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살아 보자
“고, 고맙습니다.”
윤설아는 뒤늦게 말을 내뱉었다.
생각하지 못한 친절에 바보같이 반응하고 말았다.
‘어색해···.’
도움을 받고 고맙다는 말을 해본지가 너무 오래된 것 같다.
어려서부터도 그랬지만 최근 2년간은 정말로 혼자 고립되어 지냈기 때문일 것
이다.
묘한 죄책감 때문에 즐겁게 살아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또한 실제로 뭘 해도 즐겁지 않기도 했다.
윤설아는 남자가 방금 다시 가져다준, 뜨거운 김이 솟아오르는 그릇을 앞으로
끌어당겼다.
후룩.
숟가락으로 국물을 한술 떠서 입에 넣었다.
‘윤설아! 벌써 해가 중천에 떴는데 얘가 아직도 누워있네. 얼른 일어나! 하루
종일 잘 거야?!’
‘아, 할머니! 지금 일어나고 있잖아!’
찰싹 등짝을 치던 힘없는 손길이 생각났다.
후룩.
‘설아야, 할머니 진짜 너 때문에 속 터져 죽겠다. 죽겠어. 대체 왜 이렇게 말
을 안 들어!’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 할머니가 무슨 상관인데!’
‘설아야!’
붙잡는 손길을 떼어내고 달아났던 기억도.
후룩.
‘할머니가 미안해···. 좋은 거 많이 사주고 맛있는 것도 많이 해주고 싶었는
데···.. 너무 못 해줬다, 너무 못했어. 후회되는 게 참 많아···.’
’내가 더 미안해, 할머니···. 내가 다 잘못했어···. 무서우니까 그런 말 하지
마···.’
‘우리 강아지 불쌍해서 어째. 혼자 남기고 가려니까 너무 걱정된다···.’
병상에 누워 눈물을 흘리던 모습도.
‘설아야, 행복하게 살아. 많이 웃으면서. 너 잘 사는 거 말고는 내가 바라는
게 아무것도 없어.’
‘울지마. 걱정하지 마, 할머니. 나 혼자서도 잘살아 볼게.’
주름진 눈이 감기기 직전 마지막으로 했던 말.
윤설아의 볼은 어느새 축축이 젖어있었다.
소리 없이 쏟아지는 눈물을 막을 방도가 없었다.
너무 아픈 기억이었다.
그래서 아예 떠올리는 것조차 의식적으로 피했다.
괴로운 감정은 모른 척 가슴 속에 묻어두었다.
그 상태로 혼자 계속 버티다 보니 언젠가부터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다.
이제는 무뎌진 줄, 이겨낸 줄로만 알았는데 아무래도 그게 아니었던 것 같다.
세월이 흐를수록 더 깊은 곳에, 더 많은 슬픔이 억눌려 가고 있었던 것뿐.
남자는 바보같이 식탁에 앉아 혼자 눈물을 흘리는 윤설아를 보며 황당해 하지
않았다.
왜 우냐는 질문도, 울지말라는 위로도, 그만 나가라는 축객령도 없었다.
주체할 수 없이 북받쳐 오르는 감정에 윤설아는 한참 뒤에야 눈물을 추스를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폐를 끼쳤습니다.”
윤설아는 머리를 깊게 숙였다.
코맹맹이 소리가 나서 창피했다.
여기서 이러면 안 된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었는데, 그 순간에는 이성적으로
행동할 수가 없었다.
“괜찮아요. 좀 추스르고 가세요.”
거울을 보지 않아도 지금 얼굴이 말이 아닐 거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흐응!
윤설아는 혼자 얼굴을 닦고 코도 풀고 머리도 정리했다.
헛기침을 하며 잠긴 목도 풀었다.
이렇게 울어본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자기 모습이 낯설었다.
어느 정도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윤설아가 사장에게 다가가 정중하게 말했다.
“저 때문에 손님을 더 못 받으신 거라면··· 배상해드리겠습니다.”
“됐어요. 마침 쉬고 싶었던 참이라 손해 본 것도 없어요.”
“그래도···.”
윤설아는 주섬주섬 가방을 뒤적거리며 마석을 찾아 건네려 했으나, 남자는 두
손을 들고 극구 거절했다.
“지난번에도, 그전에도 너무 크게 지불했습니다. 그냥 국수 한 그릇일 뿐인데
1급 마석은 너무 과해요. 오늘은 계산하지 말고 그냥 가세요.”
“저한테는 그만한 가치가 있어서 드린 겁니다. 오늘도 마찬가지고요.”
