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잼
도시락 80개를 헌터 관리국에 보낸 후, 수고한 이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
물론 메뉴는 돈가스였다.
자의적으로 도와준 거라고 해도 같이 열심히 만들고 포장해서 보낸 음식인데
맛 정도는 보여줘야 하지 않겠는가.
바사삭.
“으음, 역시 맛있네요. 무슨 요리든 기대 이상으로 맛있어요.”
돈가스를 한입 베어 문 유희진이 나를 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돈 받고 파는 거니까 잘 만들 수 있는 것만 팔려고 하는 거죠.”
“그 요리 스펙트럼이 엄청 넓은 것 같다는 말이었어요.”
우물거리며 한입 더 베어 문 그녀가 또다시 입을 열었다.
“역시 갓 튀겨낸 게 진짜 맛있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도시락은 이동하면서
조금은 식었겠죠?”
“시간 딱 맞춰 빨리 보내서 괜찮을 거예요. 그래도 지금 우리가 지금 먹는 게
이 돈가스가 낼 수 있는 최고의 맛이긴 하겠죠.”
내 대답에 다른 헌터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식당을 처음 방문한 신입 헌터 두 명은 진심으로 놀란 듯한 표정으로 돈가스
를 우물거리고 있었다.
사냥 중 잠깐 들린 유희진의 돈가스에는 일부러 신트 가루를 뿌려주지 않았다.
괜히 긴장감이 풀려 부상이라도 당하면 안 되니까.
유희진은 알아채지도 못하고 바로 돈가스를 먹었다.
혹시 알아챘더라도 그냥 장식용 가루를 빠뜨린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맛있게 먹는 사람들을 보던 중에 궁금한 것이 하나 생겨났다.
나는 고영한을 향해 질문했다.
“전에 다쳤을 때 제 던전으로 피신 왔던 사람이, 제 기억으로는 4명이었는데
맞습니까?”
“맞습니다. 저랑 신입 헌터 3명 해서 총 4명.”
“다른 두 사람은 바빠서 안 데리고 오신 건가요?”
뭐라고 하려는 건 아니고, 순수한 궁금증이었다.
고맙다는 인사도 시킬 겸 데려오겠다고 했으니까.
“아···. 그런 건 아니고. 두 사람은 길드를 탈퇴했습니다. 그때 그 사건 때문
에···. 고민이 길어지더니, 결국 계약을 취소해달라고 하더군요. 누구 하나가
특별히 잘못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한성 내에서의 문제였으니 조건 없이 받
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은근히 풀이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 불찰이 컸죠. 그때 주의했어야 했는데···.”
“아직도 이러네. 네 잘못 아니었다니까. 그리고 다 무사했잖아. 사장님 덕분
이긴 해도.”
유희진이 혀를 쯧쯧 차며 고영한의 어깨를 툭툭 쳤다.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으려고 하는 순간에, 신입 헌터 오재영이 입을 열었다.
“선배님,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뭐지?”
고영한이 조금 불안한듯 대답했다.
괜히 그때 사건 이야기가 나와서 안 좋은 쪽으로 이야기가 흘러갈까봐 걱정되
는 것처럼 보였다.
“저희끼리는 얘기를 많이 했는데, 말 꺼내기가 좀 그래서 그냥 넘어갔었거든
요. 갑자기 이런 말 할 타이밍도 못 찾겠고 해서···. 그런데 지금이라도 얘기
해야 할 것 같아서요.”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희 여기에 남기로 한 거 선배님 때문입니다.”
“뭐? 그게 무슨 의미인지 잘 이해가 안 가는데···.”
“물론 실제로 각성한 지 한 달 만에 그런 사고를 겪을 줄은 몰랐고 솔직히 충
격을 받은 것도 맞긴 합니다.”
“···.”
“그런데 어차피 던전에서 하는 일은 모두 위험하고, 안전이 완전히 보장된 일
은 없어요. 그건 헌터가 아니라 비각성자들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고요.”
“······.”
“중요한 건 그런 상황이 닥쳤을 때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함께 있어야 한다는
거다, 그리고 고영한 선배는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저희 둘 다요. 그래서 한성 길드보다는 선배님 보고 여긴 남기로
결정한 게 커요.”
말하다 보니 쑥스러운지 오재영의 목소리가 조금 작아졌다.
그를 대신해 배현지가 말을 이었다.
