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의 세계
칼로스가 주저리주저리 이 차가 얼마나 귀하고 좋은 것인지 설명하는데 하나
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효능 같은 건 알고 싶지도 않을 정도로 구역질나는 맛이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검은 차를 보니 또다시 그 맛이 떠오를 것 같았다.
‘입맛 한번 고약한 놈들이군.’
나는 스켈레톤에게 손짓해서 그걸 멀리 치워버리도록 했다.
스켈레톤은 내가 자기 주인과 동등한 관계 정도일 거라 인식했는지 순순히 잔
을 들고 사라졌다.
“후우···. 너는 미각이 대체 어떻게 생겨 먹었길래 저딴 걸 그렇게 태연하게
먹는 거냐. 아니, 마족 놈들은 다 그런 건가? 어떻게 맛이 없어도 없어도 저
렇게 없을 수가 있냐고.”
아까부터 당황한 기색으로 내 눈치를 살피던 칼로스는, 이제 상황이 좀 진정
되었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놈은 헛기침을 하더니 다시 당당하게 대답했다.
“크흠, 맛? 그런 게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물론 나에게도 미각이 있지
만 크게 의미 있는 건 아니야. 무언가를 먹는 것은 오직 신체를 위해서일 뿐.
몸이 음식을 필요로 하거나 강해질 수 있는 무언가일 때 의미가 있는 것이지.”
후루룩.
그러면서 그 썩은 국물을 입안에 털어 넣고 미간을 약간 찌푸리면서 꿀꺽 삼
킨다.
“이 정도면 먹을 만한데···.”
“······그래, 너나 많이 먹어라.”
음식 섭취에 대한 마족의 개념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닌 것 같다.
하기야··· 농사지을 만한 땅도 아니고, 사육할 가축도 없는 몬스터들만의 땅
이다.
요리나 미식에 관심 가질 환경은 아니지.
“됐고, 궁금한 게 몇 개 있어서 말이야.”
이제야 대화가 진짜 본론으로 들어간다.
특별한 용건이 있다기 보다는, 내가 알고 있는 것, 그리고 짐작하고 있는 것
이 맞는지 틀렸는지 확인하고 싶을 뿐이지만.
“···뭘 물으려는 건가?”
칼로스는 꿀꺽 침을 삼키며 질문을 기다리고 있다.
현재 마계와 아스키나 대륙, 그리고 지구는 평형을 이룬 안정된 상태를 유지
하고 있다.
이는 어느 순간,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면서 자연스럽게 깨우치게 된 것 중 하
나였다.
그러나, 현재의 상태가 아닌 과거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불명확한 것들이
있었다.
“현재, 세 개의 차원은 여러 개의 게이트가 생겼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방식
으로 연결되어 있지. 정확히는 마계와 아스키나 대륙 사이의 게이트, 그리고
마계와 지구 사이의 게이트가 존재하는 상태야.”
그리고 예외적으로는 내 던전이 세 개의 차원을 모두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하고 있다.
그건 말 그대로 예외이니 제쳐두기로 했다.
물질계가 아닌 정령계는 엄밀히 말자면 아스키나 대륙에 포함된 것이라고 봐
야 할 것이고.
“그리고 과거 어마어마하게 많았던 마계와 아스키나 대륙 사이의 게이트는 이
제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로 줄어들었고.”
“그렇다. 네가··· 아니, 당신이 그렇게 만들었지.”
칼로스는 눈치를 보며 애매하게 호칭을 바꾸었다.
“그런데, 그 게이트는 태초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니지. 지구의 경우는 겨우
15년 전 처음으로 대격변이 일어나며 마계와 연결되었어. 그 이전의 지구는
다른 세계와 연결점이 없는 독립된 세계였고.”
나는 칼로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하고 있는 걸 확인하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건 아스키나 대륙도 마찬가지였을 것 같은데···. 내가 궁금한 부분
은, 그 게이트를 마계의 마족들이 고의적으로 발생시킨 거냐는 것이다.”
내 말을 들은 칼로스는 크게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고개를 저었다.
“나는··· 솔직히 잘 모른다.”
“거짓말을 하면 어떻게 될 건지 알고 하는 말이겠지?”
꿀꺽.
칼로스의 목울대가 꿀렁거렸다.
그러나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바뀌지 않았다.
“지, 진짜로 몰라서 모른다고 말하는 거다. 나에게는 내 목숨이 가장 중요하
단 말이다!”
