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했거든
18살 소년 황진성.
지저분한 골목길 한구석에 쪼그려 앉은 그는 샛노랗고 푸석푸석한 머리카락을
불만스럽게 만지작거렸다.
오래간 만에 탈색을 했는데 영 마음에 들지 않게 나온 것이다.
남들이 보기엔 다 그게 그거일지 모르겠지만, 그 나름대로 추구하는 미가 있
었다.
“야, 머리 색깔 좀 봐봐. 좀 구리지? 아, 볼수록 맘에 안 드네. 걍 엎어버릴
걸 그랬나.”
황진성은 바로 옆에 삐딱하게 선 친구 이예준을 향해 물었다.
실실 웃으며 토독토독 핸드폰 문자를 보내던 그가 눈길도 주지 않고 대답한다.
“또 그 소리냐. 그만 해라 좀. 거기서 색깔 좀 바뀐다고 안 잘생겨지거든. 걍
받아들여.”
“새끼가 말을 해도···.”
“응. 니얼굴.”
‘유치한 새끼. 지는 곤충같이 생긴 게.’
똑같이 대꾸해주려다가 황진성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수준 낮은 놈한테 일일이 대꾸해줄 필요는 없었다.
그가 있는 골목에는 오토바이 여러 대가 제멋대로 서 있었고, 대여섯 명 정도
의 소년들이 더 있었다.
모두 개성 있는 희한한 헤어스타일을 한 채 제각기 다른 자세로 껄렁함을 뽐
내는 중이었다.
그중 몇몇은 멋있는 척 담배를 피우고, 몇몇은 주기적으로 침을 퉤퉤 뱉어댔다.
황진성을 포함한 이들 모두는 그냥 학교가 다니기 싫어 학교 자퇴하거나 강제
퇴학당한 양아치들이었다.
특별히 하는 일이 없으니 비슷한 처지들끼리 모여 이렇게 의미 없이 시간 죽
이는 것이 일상이었다.
‘개 같은 세상.’
불공평하다.
아빠가 없는 것도 엄마가 아픈 것도, 집에 돈이 없는 것도 모두 불운한 탓이
었다.
이 와중에 열심히 살겠다며 하루종일 뼈 빠지게 일하는 형도 아니꼬웠다.
솔직히 그냥 세상 돌아가는 게 다 마음에 안 들었다.
돈 없고 빽 없는 자신은 맨날천날 길바닥에서 이딴 놈들이랑 어울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도 짜증났다.
‘힘만 있으면 다 부숴버리고 싶다.’
황진성은 언제나처럼 삐딱하게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속으로 욕설을 내뱉
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몸에 열이 확 올랐다.
“으···. 왜 이렇게 덥지.”
황진성은 혼잣말하며 두툼한 웃옷을 벗었다.
이제 막 본격적인 추위가 시작되는 겨울 날씨였다.
다들 허세를 부리면서도 웃옷만큼은 꽁꽁 싸매고 있는 와중에 황진성이 옷을
벗자 몇몇이 그를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그러나 금방 관심을 끊고 시선을 돌렸다.
황당하게도 옷을 벗었는데도 이마에서 송골송골 땀이 맺혀왔다.
분명 쌀쌀한 공기가 느껴지는데 몸에서는 열이 오른다.
‘요즘 왜 이런 거지.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
최근 며칠 동안 갑자기 몸에 열이 확 오르고,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상황이
몇 번 있었다.
몇 분 내로 가라앉긴 하는데, 그래도 자꾸만 이러니 혹시 건강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닌지 조금씩 걱정이 올라왔다.
“설마···. 난 아직 젊은데···.”
황진성은 애써 불안감을 떨쳐냈다.
오히려 몸이 너무 건강해서 뜨거운 걸 수도 있지 않은가.
한참 쪼그려 앉아 있었더니 다리가 저렸다.
허벅지를 주무르며 일어나는데 힐긋 그를 쳐다본 이예준이 인상을 팍 찌푸리
며 소리쳤다.
“으으으! 뭐야! 너 코 팠냐?”
“또 뭔 개소리야.”
“얼마나 깊이 후벼팠길래 피가 그렇게 나냐!”
“드러운 소리 좀 하지 마.”
황진성은 짜증을 내며 손으로 코 아래를 슥 문질렀다가 눈을 크게 떴다.
손가락에 검붉은색의 피가 묻어나왔다.
장난인 줄 알았는데 진짜였다.
“미친! 이거 뭐야!”
