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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당한 광경 (56/125)

      황당한 광경

사실 직접적으로 나서지 않고도 레비아탄 고기를 얻을 방법은 있었다.

한성 길드에서 레비아탄의 사체를 구입하는 게 가장 정당할 것이다. 괜히 그

걸 어디 쓸 거냐는 의문의 눈초리를 받는 건 좀 싫겠지만.

그게 아니면 던전 클리어 후 일부 고깃덩이를 몰래 챙기는 방법이 있겠고. 물

론 이것도 도둑질이나 다름없으므로 별로 끌리지는 않았다.

어쨌건, 상황이 돌아가는 걸 잠시 지켜보다 결정하려고 은신하여 레비아탄과

성민혁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예상치 못한 문제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성민혁의 능력.

그가 검술과 화염 속성을 함께 가지고 있다는 건 유명한 사실이었다.

나도 분명 그걸 알고 있었는데 눈으로 목격하기 전까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레비아탄의 앞에서 그의 검에 화륵 불꽃이 올라오는 것을 보고 나는 속으로

절규했다.

‘···그러면 안 돼! 레비아탄이 불에 구워지면 맛이 달라진단 말이다!’

익지 않은 생고기 자체를 말려야 하는데 저런 싸움이 계속되면 고기가 상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아직까지 중요한 몸뚱이에는 화상을 입지 않은 상태였으나, 전투가 길

어질수록 내가 쓸 수 있는 부위는 줄어들 게 명확했다.

성민혁이 이 레비아탄보다 훨씬 강해 단숨에 명줄을 끊을 수 있으면 몰라도,

현재로서는 힘의 차이가 커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레비아탄은 돌연변이인 듯했다.

가끔 그런 경우가 있다

같은 종의 몬스터라고 해도 개체마다 능력치가 다르고, 그중에는 돌연변이 수

준으로 뛰어난 놈들이 아주 드물게 나타난다.

물론 능력적인 부분에 해당되는 것이라 고깃덩이로 사용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안 되겠다···!’

잠깐의 갈등 후 나는 은신 상태로 레비아탄을 향해 달려 나갔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죽음을 직감한 듯 울부짖는 레비아탄을 물 위로 높이 띄운 후 최대한의 속도

로 검을 휘둘러 산산조각을 냈다.

‘제대로 보긴 힘들었겠지.’

일반 헌터들은 당연, S급 헌터인 성민혁조차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으니까.

그러면서 바다 표면에 게이트를 열어 떨어지는 레비아탄 고깃덩이가 그 속으

로 들어가게 만들었다.

레비아탄을 처리함과 동시에 손쉽게 내 던전으로 챙겨가는 효율적인 방안이었다.

나 또한 그 뒤를 따라 던전으로 되돌아왔고.

큰 돌덩이만 한 레비아탄 몸뚱이 한 조각을 들고 살펴보았다.

“흐음···. 상태가 생각보다 좋은데?”

당연히 방금 잡은 거라 신선도는 말할 것도 없이 좋았다.

다만 열기에 상한 부분이 어느 정도 있을 거라 예상했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내가 보지 못했던 휴식 전 대치 상황에서도 레비아탄이 잘 버텨냈던 것 같다.

성민혁은 많이 황당해하겠지만, 나는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꼭 필요한 요리 재료를 손에 넣었고, 오랜만에 몸을 움직인 것도 좋았다.

어느 정도 전투 감각을 살려둘 필요성을 느끼던 참이기도 했다.

외부 세계에 또 다른 적이 있을 가능성에 대해 알았으니 너무 안주해있지는

않는 게 좋겠지.

“자아, 시작해볼까?”

흡족한 기분으로 고깃덩이를 정리하고 자리를 깔아 철퍼덕 앉았다.

그리고 질긴 레비아탄의 껍데기를 벗기면서 손질을 시작했다.

원체 거대한 바다 괴물인지라 쓸모없는 머리와 꼬리, 지느러미 부분을 제외하

고서도 그 양이 엄청났다.

말리면 쪼그라들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넉넉하게 쓸 수 있을 것이다.

껍질을 모두 벗겨낸 다음 할 일은 뼈와 살을 분리하는 작업이다.

삭삭삭삭.

칼날이 뼈를 스치는 소리가 반복적으로 들려왔다.

그래도 크기에 비해 잔뼈가 많이 없어서 속도를 낼 수 있었다.

하면 할수록 손이 더 빨라지기도 해서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뼈를 바르고 남은 연분홍빛 살덩어리는 얇게 포를 떴다.