“그때 선배님이 몸 날려서 저희 보호해주신 거 다 기억하고 있어요. 그러지
않았으면 저희는 그때 바로 죽었을 수도 있었을 거고요. 사장님도 저희 은인
이지만, 선배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나는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책임져야 하니까 당연히···.”
“그 당연한 걸 안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
분위기가 급격히 훈훈해졌다.
유희진이 민망해서 얼굴이 조금 달아오른 듯한 고영한을 툭툭 쳤다.
“오오···. 그랬던 거였어? 완전 멋있잖아.”
“맞아요. 멋있었어요.”
“그때 속으로 감동했습니다.”
“크흠···. 알겠어. 이 얘긴 그만해도 될 것 같은데.”
고영한이 애써 이야기를 돌리려 했다.
술이라도 한 잔 마시다가 할 법한 이야기를 돈가스 먹다가 하는 게 조금 어색
하긴 했다.
그리고 나는 남의 집구석에 끼어있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뭐···. 그래도 나쁘지는 않네.’
흥미롭기도 하고, 괜히 내가 다 흐뭇해지는 대화 내용이었다.
나는 약간 뒤로 빠져서 구경하고 있다가 분위기가 너무 어색해지는 것 같아서
끼어들었다.
“돈가스 다 드셨네요? 더 먹고 싶은 분 있으면 더 드릴게요. 말해주세요.”
내 말에 괜히 같이 민망해하던 신입 헌터들이 번쩍 손을 들었다.
“그럼 저 하나만 더···.”
“저도요. 샐러드도 더 주실 수 있으면···.”
“물론이죠.”
내가 돈가스를 추가로 튀기는 사이에 이야기의 화제는 다른 쪽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다들 방금의 이야기를 곱씹고 있지 않을까?
‘한성 길드는 엄청 끈끈해지겠네.’
같이 위기를 겪었고, 그 과정에서 믿음을 얻은 관계.
웬만하면 깨어지지 않을 단단한 유대가 생겼을 것이다.
보기 좋은 모습에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 * *
그날 오후, 헌터 관리국 송혜연에게서 전화가 왔다.
- 반응이 엄청 좋았어요. 궁금해서 만족도 조사까지 해봤거든요. 대부분이 배
부르게 맛있게 너무 잘 먹었다고 만족하고 있어요.
“그거 기분 좋은 말이네요.”
내가 만든 요리가 맛있었다는 것만 한 칭찬이 없다.
- 나중에 기회 되면 또 주문하고 싶다는 사람도 엄청 많아요. 근데 그건 좀
힘들겠죠?
“당분간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저 혼자 만들 양은 아니라 사람을 구해서 만
들었거든요. 다른 메뉴라고 해도 도시락을 연달아 먹으면 좀 질릴 수도 있고.
나중에 또 기회를 만들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 네네. 혹시나 해서 말해본 거예요. 중요한 건 그만큼 직원들이 맛있게 먹었
다는 거죠. 사람들이 원해서 추진한 건데 좋아하니까 저도 기쁘네요. 역시 다
들 맛있어 할 줄 알았어요.
엘프에게서 받은 그 신트 가루가 얼마만큼의 효능을 보여줬을까?
그게 크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조금 궁금해져서 은근히 물어보았다.
“혹시 헌터 관리국 오늘 분위기는 어땠어요?”
- 분위기요?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거지? 음···.
“그냥, 전반적으로 평소랑 좀 다른 느낌이 있었는지 궁금해서요.”
- 전반적으로··· 흐음···. 이건 그냥 완전히 제 주관적인 느낌이었는데요. 평
소보다 좀 잔잔하고 평화로운? 그런 분위기가 있었던 것도 같아요. 물론 저도
제 일 해야 하니 지나가면서 본 게 다지만. 그런데 그건 왜요?
“아닙니다. 그냥 헌터 관리국에 관심이 가서요.”
- 오, 들어오실 생각 있는 거예요? 사장님이라면 특별 채용까지 가능할텐데.
제가 국장님한테까지 제대로 푸시해볼게요.
송혜연이 농담인지 진심인지 모를 말을 던졌다.
아무래도 조금 진지한 톤이 섞인 것 같기도 한데.
“하하, 괜찮습니다. 저는 그냥 딱 식당 사장으로 만족하거든요.”
-에이···. 잠깐 기대했는데, 아쉽네요. 하긴, 조건으로 따지면 헌터 관리국보
다 더 좋은 곳이 많겠죠. 한성 길드랑 엮인 부분도 있고···.
“진심이셨어요?”
