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맛있습니다 (53/125)

      더 맛있습니다

엘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라··· 면··· 이라고 했던 음식 말입니다. 그날은 다 먹었으면서

도 사실 맛이 너무 강하고 자극적이라는 생각을 하며 정령계로 돌아갔었습니

다. 그런데···.”

“계속 생각이 난다?”

피식 웃으면서 한 말에 민망한 표정을 짓는다.

“한 번 더 먹어보면 어떨까··· 그런 생각이 자꾸 들었습니다.”

“좋아. 어렵지 않지. 따라와.”

“정말이십니까!”

“그래. 괜찮으니까 오라고 한 거지.”

물결치는 푸른 머리를 휘날리며 내 뒤를 쫄쫄 따라오던 엘시스가 들뜬 목소리

로 말했다.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수백 년 전 인간의 모습으로 아스키나 대륙을 돌아다

니던 시절에는 이런 적이 없었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만족스럽긴 했지

만, 이렇게 강렬하게 끌린 적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습니다.”

“라면이 맛있긴 하지. 오늘은 계란도 넣어줄게.”

“아, 그런 식으로 조리법이 달라지기도 하는 겁니까?”

“치즈를 넣을 수도 있고, 김치를 넣어도 좋고, 얼마든지 다양하게 변형할 수

있지.”

엘시스가 내 말을 들으면서 입맛을 다셨다.

겨우 한 번 먹었는데 완전히 빠져버린 것 같다.

양은 냄비에 라면을 끓였다.

오늘은 아까 말한 대로 계란을 하나 톡 넣어주었다.

취향에 따라 풀어 먹기도 그냥 먹기도 하지만, 엘시스는 지금 딱히 라면 취향

이랄 게 없어서 흰자만 살짝 풀어주었다.

거의 다 완성될 즈음, 파를 송송 썰어서 추가했더니 파 향이 섞여 더 맛있는

냄새가 솔솔 올라온다.

“자, 여기. 저번에는 스프를 좀 덜 넣었는데 오늘은 그냥 다 넣었어. 보니까

매운 걸 아예 못 먹는 건 아닌 것 같고, 이 맛도 좀 익숙해진 것 같아서.”

“좋습니다. 저는 원래 지구의 사람들이 먹는 그 맛 그대로 먹어보고 싶습니다.”

포크를 든 주먹을 불끈 쥐고, 무슨 중대한 결심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한다.

그리고 포크로 면을 돌돌 말아 한 입 정도의 크기로 만들고, 깔끔하게 입안에

집어넣었다.

우물우물 라면을 씹은 엘시스가 뒤통수라도 한 대 맞은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번쩍 들었다.

“처음 먹었을 때보다 지금이 더 맛있습니다!”

“먹고 싶어 하던 걸 먹으니까 그런 거 아니겠어? 원래 아는 맛이 더 맛있는

법이지.”

“그런 겁니까? 기억 속에 있는 맛 이상인 것 같습니다.”

혼자 고개를 끄덕거리기도 하고 탱글탱글한 면을 흥미로운 눈길로 구경하기도

했다.

조용히, 그러나 빠른 속도로 면발을 흡입하던 엘시스는 어느새 국물만 남기고

라면을 다 해치웠다.

엘시스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너무 맛있었습니다. 염치없이 또 찾아오고 싶다고 했는데, 수락해주셔서 정

말 기뻤습니다. 오늘도···.”

한 그릇 먹고 떠나려는 듯한 엘시스의 말을 끊고 끼어들었다.

“혹시 더 먹을 수 있어? 배가 많이 불러?”

“아닙니다. 더 먹을 수 있습니다. 사실 아시다시피 이 몸은 제 본체가 아니라

인간의 몸을 흉내 낸 것에 불과하니까요. 인간의 신체 구조와 거의 비슷하지

만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과거 경험으로 보았을 때, 유사한 체구의 인

간보다 세 배 정도는 더 먹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 잠깐 기다려.”

“물론입니다! 새로운 음식을 소개해주시려는 겁니까?”

엘시스는 기대감을 감추지 않으며 되물었다.

“완전히 다른 음식은 아니고··· 네가 라면을 좋아하는 것 같아서 좀 다른 종

류의 라면을 맛보여줄 생각이야.”

“다른 종류의 라면? 어떤 겁니까? 정말 먹어보고 싶습니다!”

눈을 빛내며 즉답하는 엘시스였다.

“잠깐 앉아서 기다려 봐.”

“아, 알겠습니다.”

나는 식료품 보관함에서 봉지를 하나 꺼냈다.

이번에 맛보게 해줄 것은 짜장라면이다.

