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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벤트 (58/125)

      이벤트

다른 구조 헌터들과 같이 김일영도 새로운 경험에 기분 좋게 미소 짓고 있었다.

자리에 앉아 메뉴판의 가격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비, 비싸잖아···.’

김일영은 내심 상당히 당황했다.

물론 어느 정도 가격이 있으리라는 예상은 하고 있었는데 그의 생각보다 훨씬

더 비쌌다.

바깥의 물가와 비교하면 2~3배 이상인 것 같다.

하긴, 사냥 도중에 쉴 수 있는 곳이라는 걸 감안하면 이 정도 가격이 오히려

합리적일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한 자신이 어리석었다.

들떠있던 다른 구조 헌터들도 메뉴판을 보고 당황한 듯 순간적으로 조용해졌다.

누군가 작게 중얼거렸다.

“아, 이건 좀···. 너무 비싼 것 같은데···.”

“팀장님, 안 사주셔도 됩니다. 다음에 사주세요.”

뒤이어 분위기를 바꾸려는지 막내가 김일영을 보며 싹싹하게 말했다.

다른 구조 헌터들도 맞장구를 쳤다.

“맞습니다. 이건 좀 과한 거 같아요. 저희는 괜찮습니다.”

“세희 말대로 다음에 사주세요. 어차피 매일 보는 얼굴들인데!”

자연스럽게 부담 주지 않으려는 분위기로 흘러갔다.

김일영이 서둘러 손을 내저으며 쾌활한 척 말했다.

“아니, 내가 사겠다고 했잖아. 너희는 가격 신경 쓰지 말고 맛있게 먹어주면

되는 거야. 얼마 전에 월급도 들어왔고 우리 팀원들한테 이 정도 쓰는 건 아

깝지도 않아.”

“팀장님···.”

주세희가 입술을 비죽 내밀며 감동받은 표정을 지었다.

장난 반 진심 반의 반응에 다시 분위기가 전환되었다.

팀원들이 하나둘 입을 열었다.

“아, 그럼··· 맛있게 잘 먹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팀장님!”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솔직히 김일영은 속이 꽤나 쓰렸다.

애초에 간단히 점심 한턱 쏘는 걸로 예상했기 때문에 생각보다 큰 지출이었다.

그래도 팀장으로서 한번 살 수 있는 금액대이긴 한데···.

문제는 요즘 그의 재정 상황에 있었다.

친한 친구를 믿고 빌려준 돈을 약속한 날로부터 몇 달이 지났는데 아직 돌려

받지 못했다.

거기에 더하여 지인의 말만 믿고 여윳돈을 투자했다가 꽤 크게 손실을 보고

있는 상태였다.

쪽팔려서 아무 데도 얘기하지 못하고 혼자 끙끙 앓는 중이었다.

치명적인 손실은 아니지만 하필 두 가지 악재가 동시에 닥쳤다.

당분간 돈을 아껴 써야 하는 상황인데, 아까 왜 그런 말을 꺼냈던 건지 뒤늦

게 후회스러웠다.

하지만 인제 와서 했던 말을 무르는 것은 그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 열심히 일해서 또 벌면 되는 거지···. ’

김일영은 애써 합리화하며 쓰린 속을 달랬다.

내일부터 더더욱 허리를 졸라매는 수밖에 없었다.

* * *

평상 위에 편하게 앉은 네 사람.

그들이 입은 주황색 유니폼의 팔뚝에는 십자 모양의 자수가 놓여있다.

던전에서 활동하는 구조 헌터들이었다.

처음 입구에서 이들이 나타났을 때는 잠깐 놀랐지만, 생각해보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구조 헌터들도 던전에서 활동하는 건 마찬가지니까, 당연히 식당 입구를 발견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중 한 사람, 낯익은 얼굴이 있다.

머릿속에 과거의 기억이 하나 떠오른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어두컴컴한 던전 내부에 쌓인 돌무더기를 타고 내려오던 남자.

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에게 했던 말이다.

‘이렇게 다시 볼 줄은 몰랐네.’

지구로 돌아오고 처음 마주했던 얼굴이었다.

또렷한 눈빛에 올곧아 보이는 인상의 남자는 내가 갇혀있던 던전 붕괴 현장으

로 찾아왔던 구조 헌터였다.

들어오자마자 눈이 마주쳤는데 그는 나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하긴 그럴 만도 하다.

저 사람이 지금까지 구조했던 사람이 백 명도 넘을 텐데, 그중 한 명인 나를

얼굴만 보고 기억해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반면 나는 살면서 구조 헌터를 만난 적이 그때 한 번뿐이었다. 지구로 돌아와

서 처음 마주친 사람이기도 하고.

