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시네요
구조 헌터들은 뜻밖의 행운에 즐거워하며 육회 비빔밥을 맛있게 먹었다.
“잘 먹었습니다!”
“진짜 너무 맛있었어요!”
싹싹 긁어먹은 티가 나는 그릇들을 보니 빈말은 아닌 것 같다.
다 먹고 난 후에도 육회가 너무 맛있었다는 얘기를 몇 번이나 더 했다.
구조 헌터들이 나가기 직전, 나는 김일영과 눈을 마주치며 입을 열었다.
“손님, 혹시 저 기억 안 나십니까?”
“네?”
갑작스러운 질문에 김일영이 당황해하며 눈을 깜빡였다.
“어, 글쎄요···. 잠깐만요. 제가 기억력이 별로 안 좋아서···.”
내 얼굴을 자세히 쳐다보던 그가 뭔가 알아챈 듯 소리쳤다.
“어··· 아!”
그의 표정이 확 밝아진다.
“기억납니다! 던전 붕괴 사고!”
나도 씨익 웃었다.
“맞습니다. 기억을 하시네요.”
“당연하죠! 바로 못 알아보기는 했지만,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제가 구한 사
람인데요! 특수한 사건이기도 했고요. 잘 지내고 계셨군요. 이런 데서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김일영이 뒤늦게 나를 훑어보며 신기한 듯 말했다.
“사실 아까 알아봤는데 긴가민가해서 바로 아는 척을 못 했습니다.”
“그러셨군요! 맛있게 먹은 것도 좋았는데, 이렇게 잘 살고 계신 거 보니까 더
기분 좋네요. 혹시라도 트라우마가 생기지 않았을까 걱정했거든요. 꽤 오래
혼자 갇혀있었으니까···.”
“별문제 없이 바로 일상 생활했어요.”
“너무 다행입니다. 이럴 때 제일 보람 있어요. 제가 구한 생명이 잘 살아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됐을 때요.”
훈훈한 분위기에서 대화가 이어졌다.
김일영과 같은 팀의 구조 헌터들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눈을 빛내며 이쪽을
보고 있다.
저 중에 함께 구조 작업을 했던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직접 얼굴을 마주한 건 김일영뿐이지만 작업 자체는 여러 사람이 함께했을 테
니까.
“시간 날 때 또 오세요.”
“예? 그래도 됩니까?”
나는 김일영에게 한성 게이트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음식은 한성 길드와 계약한 가격으로 드릴 테니 부담은 갖지 마세요. 어차피
헌터 관리국 소속이시기도 하고.”
“아, 그게 관련이 있나 보군요.”
사실 그런 건 아니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의외로 받는 걸 부담스럽게 여기는 사람도 많으니까 이 정도로 얘기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좋은 일 하는 구조 헌터들이니 종종 찾아오면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고 싶다.
이것도 인연인데 그냥 끊기는 게 아쉽기도 하고.
구조 헌터들은 아스키나 대륙의 사과로 만든 사과잼 하나씩 받아 들고 떠났다.
들어올 때보다 더 떠들썩하게 얘기하며 신나 하는 걸 보니 입가에 미소가 지
어졌다.
김일영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 이벤트가 자연스럽게 공짜 밥을 주기 위한
거짓말이었다고 의심할지도 모른다.
뭐, 그땐 이미 한참 늦었으니 긴가민가하면서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겠지.
떠나는 구조 헌터들의 뒷모습을 잠깐 바라보았다.
그들의 뒷모습에서 뿌듯함이 느껴지는 것 같아, 나 또한 덩달아 기분이 좋아
졌다.
* * *
유희진의 실프가 내 주변을 몇 바퀴나 돌았다.
동화에나 나올 법한 작은 요정처럼 보이는 실프는 혼자 까르르 웃으며 즐거워
했다.
“얘는 사장님을 왜 이렇게 좋아하는 걸까요? 갈수록 심해지는 것 같아요. 나
한테는 전혀 안 이러는데.”
“글쎄요. 하하.”
유희진이 의문을 표했지만 얼버무려 넘길 수밖에 없다.
사실 그 이유는 알고 있다.
이곳에 바람의 정령왕 실피드가 다녀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하급 바람의 정령인 실프가 나에게서 그 기운을 느끼고 이렇게 신이 나서 친
한 척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점점 빨라지는 실프를 부드럽게 휘감아 잡았다.
어느 순간 손바닥 위에 놓이게 된 실프가 어리둥절해하다가 사라졌다.
“진짜 희한하단 말이죠···.”
실프가 들어간 반지를 바라보며 신기해하던 유희진이 앞에 놓인 잔을 들었다.
호로록.