“뭐긴 뭐야. 코피지. 그러게 작작 파야 될 거 아니냐.”
이예준은 경멸하는 얼굴로 황진성에게서 한걸음 멀어지며 또다시 핸드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어울려 다니긴 하지만 진심으로 걱정하지는 않는 얕은 관계.
코피를 흘리건 말건 신경도 쓰지 않는다.
“에이씨.”
황진성은 옷 소매로 코를 슥슥 닦고 고개를 뒤로 젖힌 채 기다렸다.
다행히 피는 금세 멎었다. 코밑이 지저분해지긴 했지만.
갑자기 웬 놈의 코피가 흐르는 건지 이상한 일이었다.
띠링!
그때 황진성의 핸드폰이 울렸다.
문자가 온 것이다.
대충 무슨 내용일지 예상하며 화면을 켰다.
역시나 예상을 빗나가지 않는다.
빨리 돈 갚으라는 독촉이다.
“아, 또 지랄이네. 미친놈이.”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이지만 무서울 건 없었다.
갚으면 되는 거 아닌가.
잔소리도 싫고 귀찮아서 미뤄왔지만 그래도 그에게는 돈 나올 구멍이 있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은 황진성이 대충 손 흔들어 인사하고 오토바이 시동을
걸었다.
그의 목적지는 형이 운영하는 정육점, 대광 정육점이었다.
* * *
대광 정육점 주인 황진규는 오늘도 부지런하게 고기를 썰고 있었다.
스윽스윽.
시뻘건 고기가 한 점 한 점 부드럽게 썰려 나갔다.
그러다가 차츰 두꺼운 팔뚝에 근육이 도드라지며 칼질에도 힘이 붙었다.
터억!
터억!
황진규는 도마에 상처가 날 정도로 강하게 내리치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칼
을 내려놓았다.
동생 놈을 생각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팔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속이 너무 갑갑했다.
‘내가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최근 몇 년간 그의 가장 큰 고민 두 가지는 모두 가족에 관한 것이었다.
첫째는 어머니의 병환, 둘째는 동생의 방황이었다.
전자는 병원을 믿고 맡기는 수밖에 없었지만, 후자는 답이 없었다.
철없는 한때의 방황일 거로 생각하고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거니 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말로 위안 삼을 수 없는 지경이 되어가고 있다.
자퇴를 기점으로 질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다니더니, 지금 하는 꼴을 보면 이
대로 가다가는 진짜 범죄자가 될 것 같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온 건지 모르겠지만, 지금에라도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그때 타이밍 좋게도 근심 걱정거리가 제 발로 걸어들어왔다.
콰앙!
“오랜만~!”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능글맞게 입을 여는 황진성을 보자 황진규의 미간
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또 돈 달라고 찾아온 거야?”
“어, 이제 말 안 해도 알아주네.”
갈수록 뻔뻔함만 느는 동생의 모습에 황진규는 할 말을 잃었다.
오늘은 그냥 못 넘어가겠다.
그간은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 더 삐뚤어질까 봐, 그리고 잠깐 이렇게 방황하
다가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올 거라는 기대로 최대한 좋게 좋게 대했었다.
그런데 이건 아니다.
“너 내가 계속 얘기했지. 사고만 치지 말라고. 공부 안 해도 되고, 내가 일
가르쳐줄 테니까 같이 잘살아 보자고.”
“난 그런 일 하기 싫다니까.”
황진성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황진성.”
“그냥 돈이나 좀 줘. 빨리 이거 해결 안 하면 진짜 상황 심각해진단 말이야.”
평소 같았으면 급한 일부터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유야무야 넘어갔을 것
이다.
하지만 지금은 황진규도 무언가 크게 잘못됐다는 걸 느끼고 태도를 바꾸기로
결심한 상황이었다.
그는 험상궂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제 안 봐준다.”
“뭐 어쩌라고.”
“이 자식이, 지금 이게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아?”
황진규가 두 팔을 걷어붙였다.
두 손으로도 완전히 감쌀 수 없는 두툼한 팔뚝이 드러났다.
황진성이 본능적으로 움찔 몸을 떨었다.
두 형제는 한 배에서 났지만 생긴 건 완전히 달랐다.
타고나길 다부지고 근육질인 형 황진규에 비해, 동생 황진성은 비리비리하게
마른 멀대 같은 체형이었다.
게다가 황진규가 정육 일을 하면서 체격 차는 더더욱 커졌다.
힘으로 붙는다면 황진성이 형을 이길 가능성은 아예 없다고 봐도 됐다.