그래서 언뜻 봤음에도 이렇게 쉽게 기억해낼 수 있는 거겠지.

그러고 보니 그때 고맙다는 말 한마디도 못 하고 집으로 돌아왔던 것 같다.

그 당시에는 구조 헌터고 뭐고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어차피 얼마든지 스스로 던전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상황에서 타이밍 좋게 구

조 헌터가 들어온 것에 불과했다.

게다가 이세계에서는 보냈던 50년이라는 시간의 흐름이 지구에는 전혀 적용되

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된 후로는 그저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그 후 그 구조 헌터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그냥 잊고 있었던 것이다.

필요 없는 일이었다고는 해도, 이들이 수고롭게 나를 구해주려 노력했다는 것

은 사실이었다.

돌이켜보면 새삼 고마운 일이었다.

“사장님!”

손을 들며 부르는 소리에 구조 헌터들에게 다가갔다.

나를 구해주었던 남자의 가슴팍에 '구조 헌터 김일영'이라는 글씨가 수놓아져

있다.

“저희 비빔밥 4개 부탁드립니다.”

말끝에 김일영이 티 나지 않게 한숨을 내쉬는 게 보였다.

아무래도 돈 때문에 저러는 것 같다.

방금 전 이 사람들끼리 하는 이야기는 나도 다 들었기 때문에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연장자로서 사겠다고 했지만 그게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지.

“혹시 그냥 비빔밥 말고 육회 비빔밥은 어떻습니까?”

“어? 육회도 있어요?”

내 질문에 갈색 머리의 여자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네. 메뉴판에는 빠트렸는데 싱싱한 육회가 있어서요.”

아침에 대광 정육점에서 사 온 육회였다.

이사 전보다 조금 멀어지긴 했지만 아무래도 거기만큼 고기가 마음에 드는 집

이 없어서, 요즘에도 종종 그쪽으로 가고 있다.

신선도 문제도 있어서 단골 손님 몇 명한테만 추가해줄 요량으로 조금만 사

왔다.

하지만 이 구조 헌터들에게는 좀 더 좋은 걸 먹여주고 싶어서 물어본 것이다.

“어··· 육회 비빔밥 먹고 싶은 사람? 아니다. 우리 중에 육회 못 먹는 사람

있나?”

김일영이 동료들을 훑어보며 물었다.

“먹을 수 있긴 한데···.”

“저도···.”

“저도 먹긴 합니다. 그런데 그냥 비빔밥도 좋아합니다.”

김일영이 자기보다 어려 보이는 헌터들이 눈치를 살피며 대답했다.

“아냐. 먹을 수 있으면 다 육회 비빔밥으로 먹어야지.”

그의 말에 다른 구조 헌터들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역시 그들도 이왕이면 육회 비빔밥이 먹고 싶었던 것이다.

그걸 고려해서 김일영도 돌려 질문했던 거고.

‘인망은 두터울 것 같네. 본인은 손해를 좀 보겠지만.’

김일영이 나를 보며 물었다.

“그, 육회가 추가되면 가격은 어떻게 됩니까···?”

쿨하게 결론을 내긴 했는데, 돈 얘기를 꺼내는 순간 목소리가 흔들린다.

아무래도 그냥 비빔밥보다 육회 비빔밥이 훨씬 비싸다.

내 입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꿀꺽 침을 삼키는 게 보인다.

나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아, 무료입니다.”

“···네에?”

“어, 왜, 왜죠? 무슨 이벤트 같은 건가요?”

김일영을 비롯한 구조 헌터들이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벤트 맞습니다. 여러분이 저희 식당 1000번째 손님이거든요.”

“헉, 진짜요?”

“네.”

당연히 뻥이다.

하지만 당당하게 대답하자 이들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행운에 기뻐했다.

“대박! 이런 거 당첨된 거 처음이에요!”

“복권이라도 사야 하는 거 아니야?”

“이건 팀장님이 사기로 했던 거니까 팀장님 운이죠. 복권 하나 사보세요.”

“그럴까? 하하. 일단 오늘 쏘기로 했던 건 다음으로 미뤄야겠네.”

“에이, 괜찮아요. 팀장님 운으로 걸린 거니까 그냥 사주신 걸로 쳐야죠.”

긴장감이 보이던 김일영의 얼굴이 확 풀어졌다.

역시 돈에 대한 부담감이 꽤 컸던 것 같다.

사실 생각해보면 말이 안 되는 이벤트다.

이 가게에 홍보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나 혼자 하는 가게에서 몇 달 내내 천

번째 손님만을 기다리며 수를 헤아리고 있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막상 당첨되었다는 얘길 들은 입장에서는 그렇게 깊이 생각하지 않을

거다.

