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한 게 아니야 (55/125)

      내가 한 게 아니야

‘백억이라니.’

상당한 부를 축적한 그의 기준에서도 너무 과한 금액이었다.

성민혁은 그 던전이 특별한 가치를 가진다는 것은 인정했으나, 던전 식당과의

계약은 한성 길드 규모에 비하면 심각한 예산 낭비라고 주장했다.

결국에는 길드장의 뜻대로 흘러가고 말았지만.

자신은 인정하지 않고 있으나, 그런 이유 때문에 성민혁은 최대한 휴게소를

이용하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 번에 클리어할 능력이 되는데 굳이 쉬엄쉬엄 놀면서 사냥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그냥 빠르게 던전 하나를 클리어하는 게 훨씬 깔끔하지.’

그게 성민혁의 생각이었다.

물론 자신이 능력에 자신 있는 S급 헌터이기 때문이란 건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가 맡은 던전에서 한성 휴게소를 이용하기로 결정되었다.

게이트 관리팀에서 오늘 생성된 돌발 S급 던전 게이트의 파동이 평소와는 조

금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고 보고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렇다고 해도 문제가 생기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이번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S급 돌발 던전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그 위험성을 더 높게 치고 휴게소를 사용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의 능력을 보조하고 지원해주는 A급 헌터들이 상당수 함께였기에 필요 없다

고 고집만 피울 수는 없었다.

“준비됐나?”

“네!”

“물론입니다!”

든든한 동료들의 대답에 성민혁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언제나와 같이 한성 길드 S급 던전 전담반은 힘차게 게이트를 넘었다.

그러나, 오늘은 평소와 상당히 다른 양상이 벌어졌다.

* * *

게이트 관리팀의 분석을 통해 이미 레비아탄이 나올 것은 예상하고 있었다.

레비아탄은 수중 몬스터였으나 그렇다고 물속에서 싸울 일은 없었다.

놈은 또한 헌터들에게 적개심을 드러내며 돌진했으므로, 전투는 물과 바다가

맞닿는 곳에서 이루어졌다.

오랜 헌터 생활 동안 성민혁이 레비아탄을 상대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다루기 상당히 까다로운 몬스터였으나 항상 혼자 다녔고, 놈을 상대하는 나름

의 노하우도 있었기 때문에 하던 대로 하면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자만이 아니라 엄연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번 상대는 만만치가 않았다.

“허억. 헉.”

바다를 마주한 성민혁이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팔뚝에 경련이 느껴졌다.

사냥 중에 이렇게 땀을 흘리는 것도, 근육에 통증을 느끼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후우우웅.

팔뚝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나게 사는 낮은 음역대의 울음소리.

“대장님, 괜찮으십니까?”

S급 던전에서 가장 앞서 싸울 수 있는 것은 S급 헌터뿐.

다른 헌터들은 쉽사리 나서지 못한 채 뒤에서 성민혁의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괜찮아.”

“잠깐이라도 휴식하시는 게···!”

“한 번만 더 하면 치명상을 입힐 수 있을 것 같아! 우리가 쉬는 동안에 이 녀

석 가만히 있는 게 아니야. 여기서 다시 회복하면 더 잡기 힘들어질 뿐이야.”

“···알겠습니다. 한 번 더 서포트 하겠습니다!”

뒤쪽에서 던져주는 포션을 빠르게 몸에 부었다.

거기에 힐러의 주문이 더해지니 피부에 가득했던 상처들이 스르륵 사라졌다.

체력도 어느 정도 회복되었으나 제일 처음 레비아탄을 마주했을 때처럼 최상

의 컨디션으로 끌어올릴 수는 없었다.

포션과 힐링 마법에도 한계는 있었으니까.

성민혁의 대검에 화르륵 불꽃이 타올랐다.

그의 주 무기는 검이었으며, 거기에 더하여 화염 속성의 마법을 함께 쓸 수

있었다.

오랜 경험을 통해 두 가지 다른 능력을 모두 최상으로 끌어올렸기에 S급 중에

서도 특출나게 강한 편이었다.

단순히 불이라서 물에 약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성민혁의 능력은 그런

속성 간의 상성마저 뛰어넘었다.

닿는 물이 순간적으로 끓으며 증발했기 때문에 수속성의 몬스터에게도 강력한

공격으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 마주한 레비아탄은 그 공격이 쉽게 먹혀들지 않았다.