고집스럽게 말하는 윤설아에게 남자가 질문했다.
“어떤 가치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이 나서요. 국숫집을 하셨는데 맛이 뭔가 비슷한 느
낌이라···. 다시는 그 맛을 못 느낄 거라 생각했었거든요.”
윤설아는 구구절절 설명하지 하지 않고 말을 끝맺었다.
이미 한바탕 눈물을 흘린 것이 후회되고 부끄러워서 빨리 이 자리를 피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자주 오세요.”
“···네?”
“한성 길드에 말해둘 테니까 동대문역 던전을 통해 그냥 들어오시면 됩니다.”
“······!”
눈이 번쩍 뜨이는 말이었다.
“동대문역···. 그 던전에 이 식당으로 들어오는 입구가 있는 건가요?”
“네. 사실 한성 길드원들만 오가는 출입구인데, 벌써 세 번이나 여길 방문하
신 단골 손님한테 그 정도 특혜는 드릴 수 있지요.”
남자가 따뜻하게 말을 이었다.
“자주 오셔서 많이 드시고, 울어도 괜찮습니다. 아픔을 속에 쌓아놓는 건 좋
은 생각이 아니에요. 지금은 괜찮은 것 같아도 속은 곪아가고 있는 겁니다.
고통스러워도 직면하고 풀어내는 과정이 필요하고, 그 도구가 제가 만든 국수
라면 얼마든지 이용하세요. 좀 주제넘은 소리 같긴 한데··· 저도 가족을 잃어
본 사람이라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어서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어쨌든 간에, 오늘은 돈 안 받겠습니다. 대신에 앞으로 자주 오셔서
제 가격에 많이 팔아 주세요. 다른 음식도 많으니까 맛 좀 보시고요.”
“네···.”
더는 강요할 수 없어서, 윤설아는 꺼냈던 마석을 다시 집어넣었다.
남자가 옆쪽 선반에서 무언가를 꺼내면서 물었다.
“던전 클리어하셨어요?”
“아, 네. 여기 들어오기 직전에요.”
“그럼 이거 받아 가세요. 선물입니다. 심심해서 만든 사과잼인데, 맛이 좋아
서 손님들한테 나눠주고 있어요.”
윤설아는 그가 내민 노란 유리병 두 개를 얼떨떨하게 받아들었다.
“사과잼?”
“식빵이나, 아무 빵에나 발라 드시면 돼요. 제가 만든 거라서 하는 말이 아니
라 진짜 맛있어요.”
“이런 것까지 안 주셔도 되는데···.”
“대단한 것도 아니고 남아돌아서 나눠주는 거니까 그냥 받아 가세요.”
이렇게 누군가에게 따뜻한 호의를 받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어찌 보면 그냥 식당에서 주는 평범한 서비스일 뿐이지만, 아까의 배려가 더
해지니 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완전히 메마른 줄 알았던 눈물샘이었는데 한번 터져 버리니 금방 또 차오르는
것 같다.
그는 꼭 또 오라는 이야기를 하며 게이트까지 배웅해주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윤설아는 홀린 듯이 식빵 한 봉지와 빵과 함께 먹을 우
유를 샀다.
아까 받았던 사과잼을 먹어보고 싶어서였다.
최근 몇 년간 그녀는 딱히 먹는 것에 흥미가 없었다.
옛날에는 빵을 참 좋아했는데, 할머니가 돌아가시고부터는 거의 먹지 않았다.
대충 배를 채우기 위해 먹기 편한 걸 사 먹는 식으로 끼니를 때워왔을 뿐이었다.
할머니를 떠오르게 했던 던전 식당의 국수를 제외하면, 뭔가 맛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챙겨 먹은 음식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스윽 스윽.
혼자 사는 싸늘한 집에서 윤설아는 식빵에 잼을 펼쳐 발랐다.
윤기 나는 잼을 잠깐 쳐다본 그녀는, 빵을 반으로 접어 베어 물었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맛있다.”
향긋한 사과 향에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잘살아 보겠다고 했었다.
하나뿐인 손녀 걱정에 힘들어하는 할머니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 억
지로 내뱉은 말이었다.
행복하게 살라고 했었다.
눈을 감기 전에 마지막으로 할머니가 했던 말이었다.
막상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에는 슬픔에 매몰되어 그런 말을 했다는 것도,
들었다는 것도 떠올리지 못했다.
완전히 잊었다기보다는 의미를 두지 않은 것에 가까울 것이다.