조금 의아해할 수는 있지만 그래도 공짜라는 말에는 기뻐하는 게 일반적인 반

응이니까.

사실은 그때 구조받은 것에 대한 보답으로 나중에 계산할 때 돈을 안 받으려

고 했었다.

하지만 김일영의 표정을 보아하니, 저 상태에서 밥 먹다가는 체하겠다 싶어서

그냥 미리 공짜라고 말해준 것이다.

굳이 그때의 보답이니 뭐니 얘기 꺼내는 것보다 이벤트인 척하는 게 훨씬 마

음 편할 테고.

과거에도, 지금도, 나는 구조 헌터들을 참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사람들이 각성하고 싶어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돈 때문이다.

나처럼 3년간 F급에 머무는 것 같은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몬스터를 사냥하

며 돈을 버는 건 위험을 충분히 감수할 만큼 수익이 높은 일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돈이 아닌 다른 가치를 우선으로 여기고, 선택한 사람들이었다.

위기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고 살리는 일이 의미 있고 가치 있다는 건 다들 알

지만, 정말로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많지 않다.

구조 헌터라는 직업이 일반 헌터보다 안전한 것도 아니었고 일의 가치에 비해

그만큼의 금전적 대가를 받지는 못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보통의 뚝심이 아니고서야 선택할 수 없는 길이었다.

게다가 구조 헌터에 F급, E급 같은 하급 헌터는 지원도 할 수 없으니까, 이

사람들은 어떤 길드에 들어갔어도 환영받고 승승장구했을 인재들인 것이다.

‘나도 구조 헌터는 생각도 안 했었지.’

물론 F급이었기 때문에 받아주지도 않았겠지만, 애초에 비각성자 시절에도 구

조 헌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선택지에도 없었다.

나는 돈이 최고라고 생각했던, 자본주의 사회의 평범한 일반인 중 하나였을

뿐이니까.

그때의 나와 다른, 이런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혼란스러웠던 사회가 이 정도

로 안정되어 굴러가고 있는 것이다.

이 정도 대접쯤은 받고도 남을 만한 사람들이다.

부엌으로 돌아와 팔을 걷어부쳤다.

‘맛있게 만들어봐야겠군.’

재료만 있다면 사실 비빔밥만큼 쉬운 요리도 없다.

나물이 들어갈 경우는 손이 좀 가겠지만, 그게 아니면 밥에 채소만 잘 조합해

서 얹어주면 되니까.

커다란 양푼이에 밥을 덜고, 그 위에 채소와 김을 둘러주었다.

가운데에는 양념된 육회를 듬뿍 올리고 중간에 약간 홈을 만들어 계란 노른자

를 살살 올려주었다.

불도 필요없이 아주 간단하게 완성했다.

빠르게 완성된 육회 비빔밥 그릇들을 구조 헌터들의 앞에 내놓았다.

메추리알 조림과 김치, 몇몇 밑반찬들과 입가심할 콩나물국까지.

거기에 시키지 않은 음료수도 하나씩 가져다주자 놀란 듯 눈이 커진다.

“와···. 감사합니다!”

“이렇게 많이 주셔도 되는 거예요? 공짜인데?”

“그러게요. 저희야 좋긴 한데···.”

평범한 식당처럼 생각하는 건지, 가게 매출까지 걱정하는 모양이다.

“이벤트라고 덜 드릴 수는 없죠. 걱정 말고 맛있게 드세요.”

내 말에 구조대원들이 하나둘 숟가락을 손에 들었다.

“그럼 잘 먹겠습니다! 와, 고기 때깔이 장난 아니네요.”

입맛을 다시며 밥을 휘젓는다.

노른자가 톡 터지고, 붉은 생고기와 녹 채소, 밥이 골고루 섞인다.

옆에 놓인 참기름을 쪼록 부어주자 고소한 향이 공기 중으로 퍼져나간다.

육회 비빔밥을 크게 한술 떠서 입에 넣은 김일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오오···!”

맞은편의 갈색 머리 헌터 주세희도 눈썹을 까딱이며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우와, 진짜 맛있어요.”

“육회 오랜만에 먹는데 너무 맛있다. 이거 진짜 싱싱한가 봐.”

사람들의 반응을 보니, 대광 정육점의 고기가 맛있긴 한 것 같다.

‘그 맛 알지.’

육회 특유의 부드러우면서도 쫀득한 식감.

씹을수록 고소한 맛에 자꾸만 손이 가게 된다.

익은 고기도 좋지만 이 맛도 종종 당길 때가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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