물보라가 크게 일며, 레비아탄이 물 위로 튀어 올랐다.

잠깐 뒤로 물러났던 녀석이 공격을 재개하는 것이었다.

타앗!

동시에 성민혁 또한 바다를 향해 박차 올랐다.

불타오르는 대검이 레비아탄을 향했다.

레비아탄이 꼬리를 강하게 휘둘렀고, 성민혁은 오히려 그 꼬리를 밟고 뛰어올

랐다.

그때, 레비아탄의 입에서 강렬한 물보라가 뿜어져 나왔다.

“아아악!”

“꺄아아아!”

뒤쪽에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

마나가 깃든 물보라는 성민혁이 아닌, 수 미터 더 멀리 떨어진 길드원들을 향

했다.

그러면서 성민혁이 휘두르는 검의 옆면을 지느러미로 쳐낸다.

불길에 화상을 입었겠지만, 치명상은 입지 않을 수 있는 최선의 방어였다.

“크윽!”

그 힘에 뭍으로 튕겨 나온 성민혁이 몸을 낮춰 착지했다.

‘이놈, 이상하다.’

그가 아는 레비아탄은 이런 패턴의 공격을 하지 않았다.

지능이 낮은 건 아니었으나 가까이 있는 적을 두고, 멀리 있는 동료를 공격할

정도로 계산적이진 않았던 것이다.

반응 속도도, 공격력도 지금까지 만나왔던 개체들보다 더 높은 것 같다.

“괜찮나?!”

“부상자가 조금 있습니다만, 치명적이진 않습니다!”

현명한 판단이 필요한 때였다.

성민혁이 앞을 견제하며 외쳤다.

“휴게소로 돌아간다! 빠르게 재정비하고 다시 시작해야겠어.”

“알겠습니다!”

헌터들은 신속히 머지않은 게이트 안으로 피신했다.

게이트를 넘자마자 순식간에 풍경이 바뀌어 아늑한 동굴 안에 구성된 휴게소

가 나타났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적당한 온도.

언제든 앉아 쉴 수 있는 푹신한 소파와 간단히 배를 채울 수 있는 주전부리.

대기 중이었던 힐러와 한성 길드의 직원들이 헌터들에게 달라붙어 각자에게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

“···확실히 좋긴 하네.”

대단한 능력이 맞긴 하다.

막연히 부정적으로 여겼던 공간이지만 직접 겪어보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그 엄청난 계약금의 가치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무리 편안하다고 해도 하염없이 늘어져 있을 수는 없다.

성민혁과 헌터들은 다시 바다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스륵.

그리고 게이트를 넘어가는 그 순간, 한성 길드원들 사이에, 낯선 그림자가 하

나 섞여 있다는 것은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다.

* * *

다시 시작된 전투.

모두가 만반의 대비를 하고 나섰으나 양상은 아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후우···.”

버프 마법으로 인한 효과가 온몸에 느껴지지만, 이 정도 힘으로는 부족하다.

최전선에 서서 깊은 한숨을 내쉬는 성민혁의 머리에 하나의 직감이 스쳐 지나

갔다.

‘나 혼자서는 안 되겠어.’

아무래도 전투 계열의 S급 헌터가 한 명 더 필요할 것 같다.

필요하면 영웅 길드의 이우석이라도 불러야 할 것이다.

영 내키지 않는 상황이지만 고집을 피울 일도 아니다.

그나마 휴게소를 통해 빠르게 상황을 전달하고 지원군 요청을 할 수 있는 상

황이라 천만다행이었다.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뒤로 물러서려던 그때였다.

보이지 않는 기척이 성민혁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흠칫 놀라기도 전에 레비아탄이 물 위로 크게 튀어 올랐다.

‘새로운 패턴의 공격인가···! 아니 그 전에 방금 스쳐 간 건······.’

놀란 듯 몸을 마구 뒤트는 모습이 스스로 점프한 게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그때,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저건 뭐지?’

S급 헌터인 성민혁의 눈으로도 쫓기도 어려운 검은 그림자가 레비아탄을 가로

지르며 날아다닌다.

“끼에에에에엑!”

귀를 막을 수밖에 없는 끔찍한 비명 소리

죽어가는 레비아탄의 절규였다.

‘이게 무슨···!’

처음에는 레비아탄의 어떤 문제가 있어 스스로 몸을 뒤트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러나 물보라 사이로 언뜻 보이는 인영이 있었다.