그 순간을 되새기는 것 자체를 회피했으니까.
‘잘살아 보자.’
죽지 못해 사는 게 아니라 즐겁게, 웃으면서 살아보자고 윤설아는 다짐했다.
물론 당장 그게 쉽지 않을 것이다.
종종 아득한 외로움과 슬픔이 그녀를 찾아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때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던전 식당에 가서 국수를 먹는 것이다.
그리고 할머니의 손맛을 떠올리며 슬픈 기억이든 즐거웠던 기억이든 꺼내어
직면할 것이다.
미안함, 고마움, 슬픔, 기쁨 등을 모두 온전히 받아들이고 피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할머니가 바랐던 대로 행복하게 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빵과 우유를 깔끔이 먹어 치운 윤설아의 얼굴은 아까보다 조금 생기있는 모습
이었다.
집안 풍경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지금껏 느끼지 못했는데, 이제보니 삭막하기 짝이 없었다.
침대와 옷장 같은 최소한의 가구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모습이 사람이 사는 집
같은 느낌도 들지 않았다.
S급 헌터가 된 후로 돈은 쉽게 손에 들어왔지만, 그걸 제대로 쓴 일은 없었다.
왠지 모르게 혼자 좋은 걸 사고 먹는 게 죄짓는 것 같기도 하고 의미 없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할머니가 이렇게 사는 걸 원할 리가 없었다.
‘집이라도 좀 꾸며볼까.’
작은 행복부터 찾아 나가는 게 첫 시작이 아닐까.
윤설아의 표정이 조금 홀가분해졌다.
* * *
나는 조금 전 떠난 여자 손님을 떠올려 보았다.
‘S급 헌터 윤설아라고 했지?’
S급 헌터임에도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그런 걸 보면 각성한지 오래 된 건 아닐 것이다.
물론 내가 얼굴을 보고 알아차린 건 아니었고, 아까 같이 있던 한성 길드원들
이 하는 말을 듣고 알게 되었다.
윤설아는 국수를 먹다 말고 어느 순간 멍하니 시선을 내리깔고 앉아있었다.
식사를 끝낸 한성 길드원들이 주변을 서성거리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듯
했다.
그들은 사인을 받고 싶었던 듯, 종이와 펜을 들고 있었는데, 눈길도 주지 않
는 그녀에게 차마 말 한마디 걷지 못하고 떠났다.
상태를 보니 고의로 무시한 건 아니고 깊은 생각에 빠진 것 같아 그냥 내버려
두었다.
핸드폰을 들고 검색창에 이름을 쳐보았다.
역시 S급 헌터라서 정보가 바로 나오긴 한다.
다른 유명한 헌터들에 비해 많은 내용이 있는 건 아니지만.
‘생각보다 나이가 어리네.’
첫인상은 내 또래쯤으로 생각했는데, 프로필에 적힌 나이는 26살이었다.
아무래도 무표정하고 쌀쌀맞은 인상 때문에 더 성숙해보였던 것 같다.
하긴, 우는 모습은 오히려 어린애 같았다.
소리도 내지 않고 눈물만 뚝뚝 흘리는 모습은 뭐라고 말을 붙이기도 어려울
정도로 안쓰러웠다.
거기다 돌아가신 할머니 때문이라고 하니 더더욱 안타까웠고.
‘뭐, 처음 왔을 때부터 뭔가 사연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했지.’
아무 이유 없이 국수를 먹다 말고 금방이라도 울것같은 표정을 지을 이유는
없을테니까.
단순히 내 음식이 맛있어서 찾아온 건 아니었지만, 위로가 된다면 그또한 좋
은 일이다.
다음에 오면 국수 말고도 다른 걸 좀 해줄까 싶었다.
할머니 생각도 좋지만, 맛있는 음식을 먹고 웃는 모습이 더 보기 좋을 것 같다.
* * *
쏴아아아!
강하게 몰려들어오는 물살.
내가 선 자리에 도착하자마자 물덩이가 불쑥 치솟더니 모양이 잡혀간다.
물의 정령왕 엘시스가 다시 이곳에 찾아온 것이다.
여전히 초자연적으로 아름다운 외모의 그녀가 바닥에 발을 내디디며 우아한
손동작을 했다.
“안녕하십니까. 현호 님, 다시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며칠 전 미리 다시 오고 싶다는 얘기를 전해오길래, 길드 휴게소 쉬는 날인
오늘로 날짜를 지정해주었다.
용건은 아주 간단했다.
“그래. 그걸 또 먹어보고 싶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