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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 헌터 (57/125)

      구조 헌터

실피드가 휘릭 바람을 일으키며 다가와 엘시스의 손에 들려있는 것을 눈으로

확인했다.

“음식인 것 같은데, 처음 보는 모양이야. 혹시 지구에 있다는 그 초월자에게

서 받아온 것인가?”

“···역시 눈치가 빠르십니다.”

“이게 대체 뭐길래···.”

“실피드,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빨리 먹어 치우겠습니다. 그리고 같이 숲으로

출발합시다. 이대로 두면 면이 다 불어버리기 때문에···.”

“······.”

실피드는 할말을 잃었다.

확실히 엘시스는 변했다.

과거의 그녀라면 약속을 어길 리도 없고, 어긴 것을 알아채는 순간 자책하며

당장 숲으로 떠났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분명 그와의 약속은 뒷전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아무래도 현재 엘시스의 우선순위는 그녀의 손에 든 음식인 것 같다···.

“엘시스, 그거 나한테 줘보게.”

“···왜 그러십니까?”

“수상해. 자네가 이것 때문에 이상해진 것 같으니 조금 살펴봐야겠어.”

“대륙을 구원해주신 초월자님의 선물입니다. 중요하게 여길 수밖에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입가에 붉은 양념을 묻히고, 포크를 쥔 채 이야기하는 엘시스에게서는 과거의

위엄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엘시스···. 자네가 생각해봐도 스스로가 변한 것 같지 않은가? 원래 이런 식

으로 행동하지 않았다는 걸 모르겠나?”

“······.”

화를 내고는 있지만 실피드의 눈빛에 걱정이 가득했다.

그 눈빛에 엘시스의 마음이 흔들렸다.

그리고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실피드, 제가 그동안 뭔가 잘못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엘시스!”

그 말에 바람의 정령왕의 얼굴이 크게 밝아졌다.

엘시스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운디네를 향해 손짓했다.

하급 정령이 빠르게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그 손에는 엘시스의 손에 든 것과 같은 그릇이 들려있었다.

“이 좋은 것을 혼자 먹으려고 욕심을 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누겠습니

다. 하나 만들어드리죠.”

예상치 못한 엘시스의 말에 실피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 *

나는 팔짱을 낀 채 입을 열었다.

“그래서··· 둘이 같이 찾아왔다? 라면 얻어먹으려고?”

“아니,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

내 앞의 두 사람, 아니 두 정령이 나란히 앉아 민망한 듯 얼굴을 붉혔다.

둘 중 한 명은 그간 몇 번 방문했던 물의 정령왕 엘시스, 그리고 다른 한 명

은 바람의 정령왕인 실피드란다.

나는 물의 정령왕에게 물었다.

“엘시스, 얼마 전에 가져간 라면은 벌써 다 먹은 거야? 한 박스 꽉 채워서 가

지고 갔잖아.”

엘시스는 질리지도 않는지 벌써 여러 번 혼자 찾아와 라면을 받아 갔다.

아무래도 이 물의 정령왕은 하나에 꽂히면 꽤 오래 그것만 먹는 타입인 것 같다.

나였으면 벌써 물려서 입도 대기 싫었을 것 같은데, 엘시스는 질리는 기준도

굉장히 긴 듯하다.

아무래도 수천 년간 존재했을 정령왕이니 시간의 기준이 인간과 다르기도 하

겠지.

“그렇습니다. 아껴 먹으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실피드와 나눠 먹게 되어

서···.”

“아니, 그걸 어떻게 내 탓으로 돌리는가!”

“탓하는 게 아니라 그냥 사실을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두 정령왕은 티격태격하다가 내 앞이라는 걸 퍼뜩 깨닫고 자세를 바로 했다.

녹색 머리의 남성이 크흠, 헛기침했다.

소년과 청년 사이 정도로 보이는, 부드러운 생김새의 남자가 바로 정령왕 실

피드의 인간화된 모습이었다.

처음 식당을 찾은 실피드는 좀 떨떠름하게 베로를 보았지만, 별다른 반응을

하지는 않았다.

미리 엘시스에게 언질을 받은 것 같다.

그에게서, 유희진의 반지에서 나왔던 실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청량한 바람

이 뿜어져 나와 주변을 한번 휘감았다.