김이 펄펄 나는 뜨끈한 유자차였다.
날이 꽤 쌀쌀해지길래 며칠 전 담아본 거였다.
만족스러운 듯 미소 지은 그녀는 앞에 놓인 사과잼 토스트를 한입 크기로 썰
어 입에 넣었다.
유희진은 오후 늦게 다른 던전 일정이 있다고 하는데, 굳이 오전에 이곳에 찾
아와 식사를 즐기는 중이었다.
한 번 더 유자차를 마시고 토스트와 함께 꿀꺽 삼켜버린 유희진이 나를 보았다.
“사장님, 레비아탄에 대해 아세요?”
“······들어보긴 했죠.”
기습적인 질문에 속으로 뜨끔했다.
나는 얼마 전, 한성 길드에서 잡고 있던 레비아탄을 요리 재료로 쓰기 위해
가로챘다.
그 일이 길드 내에 상당한 파장을 일으킬 거란 예상은 했지만 불똥이 나에게
까지 튈 거로 생각하지 않았는데···.
혹시 나를 떠보는 건가?
의도를 몰라서 잠깐 대답을 망설이는 사이, 유희진이 태연하게 다시 말했다.
“그렇죠? 레비아탄은 S급 보스 몬스터 중에서도 유명하니까. 헌터 생활해 보
신 사장님도 아실 거예요. 저도 딱 한 번 멀리서 본 적 있는데 진짜 크더라고
요···.”
잠깐의 침묵 후 유희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몬스터 사체가 갑자기 사라질 수 있을까요?”
“······글쎄요? 그럴 수가 있나요?”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죠?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근데 실제로 그런 일이 벌
어졌거든요.”
유희진이 다시 토스트를 썰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혹시 뭔가 짐작하고 나를 떠보기 위한 질문인가 싶었는데, 그건 아니었던 것
같다.
내 대답을 듣고 싶은 게 아니라, 생각이 막혀 답답한 마음에 그냥 이야기를
꺼낸 듯하다.
“그게 어디로 사리진 걸까···.”
고민이 꽤 깊어 보이지만, 당신이 엊그제 먹은 된장찌개에도 그 레비아탄으로
만든 가루가 들어있었다는 말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진짜 이상하다니까 그치?”
유희진이 고개 돌려 물은 쪽에는 고영한이 있었다.
그는 발소리조차 내지 않고 조용히 식당 홀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손에 든 행주로 꼼꼼하게 식탁을 닦는 중이었다.
도시락 건도 도움받았고, 이제 안 그래도 된다고 했는데, 고영한은 남는 시간
에 종종 들러서 뒷정리를 도와주곤 했다.
처음에는 방해만 되지 않을까 했는데 은근히 깔끔하게 청소를 잘했다.
식탁을 박박 닦는 그의 얼굴에 보일 듯 말듯 희미한 미소가 보였다.
아무래도 청소 자체를 취미처럼 즐기는 스타일 같기도 해서, 그냥 마음 편히
맡기기로 했다.
나야 편하고 좋은 거니까.
그때였다.
한성 휴게소 쪽에서 신입 헌터 오재영이 불쑥 나타났다.
“어··· 다들 여기 계셨군요.”
“너도 밥 먹으러 왔어?”
“네. 출출해서···.”
오재영은 평소보다 어딘지 다운된 느낌이었다.
그런 그를 보고 유희진이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그건 어떻게 됐어?”
“아··· 그거요······. 망한 것 같아요.”
침울하게 대답한 그의 주변으로 어두운 기운이 스멀스멀 솟아오르는 것만 같
았다.
호기심이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
나는 은근슬쩍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다.
“그게 뭔데 그래요?”
오재영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소개팅이요. 잘 돼 가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봐요···. 연락하지 말라고 하
더라고요. 바쁘다고···.”
“어이구, 어쩌냐···. 곧 여친 생길 것 같다고 그렇게 좋아했는데···.”
안쓰러운 듯 말하는 유희진.
그러나 목소리와 달리, 그녀의 얼굴에는 재미있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어느새 고영한도 청소를 끝내고 바로 옆에 자리 잡고 앉았다.
흥미 없어 보이는 표정인데, 몸은 오재영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아닌 척하면서 귀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분명히 초반에는 연락이 잘 됐거든요. 답장도 바로바로 오고 웃기도 하고.
근데 점점 텀이 길어지더니 결국···.”
“뭐라고 보냈길래 그런 거야?”
“그냥 평범한 대화였어요. 이상한 소리는 안 했던 것 같은데, 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물어볼까요?”
“무슨 소리야. 걔랑 또 연락하려고?”
“가능하면···. 그리고 생각해보면 진짜 바빠서 그런 걸 수도 있잖아요.”
