뭔가 나도 오

늘은 뭔가 마음이 되게 편한 거 같네? 날씨가 좋아서 그런가?”

김슬기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오후에는 팀 분위기도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느낌이 있었다.

날씨 때문이라고 하기엔 좀 부자연스러운 변화인데.

“아무튼, 계속 아까처럼 하면 될 것 같아. 오늘 고생 많았어. 내일 봐!”

“네. 들어가세요!”

동료 직원이 산뜻한 발걸음으로 떠났다.

김슬기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맺혔다.

왜인지 자신감이 살아나는 것 같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