확실하진 않지만 이 또한 아스키나 대륙에 존재하는 맛은 아닐 것이다.

물을 끓이고, 면과 후레이크를 끓는 물에 넣어주었다.

옆눈으로 힐긋 보니 엘시스는 공중에 물방울을 여러 개 띄웠다 터트리기를 반

복하며 놀고 있었다.

물의 정령왕은 저런 식으로 시간을 때우나보다.

보글보글.

금세 다시 물이 끓기 시작했다.

면이 반 정도 익은 걸 확인하고, 냄비에 물을 조금만 남기고 부어버렸다.

다음으로 짜장 스프를 탈탈 털어 위에 뿌리고, 조금 더 졸였다.

사실 봉지에 적힌 설명을 따르면, 굳이 더 졸이지 않고 익은 면과 스프를 비

벼주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여러 방법으로 먹어본 결과, 나는 이렇게 스프까지 함께 한번 더 끓이

는 게 제일 맛있는 것 같다.

짜장 맛이 더 진하게 스며드는 느낌이랄까.

완성된 짜장라면을 엘시스의 앞에 내주었다.

기대감이 가득했던 그녀의 표정에 순간 당혹감이 스쳐갔다.

뭔가 거부감이 느껴지는지 흠칫하며 몸을 뒤로 내빼기까지 했다.

“저, 현호님?”

“왜?”

“새, 색이··· 검은색으로 보이는데, 괜찮은 겁니까?”

“아, 색깔? 검은색이라기보다 짙은 갈색이긴 한데··· 그쪽 세계에는 좀 낯선가?”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마계에 음식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 것 같습니다.”

여기서는 아무렇지 않게 먹는 음식인데, 이걸 마계와 연결시킬 줄은 몰랐다.

‘검은 요리에 거부감이 있을 수도 있겠네.’

지구의 상식을 제쳐두고 생각해보면 그럴싸한 상상력 같긴 하다.

“이상한 거 전혀 아니니까 맛만 봐봐.”

“이상한 거라 의심을 한 건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저 생각해본 적 없는 모양

이라 놀랐을 뿐입니다. 라면의 종류라고 하길래 아까처럼 붉은 국물일 거라고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말을 입증하려는 것처럼 포크를 이용해 바로 면발을 들어 올

렸으나 막상 입안에 바로 넣지는 못했다.

역시 거부감은 좀 있는 모양인지, 엘시스는 몇 초 망설이다가 결국 눈을 질끈

감으면서 짜장라면을 한입 먹었다.

“······!”

“어때?”

“와, 이것도 라면이 맞는 겁니까? 아까와는 전혀 다르면서도 특색이 있습니

다.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맛이 좋습니다!”

엘시스는 입가에 짜장이 묻은 줄도 모르고 감탄했다.

요리해준 사람이 뿌듯해지는 반응이었다.

마계의 음식같다고 했던 말은 완전히 잊은 것인지 엘시스는 한입 한입 착실히

짜장라면을 입에 넣었다.

“현호 님, 아무래도 아스키나 대륙과 비교했을 때, 지구의 음식이 더 뛰어난

것 같습니다.”

“뭐? 겨우 라면밖에 안 먹었는데?”

“물론 하나의 메뉴만으로 섣부르게 말하는 감이 없지 않습니다만···. 인간계

에서 제 정체가 밝혀지고, 제국의 국왕만이 먹는다는 귀한 음식을 대접받은

적도 있는데, 이건 그보다도 훨씬 맛있는 것 같습니다.”

귀한 음식과 자극적으로 맛있는 음식은 결이 다르긴 하다.

전자는 정성과 희귀한 재료, 건강을 고려한 음식이라면, 후자는 오직 맛을 노

린 것이니까.

짜장라면까지 깨끗이 먹어 치운 엘시스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

섰다.

“잘 먹었습니다. 현호 님. 오늘도 놀라운 맛이었습니다.”

“그래, 그런데 입을 좀 닦아야 할 것 같은데?”

“제 입 말씀이십니까?”

고개를 갸우뚱하던 엘시스의 손에서 물방울이 보글보글 솟아나더니 평평한 거

울처럼 바뀌었다.

그것에 얼굴을 비춰본 그녀가 놀라서 몽글몽글한 물이 맺힌 손으로 입가를 훔

쳤다.

“물의 정령왕인 제가 이리 부족한 모습을 보이게 하다니, 라면의 힘이 정말로

대단합니다. 게다가 현호 님의 요리 실력 또한 정말 출중하신 것 같습니다.”

“음, 라면은··· 요리 실력을 평가받을 음식은 아닌데. 너도 만들 수 있어.”