“그건 아니야. 그리고 이미 끝났는데 괜히 또 말 걸면 더 싫어할 수도 있어.”
유희진이 검지손가락을 까딱까딱 흔들며 조언했다.
가만히 있던 고영한이 한마디 툭 얹었다.
“오히려 바뀔 생각이 있는 걸 알면 다시 새롭게 보지 않을까?”
“아니라니까. 사람 마음이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아.”
“그럼 전 어떻게 해야 하죠?”
별거 아닌 걸로 토론이 길어지고 있었다.
쑥덕거리는 그들의 말을 들으며 나도 피식 웃었다.
신입 헌터 오재영은 겨우 22살이다.
고영한, 유희진은 모두 30대였다.
풋풋한 사랑 고민에 괜히 끼어들고 싶고 한마디 거들고 싶은 것도 이해가 간다.
물론 지구에서 30년, 이세계에서 50년가량을 더 산 나에게는 셋 다 청춘으로
보인다.
그때 오재영이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사장님은 인기 많으시죠?”
“저요?
“네. 잘 생기셨잖아요. 인기 많을 것 같은데.”
“아뇨, 별로···. 그냥 평범했어요.”
솔직히 원래도 그냥저냥 괜찮았는데, 초월자가 되면서 몸뿐만 아니라 얼굴도
조금 다듬어진 느낌이 있었다.
지금 내 모습은 꽤 잘생긴 축에 들어가는 것 같다.
“에이, 너무 겸손하시네요. 사장님이 좀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
“너무 옛날이라 기억이 잘 안 나서요.”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한창때에 여자친구를 사귀어보긴 했지만 먹고살기 바빠서 언제부턴가 연애와
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그리고 이제 와서는 그런 설레는 감정을 다시 느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물론 남 얘기를 듣는 건 참 재미있지만.
나에게서 해답을 얻지 못할 것 같았는지 오재영이 타깃을 바꿔 질문했다.
“그럼 사장님 말고···. 두 분은 어떻게 만나게 되신 거예요?”
오재영의 시선이 향한 곳은 유희진과 고영한이었다.
“응······?”
“······뭐?”
멈칫 동작을 멈춘 두 사람이 동시에 오재영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서로 눈을 마주쳤다가, 빠르게 다시 오재영을 본다.
“어··· 아, 아닌가? 두 분 사귀는 거··· 아니었어요?”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감지한 오재영이 더듬거리며 눈알을 굴렸다.
“···당연히 아니야!”
“···아니지, 그럼!”
유희진과 고영한이 동시에 소리쳤다.
“아, 아니라면 죄송··· 합니다···. 제가 잘못 알았나 봐요.”
“됐어. 또 누가 장난쳤나 보네. 우린 친구야, 친구. 너무 오래돼서 이성으로
보이지도 않아. 맞지, 고영한?”
“그렇지, 뭐.”
“아하하, 그런 거였군요···.”
“그래! 오해 많이 하던데 그런 거 전혀 없어.”
두 사람은 몇 번이나 더 부정했다.
좀 과하게 반응하는 것 같을 정도로.
그리고 유희진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이만 가봐야겠다. 사장님 여기 계산이요.”
짧은 텀을 두고 고영한도 꾸벅 인사한 후 식당을 떠났다.
그리고 혼자 남은 오재영은···.
“으아아···. 제가 실수했나 봐요! 기분 나빠하는 것 같았죠? 난 대체 왜 이런
거야···!”
뒤통수를 감싸 쥐며 식탁에 머리를 박았다.
“두 분이 커플이라는 말을 들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
냥 농담으로 했던 말인가 봐요. 이 멍청이!”
내가 볼 땐 별일도 아닌 것 같지만 오재영은 자괴감에 빠져 괴로워했다.
나도 저 나이 때는 온갖 실수를 다 저지르고 혼자 후회하고 스트레스받기도
했다.
물론 나이 들어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저 때는 그 빈도나 정도가 더 심했었지.
“아침은 먹었어요?”
내 질문에 오재영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뭐 할 의욕이 안 나서 그냥 왔어요. 그런데 사냥 나가기 전에 뭘 또
먹긴 해야 할 것 같아서 여기 들린 거고요.”
“위로 차원에서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만들어 줄게요.”
“진짜요? 감사합니다···.”
시무룩했던 오재영은 순두부찌개를 먹으면서 점점 기운을 되찾았다.
“사장님, 한 그릇 더 주실 수 있어요? 밥맛이 없는 줄 알았는데 막상 먹기 시
작하니까 또 배가 고파서요.”
놀랄 정도로 빨리 회복한 그에게 나는 밥 한 그릇을 듬뿍 퍼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