졸렬하기 짝이 없는 말이다.
나보다 약해 보이는 것보다는 이런 모습이 부하들에게 더 구려 보이지 않을까
싶은데.
“그럼 정확하지는 않아도 왜 그런 일이 생긴 건지 짐작하는 바가 있나? 아니
면 그 시기에 뭔가 특별한 일이 있었다거나···.”
그 말에는 고개를 끄덕인다.
“있었어. 마계에 사는 자들이라면 절대 잊을 수 없을 충격적인 일이었지.”
“그게 뭔데?”
칼로스의 눈동자가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는 듯 초점이 흐려졌다.
“20여 년 전에··· 마계 전체가 흔들리는 듯한 어마어마한 충격이 한 번 있었
다. 땅이 뒤흔들리고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굉음이 들려왔어. 아무리 강력한
마계의 몬스터라고 해도 그 순간에는 어찌할 바 모르고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지.”
생각만으로도 오싹한 지 말끝에 어깨를 한번 부르르 떤다.
“꼬박 일주일. 밤낮 할 것 없이 하늘을 울리는 굉음과 끝없이 흔들리는 땅 위
에 웅크린 채,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느꼈었다.”
다다다다닥.
가까이 서 있던 스켈레톤 두 마리가 턱을 달달 떨었다.
그들 또한 그때의 공포를 다시 느끼는 모양이었다.
잠시 깊게 숨을 들이마신 칼로스가 원래의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무나도 다행스럽게, 일주일 가량이 흐르고 마계는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
아왔다. 그땐 모든 게 끝장나는 줄 알았는데···.”
“그 원인은 모른다는 거지?”
“그래. 그냥 겪었던 일을 그대로 이야기하고 있는 거라고. 왜 그런 일이 생긴
건지는 몰라. 다만, 그 이후로 아스키나 대륙으로 향하는 게이트가 하나둘 생
겨나기 시작했지. 몇 년 후에는 수백, 수천 개로 늘어났고, 마계의 몬스터들
은 자연스럽게 그리로 넘어가 대륙을 점령하게 되었다. 일부 마족들은 그걸
새로운 기회라고 여기기도 한 모양이었지만, 나는 솔직히 관심도 없었다고.
내 영역과도 무관했던 일이고!”
제발 그대로 믿어주길 바라는 듯 절절하게 말한다.
“그럼 15년 전에는?”
지구에 대격변이 발생했던 시기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때도 마찬가지로 비슷한 일이 발생했었어. 다행히 일주일이 아닌 3일
만에 그 현상은 사라졌지. 과거에도 한 번 있던 일이었기에 그래도 두려움은
조금 덜했어. 이러다가 다시 안정될 거라는 걸 학습했으니까.”
“흐음··· 그렇군. 결국 그 알 수 없는 천재지변이 마계와 아스키나 대륙이 연
결되는 시기, 그리고 마계와 지구가 연결되는 시기와 정확히 일치한다는 거군.”
”그래. 다만 세계 간에 차이가 있는 건지 지구와는 던전이라는 이상한 방식이
적용되는 것 같지만···. 어쨌든, 내 영역은 던전으로 지정된 적도 없어서 신
경도 쓰지 않았어. 진짜야! 마계만 해도 넓고 이곳에서 일어나는 싸움만 해도
정신없을 지경인데 바깥의 세계 같은 것에 쏟을 전력 같은 건 없어!”
“그래. 일단은, 알겠어.”
“이, 이걸로 답이 된 건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칼로스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어차피 추측하고 있던 부분도 있었고.
완전히 호기심에 질문한 것이 아니라, 어렴풋이 혼자 짐작하고 있던 부분에
대해 확인해보는 것에 가까웠다.
대륙의 시간의 흐름이 뒤틀릴 정도로 강한 차원 간의 충돌.
현재의 내 힘으로도 발생시키기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이 세계 내부에서 차원 사이에 이런 큰 균열이 생길만한 충격을 가하
는 것도 불가능에 가깝다.
그보다는···.
‘역시 외부의 공격이 맞겠어.’
마계와 대륙, 지구를 제외한 외부 세계에서 마계를 공격하려 했던 것이다.
성과를 내지 못한 시도가 더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총 2번의 공격이
유효하게 먹혀든 거겠지.