- 당연하죠. 복잡한 부분이 있어도 사장님 의사만 확실했다면 제가 적극적으
로 밀었을 거예요.
하긴 원래도 내 능력의 가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다.
게다가 지금도 자꾸 던전을 더 보고 싶어 하는 티를 지금도 내는데, 내가 바
로 옆의 동료로 일하기를 생각보다 훨씬 더 바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몇 번 더 혹시 진심으로 생각 있으면 얘기하라는 말을 한 송혜연은 식당에 조
만간 또 찾아오겠다며 대화를 끝냈다.
* * *
냉장방에 과일들이 한가득 쌓여있다.
아스키나 대륙에서 가져왔던 것들이다.
그중에서 가장 많은 건 새빨갛게 잘 익은 사과였다.
‘이걸 먼저 좀 처리해야 될 것 같은데.’
종종 손님들 식사 마치고 간식으로 내 주기도 하고, 베로나 슬라임들에게도
자주 주는데 빨리 소비되지 않고 있다.
생각보다 싱싱한 상태로 오래가는 것 같긴 한데, 이러다 갑자기 썩을 수도 있
을 것 같다.
하지만 워낙 맛도 좋고 버리기엔 아깝다.
‘이럴 때는 한꺼번에 처리해버리는 좋은 방법이 있지.
나는 창고에 놓아둔 사과를 한가득 들고 부엌으로 이동했다.
이것들을 모두 잼으로 만들어버릴 생각이었다.
그러면 보관 기간도 길어지고, 그래도 양이 많다 싶으면 그냥 주변에 선물로
나누어줘도 괜찮다.
만드는 방법 자체도 크게 어렵지 않다.
탁탁탁탁!
나는 옆에 가득 쌓아둔 사과의 껍질과 씨를 제거하고 잘게 썰어주었다.
사과즙이 조금 흘러나오며 달콤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아무래도 씹히는 맛이 있는 게 좋을 테니, 너무 작은 조각으로 만들지는 않았다.
이 사과 조각과 설탕을 냄비에 넣고 졸여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때 설탕을 많이 넣어줄수록 보관 기간이 길어진다.
여기에 레몬즙과 시나몬 가루도 추가했다.
커다란 냄비 속에서 보글보글 작은 거품을 내며 끓는 사과잼을 계속 저어주었다.
사과가 살짝 물컹해지며 색이 어두워졌을 때 한 숟가락 떠서 맛을 보았다.
“달달하니 맛있네.”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맛이다.
보통은 오래되어 푸석하거나 맛없는 사과를 잼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많다.
나도 보통은 그렇게 해 먹었었고.
그런데 맛있는 사과를 이용해서 만들어보니까 미묘하게 맛이 더 좋은 것 같다.
게다가 대륙의 과일이 가지는 그 짙으면서도 부담스럽지 않은 단맛이 잼에서
도 확실히 그 효과를 보여주고 있었다.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크기의 유리병에 사과잼을 소분해 담았다.
“어디 한번 제대로 먹어볼까?”
오후 3시경.
마침 출출한 것이 간식 먹기 딱 좋은 시간이다.
식사 시간은 아니라 한성 길드에서 오는 손님도 없을 것 같다.
나는 집에 사두었던 식빵을 가지고 와서 프라이팬에 올렸다.
버터까지 바르면 너무 느끼할 것 같아서 살짝 바삭할 정도로 아주 가볍게만
구웠다.
갓 만든 사과잼을 듬뿍 바르고 다른 식빵으로 덮어주었다.
여기서 직각으로나 대각선으로 한번 썰어주면 딱 먹기 좋은 크기의 샌드위치
가 된다.
빵과 잼의 향기가 식욕을 돋운다.
바사삭.
겉만 살짝 익은 식빵이 부드럽게 바스러진다.
한입 더 씹으니 달콤한 사과잼의 향과 맛이 입안을 가득 채운다.
몽클거리는 사과 알갱이를 씹었다.
그러자 안쪽에 남아있는 사과즙이 조금 더 신선한 맛을 더했다.
“이건 내가 먹어 본 사과잼 중에서도 제일 맛있는 것 같은데?”
시판용과는 또 다른 수제 사과잼만의 매력이 확실히 있다.
거기다가 재료 자체가 너무 좋아서 이런 맛이 나는 것이다.
이건 괜찮은 값에 팔아도 될 정도의 퀄리티이다.
내가 먹기도 하고 단골 손님들에게 나누어 주어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