잔상조차 좇기 힘든 무언가가 레비아탄을 난도질하고 있는 것이다.

“와아아아!”

뒤쪽에서 들려오는 길드원들의 환호성.

그들 또한 레비아탄이 죽어간다는 걸 알아챈 것이다.

물론 좋은 일이긴 하다.

그들의 궁극적 목표인 위험천만한 S급 던전을 클리어한 것이니까.

그러나 마냥 즐거워하는 길드원과 달리 성민혁은 섬뜩함을 느꼈다.

저들이 환호하는 이유는, 성민혁이 어떤 수를 써서 레비아탄을 죽였다고 생각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달랐다.

자신의 상상력을 아득히 넘어선 미지의 힘을 가진 자가 존재한다.

분명 눈앞에 있는데도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강한 누군가가.

그 어떤 강한 몬스터에게서도 느껴본 적 없는 압도적인 힘의 격차.

등줄기로 식은땀이 주륵 흘러내렸다.

성민혁은 S급 헌터였다.

각성하지 않은 다른 사람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의 강한 힘을 가진.

일각에서는 S급 헌터를 인류의 다음 진화 단계로 봐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

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각성 이후 이토록 섬뜩한 감각을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아무리 강한 S급 던전의 보스를 마주했을 때도 이 정도로 두렵지는 않았다.

적어도 놈들의 정체는 분명했고, 결과적으로 모두 해치웠으니.

하지만 지금 레비아탄을 공격하는 무언가는 S급 던전 보스와도, S급 헌터인

자신과도 격이 달랐다.

이런 존재가 악의를 품는다면···.

‘혼자서 전 인류를 멸망시킬수도 있지 않을까?’

문득 떠오른 생각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후두두둑.

산산이 조각난 레비아탄의 살덩아리가 바다 위로 떨어졌다.

거대한 물보라가 일 거라는 생각에 본능적으로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그러나 물보라는커녕, 그러나 레비아탄이 물에 풍덩 빠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바다는 고요했다.

“어··· 어떻게 된 거지?”

성민혁이 얼떨떨하게 중얼거렸다.

레비아탄의 거대한 사체가 감쪽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다른 길드원들은 이상한 상황을 눈치채지 못하고 환호하며 소리쳤다.

“대장님! 역시! 믿고 있었습니다!”

“혹시 또 다른 능력을 얻은 건가요? 방금 그 스킬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아, 아니··· 이건 내가 한 게 아니라···.”

성민혁이 더듬더듬 부정했지만 흥분하여 달려오는 동료들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는 것 같다.

“영웅 길드에 지원 요청은 안 해도 되겠네요!”

“사체 처리부터 빠르게 시작하겠습니다!”

“······.”

충격과 당혹스러움에 성민혁은 그저 입을 다물었다.

별다른 지시 없이도 척척 다음 단계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와 오랜 세월 함께해온 길드원들 또한 모두 베테랑이었으니까.

그리고···.

“어···! 레비아탄이··· 레비아탄 사체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이렇게 흔적도 없을 수가 없는데··· 어, 어떻게 된 일이지?”

그들 또한 이번 던전에서 이상한 일이 발생했다는 걸 곧 알아채게 되었다.

* * *

“후후후.”

흡족한 웃음이 입 밖으로 흘러나온다.

타이밍이 정말 좋았다. 마침 레비아탄 가루가 다 떨어져 가고 있었다.

맛있는 육수를 내기 위해 온갖 요리에 사용하다 보니 금세 바닥나버린 것이다.

조만간 찾아 나서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런저런 일들로 미루고 있었다.

그런데 조금 전, 식당으로 들어온 한성 길드원들이 레비아탄으로 고생하고 있

다는 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마계에서 레비아탄을 찾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바다에 사는 놈이라 정확히 어디 있는지 알아내기 어렵고, 설령 알아낸다 해

도 물속에서의 전투는 불편하다.

하지만 지구의 던전으로 설정되는 경우는 좀 다르다.

던전의 몬스터들은 인간을 향한 적개심이 몇 배로 커지게 되므로, 부상을 입

더라도 완전히 도망가지 않고 계속 싸우려 든다.

던전의 레비아탄을 잡는 것이 훨씬 더 수월한 것이다.

이건 기회다 싶어서 바로 한성 길드원들을 쫓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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