이걸 바짝 말린 후 가루를 내면 되는 것이다.

아스키나 대륙에 먹을 만한 것이 없던 시절, 우연히 알아낸 비법이다.

그땐 조금이라도 맛있는 걸 먹기 위해 온갖 시도를 다 해봤었으니까.

얇은 고기 조각들을 층층이 탑처럼 쌓아 올렸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작업하던 도중에 등 뒤로 베로가 엉덩이를 붙이고 엎드

렸다.

아까부터 좀 떨어진 곳에서 나를 보던 눈길은 눈치채고 있었는데, 작업에 열

중하느라 부르지는 않았다.

그랬더니 혼자 망설이다가 한참 뒤에 이렇게 가까이 다가온 것이다.

베로의 몸에서 털이 막 빠지지는 않으니까 별문제는 없다.

다만, 잠시 소홀했던 게 미안해져서 고기 한 점을 썰어서 베로의 입 앞에 두

었다.

킁킁.

베로가 촉촉한 코를 씰룩이며 냄새를 맡았다.

“레비아탄 고기는 처음 먹어보지?”

“웡.”

마계에 나가 몬스터 고기는 종종 뜯어 먹지만, 바다 몬스터인 레비아탄을 접

할 기회는 없었을 것이다.

텁!

베로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바닥의 고기를 한입에 삼켰다.

“···그러면 맛이 나겠어?”

“우어엉.”

이상한 소리를 내며 베로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조금 더 크게 고기를 썰어 베로의 입에 넣어주었다.

이번에는 몇 번 씹고 꿀떡 목구멍으로 넘긴다.

얌전하던 베로의 꼬리가 살랑이며 위로 솟아오른다.

마음에 든다는 뜻이다.

몇 조각 더 잘라 베로의 입에 넣어주고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다행히 그 정도로 만족했는지 베로는 스르륵 눈을 감고 편하게 잠들었다.

도롱도롱 코 고는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일하다 보니 어느새 그 커다란 레비

아탄 고기 손질이 모두 끝났다.

식당을 좀 오래 비워두긴 했는데, 문제 될 건 없다.

어차피 다른 게이트는 닫아두었으니 방문할 사람은 한성 길드원뿐.

내가 없으면 자연스럽게 휴게실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아직 다음 단계가 남아있다.

나는 세 슬라임들을 불러와 나란히 세워둔 채 입을 열었다.

“호빵이, 찐빵이, 만두! 오늘은 설거지 말고 다른 일을 좀 도와야겠다.”

“삐이이이!”

“삐이이이익!”

“삐이이잇!”

쪼그만 녀석들이 나름 믿음직하게 대답한다.

나는 슬라임들과 함께 레비아탄 고기를 나르기 시작했다.

물론 한 번에 드는 양은 백 배 이상 차이가 나겠지만, 작은 일손이라도 더 있

는 게 좋다.

은근히 덜 심심하기도 하고.

“자, 그럼 가보자.”

나는 슬라임들과 함께 레비아탄 고기를 들고 나르기 시작했다.

어느새 잠에서 깬 베로도 벌떡 일어서서 가물가물한 눈으로 뒤따라왔다.

졸리면서도 혼자 빠지기는 또 싫은가보다.

* * *

마계의 성 중에서도 웅장하기로 손에 꼽히는 제1군단장 칼로스의 성.

성에서 시작된 분노에 찬 포효가 바깥까지 흘러나왔다.

“크아아아아악!”

그 소리에 성 안과 밖의 몬스터들이 오들오들 몸을 떨었다.

특히나 그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좌하는 스켈레톤들이 가장 겁을 먹었다.

칼로스가 다시 한번 소리쳤다.

“저게 대체 뭐야! 내 성에! 누가 저런 쓰레기를 가져다 놓은 거냐고!”

짐승에 가까운 얼굴과 온몸에 난 거친 털 때문에, 청결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

는 칼로스였다.

그러나 사실, 그는 겉보기와 달리 상당히 깔끔한 성격이었다.

성에서 그의 부하인 스켈레톤들이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성을 쓸고 닦는 일이

었다.

벽이고 바닥이고 어두컴컴한 색이라 티가 잘 나지 않는데, 사실 칼로스의 성

은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깨끗했다.

성에서 일하는 부하들이 다른 몬스터나 마족이 아닌 스켈레톤인 이유도 그 때

문이었다.

스켈레톤은 몸에 털도 없고 먹지도 싸지도 않기 때문에 비교적 청결하니까.