“직접 찾아뵙지 못한 것이 늘 마음에 걸리던 참이었습니다. 엘시드가 정령계

를 대표하여 만나 뵙고 왔고, 저는 아스키나 대륙 복구를 먼저 끝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있다가 하고 미루다가 이렇게 시간

이 흘러버렸습니다.”

“이제 복구는 다 끝냈고?”

“아직 조금 남았는데······. 거의 마무리 단계입니다.”

···라고는 하는데 솔직히 눈에 뻔했다.

그냥 엘시드의 라면을 같이 먹다가 빠져들어서 나중에나 오려고 했던 내 식당

에 조금 일찍 찾아온 거겠지.

“어쨌거나 인사도 할 겸 지구의 요리도 더 먹어볼 겸 찾아온 건 맞는 거네?”

내 질문에 실피드가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그렇습니다. 제가 알던 아스키나 대륙의 음식과는 너무 달라서 호기심

이 생겼습니다. 제가 대접해야 할 판에 이러는 것도 염치가 없긴 하지만···.”

“됐어. 알겠으니까 변명할 필요는 없고 그냥 먹고 가.”

어차피 손님들이 드나드는 식당.

정령이건 인간이건 밥 먹으러 온 자들은 다 손님이다.

맛있게 먹어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역시, 듣던 대로 아량이 넓으십니다.”

실피드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나는 그들에게 라면의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었다.

짜장라면과 그냥 라면을 섞어 먹는 조합을 알려준 것이다.

“오오오···!”

“어째서 이런 생각을 못 했던 건지 모르겠습니다! 따로 먹었던 두 가지를 섞

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분명 듣고 나니 간단한 방법인데 말입니다!”

이왕 찾아온 김에 라면에 만두나 떡을 넣거나 파, 양파 등의 재료를 추가해

더 다채로운 맛을 낼 수 있다는 것도 알려주었다.

정령왕들은 모두 시도해보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라면에 관해서는 거의 한국인에 가까운 지식과 경험을 가지지 않았

을까.

두 정령왕은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라면이 가득 든 상자 4개를 들고 정

령계로 돌아갔다.

맛을 좀 보라고 과자도 몇 개 끼워주었다.

그들은 떠나기 전에 인간들이 좋아하는 거라며 금은보화가 든 상자 하나를 두

고 갔다.

겨우 라면 몇 상자에 받기에는 민망한 대가이긴 한데···.

‘어차피 또 올 기세인데, 뭐.’

속도를 보면 저 정도 양도 금방 다 먹고 또 찾아올 것이다.

정령이라 먹는 데 한계가 없는 건지 하루에 세 개도 훨씬 넘게 먹어 치우는

것 같다.

조만간 또 오면 이제는 라면 말고 다른 맛있는 걸 해줄까 싶다.

“웡! 웡!”

정령계로 이어지는 물길을 따라 떠나는 정령왕들에게 베로가 짖었다.

경계의 짖음이 아닌 잘 가라고 인사하는 의미인 것 같다.

이전에는 호기심과 경계가 조금 섞인 채로 물의 정령왕을 구경했었는데, 아무

래도 찾아오는 빈도가 늘다 보니 친근해졌나 보다.

엘시스 또한 멀어지면서 슬쩍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역시 자주 보면 어쩔 수 없는 것인지, 처음엔 베로와 슬라임에게 증오심을 표

출했던 그녀도 조금씩 마음이 풀린 모양이었다.

바로 옆에서 바람의 정령왕 실피드가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자 곧 손을 내렸

지만.

이번에 얼마나 걸리려나.

그래도 이쯤 됐으면 처음보다는 좀 질렸을 테니 꽤 오래 먹지 않을까 싶은데.

“저 정도면 한 달 반, 아니면 두 달 정도 뒤에 오지 않을까···.”

“웡웡!”

혼잣말에 베로가 대답했다.

자기도 그렇게 생각한다는 의미인 것 같다.

* * *

헌터들의 세계에서 부상을 입거나 사고를 당하는 건, 길거리를 걷던 행인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것만큼이나 흔하다.

길드원들 또는 파티 단위로 움직이기 때문에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는 일은 많

지 않다.

서로 구해주거나 치료를 해줄 수 있으니 던전에서 탈출하기만 하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때때로 심각한 상황에 부닥치는 경우도 존재했다.

함께 사냥하던 동료가 던전 내부에서 실종되거나, 부상이 심각하여 옮길 수

없는 경우 등 각지각색의 비상상황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특히나 길드 소속이 아닌 개별 파티로 활동하는 경우, 도움이 필요할 때 지원

요청할 곳이 마땅하지 않다.