“네? 제가 어찌··· 저는 본디 음식을 먹지 않아도 되는 정령으로서 요리라는

것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인스턴트 식품에 대한 개념이 없는 엘시스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잠깐만 기다려봐.”

나는 엘시스를 두고, 나는 부엌 안쪽으로 들어가 찬장을 열었다.

그곳에는 다양한 종류의 라면이 한가득 들어있었다.

요리하기 귀찮을 때 먹으려고 종류별로 사다 둔 것이었다.

부스럭부스럭.

그중 대여섯 개를 집어 들고 식탁 위에 펼쳐놓았다.

“이건 뭡니까?”

“이게 라면이야. 너도 만들어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쉬워. 엄청 빨리 만들 수

있도록 이미 반 정도는 완성되어 나온 음식이지. 전에 말했었지? 인스턴트 식

품이라고.”

“아무리 그래도 저는 그런 능력이···.”

“먹고 싶을 때마다 계속 찾아올 생각이야? 라면 생각 나는 게 딱 오늘 하루뿐

일 것 같냐고. 며칠 뒤면 또 먹고 싶을 건데 그때 또 올 거냐?”

“그건 아닙니다! 귀찮게 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고 먹고 싶은 걸 참는 것도 힘들 거 아니야. 방법을 알려주겠다는데도

그러네.”

“···알겠습니다. 어떻게 하는 거죠?”

나는 씩 웃으며 다른 양은 냄비를 하나 가져와 물을 부었다.

“물 양은 이 정도. 기억할 수 있어?”

“물론입니다. 저는 물의 정령이니 그만큼 쉬운 게 없습니다.”

몽실.

냄비 속의 물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이 정도··· 알겠습니다.”

엘시스는 진지한 얼굴로 물의 양을 확인했다.

나는 국물이 있는 라면과 비빔면류의 라면을 분류해 간단하게 조리하는 방법

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이 컵라면은 그냥 끓는 물을 붓고 기다리기만 하면 되지.”

“······네?”

엘시스의 푸른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미 거의 조리된 거라니까.”

“···그렇다고 물만 붓고 기다려서 그런 음식이 나올 수 있다니 말도 안 됩니

다···. 지구인들은 정말··· 대단합니다.”

사실 먹기 간편한 만큼 몸에 좋은 음식은 아니다.

하지만 어차피 엘시스는 물의 정령.

영양분을 섭취하려고 먹는 것도 아니고 맛을 보기 위해 먹는 것 뿐이니 문제

될 리가 없다.

모든 설명을 들은 엘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이해했습니다. 정말 저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 먹고 또 필요하면 찾아 와. 더 줄 테니까.”

“역시 대륙을 구한 영웅다운 배포이십니다. 귀찮지 않게 최대한 아껴먹겠습니

다.”

···라는 말을 하고 떠난 엘시스는 겨우 3일 뒤 다시 물가로 찾아왔다.

민망해하는 그녀에게 나는 라면을 한 박스 통째로 건네주었다.

엘시스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활짝 웃었고, 그녀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운디네들은 영문도 모른 채 꺄꺄 행복한 소리를 내었다.

* * *

철컥.

현관문을 열자 반가운 두 얼굴이 보였다.

“현호 씨!”

“잘 지냈어? 왜 이렇게 오랜만에 보는 것 같지? 허허.”

박 씨 아저씨와 이정연 씨.

집으로 두 사람을 초대한 것이다.

“오랜만에 보는 거 맞아요. 두 분 다 어서 들어오세요.”

두 사람은 양손에 뭔가를 바리바리 들고 들어왔다.

집들이로 부른 건 아니고 그냥 음식 대접을 하고 싶어서 부른 것인데, 또 선

물을 준비해온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빈손으로 오긴 좀 그렇지 않냐.”

“그냥 생필품 몇 개 산 거예요.”

“아니, 안 사와도 되는데···.”

“벌써 사 온 걸 어떻게 해. 받아요. 빨리.”

나는 이정연이 쥐여주는 선물을 받아 방 안에 갖다 두었다.

박 씨 아저씨가 고개를 휙휙 돌리며 집 안을 쳐다보았다.

“이야, 집 너무 좋다.”

이정연 또한 반짝반짝 눈을 빛내면서 말했다.

“저 살면서 이렇게 좋은 집에 초대받은 거 처음이에요.”

“둘러보세요. 저는 음식 준비하고 있을 테니까.”

“아, 도와드릴까요?”

“아뇨. 저는 혼자 하는 게 좋아서요. 편하게 계세요.”

두 사람을 집으로 초대한 건 다름이 아니라, 직접 만든 맛있는 음식을 한 번

쯤 대접하고 싶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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