울분을 토해내는 칼로스의 손가락은 성 한 켠의 바닥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곳에 정체 모를 연분홍빛 고깃덩어리들이 넓게 펼쳐져 있다.

살다 살다 이렇게 황당한 광경은 처음 본다.

실제로 칼로스는 아까 이 모습을 보고 수십 번 눈을 비빈 후에야 이 광경이

진짜라는 걸 깨달았다.

칼로스의 외침이 잠깐 사그라든 틈을 타서 스켈레톤 두 마리가 빠르게 그의

앞에 다가갔다.

“크르르르륵! 케에엑! 끄으윽!”

“크륵, 크르르륵! 끄르르!”

그리고 열심히 손동작까지 해가며 상황을 설명한다.

“그럼 저게 다 레비아탄···.”

“크르륵! 크르크르···!”

“······그런···. 그럼 언제까지···?”

“끄르르르!”

“하아···.”

방금 전까지 주변에 잡히는 건 다 부숴버릴 기세였던 칼로스가 할 말을 잃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고깃덩어리를 가리키던 털북숭이 손가락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그는 애써 그쪽으로 시선을 주지 않고 눈을 질끈 감으며 지시했다.

“···그대로 두어라.”

“크르르르!”

“한 조각이라도 분실하지 않도록 주의하고···.”

“키릭. 키릭.”

“크르르륵!”

스켈레톤 두 마리가 굽신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칼로스는 고개를 들고 뚫린 천장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마계 제1군단장 칼로스의 처지가 어쩌다 이렇게···.’

말로 정리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심경이었다.

더더욱 심란한 것은 그가 이런 일에 점점 더 익숙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 * *

아스키나 대륙에 평화가 찾아온 후, 정령계 또한 고요하고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정령계의 한 공간에 예외적으로 큰 소리가 났다.

“엘시스!”

휘익!

강력한 바람에 물결이 위로 솟두치며 파도가 일었다.

놀란 물의 정령들이 꿀렁꿀렁 위로 솟아올랐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뭐라도 해보려고 한 것이었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상대는 바람의 정령왕이었던 것이다.

휘이익!

바람의 정령왕이 단숨에 물로 만들어진 벽을 뚫고 들어갔다.

그곳에는 물의 정령왕 엘시스가 등을 보이고 바닥에 앉아있었다.

“엘시스!”

다시 한번 소리친 바람의 정령왕 실피드의 목소리에 엘시스가 고개를 들었다.

분명 자신이 온 것을 알아챘을 텐데 뭐에 저렇게 열중하고 있는 건지, 실피드

는 화가 치밀어오르는 것을 꾹 눌러 참았다.

“우움?”

뒤늦게 고개를 돌린 엘시스의 볼이 빵빵했다.

손에는 알 수 없는 이상한 그릇을 들고 있었다.

“엘시스, 지금 뭐 하는 거지? 그리고 왜 굳이 정령계에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거고?”

꼴깍 입안의 음식을 삼킨 엘시스가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었다.

“뭐 좀 먹느라 그랬습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무슨 일?! 그게 할 소리인가! 오늘 나와 함께 아스키나 대륙의 남쪽 숲의 자

연을 함께 복원하기로 하지 않았는가!”

“······아!”

‘엘시스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는 것인가!’

물의 정령왕 엘시스는 절대 약속을 어기는 존재가 아니었다.

오히려 4대 정령왕 중 가장 원리원칙을 철저히 지키고, 고지식한 성격을 가지

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자신과 함께하기로 한 오늘의 약속을 까맣게 잊었던 것처럼 보인다.

대체 왜? 뭐가 엘시스를 저런 이상한 상태에 빠지게 한 것인가?

화가 나기도 하고, 또 걱정되기도 했다.

이런 모습은 정말 처음 보는 것이었다.

“깜빡했습니다. 아까까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는데. 잠깐만 볼일을 보고 나

간다는 것이 그만···. 큰 실수를 했습니다. 지금이라도 가보는 것이···.”

“아니, 됐어. 어차피 그 숲 복원은 거의 마무리 단계였으니까 잠깐 미뤄도 될

것 같아. 그보다··· 나는 자네의 상태에 관해 이야기해보고 싶어.”

“제 상태 말입니까?”

“그래. 자네의 상태! 도대체 요즘 왜 이러는 것인가! 완전히 다른 일에 열중

하고 있지 않은가. 대륙의 자연 복원이 가장 시급한 일 아닌가?”

“거의 마무리되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긴 해도··· 대체 그보다 중요한 일이 뭐냔 말일세. 손에 지금 쥐고 있는

그것 때문인가? 정령계에서 굳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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