그런 상황에 나서는 것이 바로 구조 헌터였다.

수많은 다른 직업들처럼, 구조 헌터 또한 대격변 이후 새롭게 생겨난 직종이

었다.

체계가 제대로 잡히지 않았던 시절에는 많은 사람들이 던전에서 사망했으나,

구조 헌터가 생겨난 이후로 사망률이 굉장히 많이 줄어들었다.

던전 구조 전담반의 구조 헌터 김일영이 아래를 향해 소리 높여 외쳤다.

“괜찮으십니까!”

수십 미터 아래 모래 구덩이 바닥에서 꿈틀꿈틀 움직이던 남성이 대답했다.

“도와주세요! 다리가 부러져서 올라갈 수가 없어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던전은 클리어 상태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금방 구해드

리겠습니다!”

“살려주세요!”

아래 떨어진 남성은 샌드웜의 함정에 빠져 수시간째 헤어 나오지 못하는 중이

었다.

모래 구덩이라는 특성 때문에 함께 하는 파티원들이 함부로 구조를 시도할 수

없었기에 구조대에 신고한 것이다.

심지어 샌드웜이 죽은 후, 위쪽에서 모래가 흘러내리기 시작하여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다.

김일영이 손짓하자 뒤쪽의 대원들이 들것을 챙기고 줄을 타며 아래로 내려가

기 시작했다.

구덩이 아래쪽에 쓰러진 남자는 패닉에 빠져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자, 진정하세요. 이제 괜찮습니다.”

구조 헌터들의 능숙한 조치에 남자는 곧 안정을 되찾았다.

사실 언제 모래더미가 쏟아질지 모르는,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구조 헌터들은 침착하게 남자를 안심시키며 들것에 옮기고 끈을 연결

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다리가 부러진 남자는 던전 밖의 응급구조사에게 인계되었다.

다 큰 성인 남성이 들것에 누운 채 눈물을 흘렸다.

죽는 줄 알았다고, 구해줘서 고맙다고 말하는 걸 들으니 김일영의 가슴이 뿌

듯해졌다.

힘들고 어려운 순간도 많지만, 바로 이 순간의 기쁨 하나 때문에 구조 헌터가

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던전 안에 가지고 온 구조 장비들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으악!”

구급 헌터 한 명이 화들짝 놀랐다.

김일영이 덩달아 놀라서 소리쳤다.

“왜! 무슨 일이야!”

“저, 저쪽에 게이트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게이트···?”

고개를 돌린 김일영의 눈에 정말로 게이트가 하나 보였다.

사막의 모래 위에 갑작스레 나타난 게이트에는 <던전 식당>이라는 간판이 붙

어있다.

“잠깐만 이거···.”

“던전 식당? 말로만 듣던 거기 아닙니까?”

“웬일이래? 이게 여기 나타났다고?”

놀람도 잠시,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게이트는 아직 던전에 남은 구조 헌터들

의 관심을 끌었다.

술렁이던 구조 헌터들의 시선이 팀장인 김일영을 향했다.

“저··· 팀장님. 가보면 안 됩니까?”

“다들 가보고 싶은 거냐?”

“네! 쉽게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벌써 여러 달 전부터 던전 식당 얘기를 들

었는데 눈앞에 나타난 건 처음입니다!”

“맞아요. 지금 놓치면 또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는데, 아쉽지 않습니까!”

“···흐음···.”

11시 25분.

김일영은 시간을 확인하고 잠깐 고민했다.

아직 점심시간은 아니지만··· 조금 일찍 식사를 하는 정도의 융통성은 발휘할

수 있었다.

김일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그럼 들어가 보자고. 다들 고생 많았으니까 내가 살게.”

“오! 팀장님 감사합니다!”

“빨리 갑시다! 미적거리다 사라질 수도 있잖아요. 그럼 아까워서 잠도 못 잘

것 같아요.”

그의 대답을 기다리던 팀원들이 신나서 재잘거리며 식당 입구를 향해 달려갔다.

함께 일할 때는 믿음직스러운 동료들인데, 이럴 때 보면 아직 젊고 어린 티가

난다.

김일영은 흐뭇하게 웃으며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오늘 점심은 팀원들을 위해 한턱 쏠 생각이었다.

4명의 구조 헌터들은 화기애애하게 대화하며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 통로를 걸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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