그 공격으로 인해 처음에는 한번은 아스키나 대륙과의 마계 간의 게이트가,
두 번째는 지구와 마계 간의 게이트가 생성되게 된 것이고.
‘완전히 마음 놓고 있을 수는 없겠네.’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지만 내가 인지하는 세계 밖의 존재들이 있다.
그것도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헥헥.
뒤쪽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어느새 꼬리를 살랑이며 다가온 베로였다.
손을 내밀자 친근하게 손등을 핥는다.
조금 더 시선을 멀리하자 바닥에 철퍼덕 앉아 노는 세 슬라임들이 보인다.
녀석들은 조그만 손에 뼈다귀를 한두 개씩 가지고 흔들며 놀고 있었다.
‘스켈레톤의 뼈인가.’
근처에서 지켜보고 있는 스켈레톤들이 시무룩하게 자신의 손가락을 만지작거
린다.
자세히 보니까 뼈가 한두 조각씩 없는 것 같다.
장난감으로 떼어준 것 같다.
태도를 보면 자기들이 원한 건 아닌 것 같고, 자기들 보다 훨씬 강한 베로가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준 걸로 보인다.
“웡! 웡!”
다른 데를 보지 말라는 듯 베로가 두 앞발을 들어 내 무릎을 딛고 섰다.
나라서 버틸 수 있을 정도로 묵직한 몸뚱이다.
“왜 그래? 이제 재미없어?”
“웡!”
하긴 바깥 구경도 아니고 성안에서 기다리는 게 지루하긴 할 거다.
시계를 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꽤 흘렀다.
이 정도 기다린 것도 기특하다.
“오늘은 이 정도면 됐어. 이만 돌아가지.”
“그, 그러시겠··· 아니, 그렇게 하겠나?”
칼로스가 반색을 하며 벌떡 일어섰다.
“아까처럼 배웅도 해주겠지? 얘들이 생각보다 비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더
라고.”
“으윽···. 당연히···.”
전혀 내켜 하지 않는 표정으로 칼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안 그래도 되는 부분인데, 반응이 격해서 괜히 괴롭히고 싶단 말이지.
“그럼, 여기 말고 조금만 밖으로 나가서···.”
“좋아. 그럼 대신 태워주는 김에 몇 바퀴 더 돌아줘.”
“예? 그, 그건.”
“싫으면 여기서 바로 타도 되고.”
“아닙니다. 하겠습니다!”
그렇게 베로와 슬라임들은 고위 마족의 등짝에 편안히 앉아 즐거운 비행을 몇
바퀴 더 즐긴 후 던전으로 돌아왔다.
* * *
쉬익!
바람을 가르듯 빠르게 움직이는 검은 인영.
그것은 큰 소리도, 기척도 거의 없이 7마리의 늑대인간 사이를 가로질렀다.
몇 초간의 시간이 멈춘 듯한 정적 후.
쿠웅!
쿵!
쿠웅!
늑대인간들은 외마디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묵직한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오직 급소만을 정확히 찔러넣은 조용한 공격이었다.
바닥은 늑대인간들의 끈적한 피로 물들었다.
늑대인간이 등지고 있던 방향에는, 머리를 높게 하나로 묶은 한 여자가 서 있
었다.
그녀는 피 묻은 단검을 툭툭 털어 품 안에 넣었다.
그리고 쓰러진 늑대인간들의 몸에 박힌 단검들도 하나씩 수거했다.
S급 헌터 윤설아.
그녀는 대한민국 S급 헌터 중에서 가장 독단적으로 활동하는 헌터로 손에 꼽
을 수 있었다.
어떠한 길드에도 소속되지 않았고, 어떤 던전이든 작은 파티조차 맺지 않은
채 홀로 사냥하기로 유명했다.
그런 그녀의 기행은 여러 달 전부터 시작되었다.
하루에도 7, 8개씩의 던전을 클리어하는 말도 안 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
이다.
그간 특별히 눈에 띄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던 그녀였기에, 그 이상한 행보
는 많은 의아함을 샀다.
꽤 많은 사람들이 이유를 밝히려 했고, 무언가, 숨은 보물 같은 거라도 찾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추측하기도 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어떤 이유였는지는 끝내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 무리한 일정은 1~2주 정도 이어지다가 다시 잠잠해졌고, 또 한참 후에
다시 시작되곤 했다.
그런 상태가 반복되다 보니 이제는 큰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사냥 패
턴이 변화한 거라는 의견이 많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