‘미친, 갑자기 왜 저러는 거야.’
본 적 없는 싸늘한 형의 눈빛에 황진성이 약간 쫄았다.
나이 차가 많이 나기도 하고, 원래 성격도 뭘 하건 허허 웃으며 넘어가는 사
람이었다.
특히나 동생인 자신에게는 더 약한 부분이 있어서 덩치 차가 많이 나도 무섭
다는 생각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뭔데, 갑자기 왜 그래?”
황진성은 애써 실실 웃으면서 말했다.
위기를 감지한 몸은 두어 걸음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단숨에 가까이 다가온 황진규가 동생의 멱살을 망설임 없이 잡아챘다.
덥석!
“나와. 이제 안 되겠다.”
“어? 어어어?”
황진성은 발에 힘을 주었으나 몸이 속절없이 끌려갔다.
두 손으로 힘주어 떼어내려 하도 끄떡도 안 한다.
“아씨! 놔! 놓으라고!”
몸을 뒤흔들어 봐도 소용이 없었다.
형 성격상 손님이라도 들어오면 멈출 수 있을 것 같은데 지나가는 사람조차
없는 것 같다.
무슨 이런 자리에서 장사를 한다는 건지···!
“크윽!”
그때, 황진성이 머리를 두 손으로 감쌌다.
“···그딴 거 안 통해.”
당연히 엄살일 거로 생각한 황진규가 차갑게 말했다.
그러나, 한 번 더 격하게 움직이는 황진성의 모습에 그도 동작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커헉!”
심지어 눈이 뒤집어지며 흰자가 보이고,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다.
절대 연기라고 볼 수 없는 상태.
정신 차리도록 혼쭐을 내주려 했는데 이러다 사람 잡겠다. 그것도 동생을!
놀란 황진규의 두툼한 손이 동생의 뺨을 찰싹찰싹 내려쳤다.
“황진성! 왜 이래! 정신 차려! 진성아!”
그리고 그 순간 황진성은 눈앞이 점멸하는 느낌과 함께 몸에 엄청난 힘이 차
오르는 걸 느꼈다.
‘이건···.’
각성이다!
일반적으로 각성 도중에 이렇게 발작하는 듯한 현상이 있다는 건 들어본 적
없지만, 어쨌든 몸에 다른 기운이 생겨나는 걸 보면 확실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곧 몸의 떨림이 멎었다.
잠시 숨을 고른 황진성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크크크크크크.”
“괜찮아? 119 부를까?”
아까의 흉흉한 기세는 어디 가고, 황진규는 걱정스럽게 동생의 팔을 주무르고
있었다.
지금 황진성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지만.
손을 뿌리친 황진성이 일어서며 씨익 웃었다.
“형, 이제 나 못 이기겠는데?”
“뭐···? 아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 방금 쓰러졌잖아. 병원 가봐야 하는
거 아니냐고.”
“괜찮고말고. 나 지금 각성했거든.”
“뭐라고?”
뜬금없는 소리에 황진규는 잠깐 동작을 멈췄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휘릭!
우당탕탕!
무언가가 뒤쪽에서 황진규의 다리를 잡아당겼다.
속절없이 뒤로 넘어가는 형을 보고 씨익 웃은 황진성이 곧장 가게 밖으로 달
려 나갔다.
“아, 안돼! 어디 가! 황진성!”
서둘러 일어나서 따라가려 했지만 이미 동생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어차피 진짜 각성한 거라면 그의 힘으로 제압할 수도 없을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지?’
각성했다고 저놈이 정신을 차릴 리가 없다.
오히려 사고를 치면 더 쳤지.
경찰에라도 신고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쉽사리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각성 후 범죄는 일반 범죄보다 훨씬 더 엄격한 처벌을 받는다는 게 떠오른 것
이다.
그리고 만약 아무 일도 저지르지 않은 상황이라면 괜히 긁어 부스럼이 될 것
같기도 했다.
아무래도 경찰은 적절한 선택이 아닌 것 같다.
‘그럼 누구한테···.’
그때 그의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한때 F급 헌터였다는 단골 손님 최현호.
몇 달 전 동생을 마주치고 혼자 감당이 안 되면 도와주겠다고 했던 적도 있다.
그게 이런 의미는 아니었겠지만 어쨌든 헌터였으니 조금이라도 도움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황진규는 떨리는 손으로 연락처를 찾았다.
* * *
지이이잉.
잠깐 던전에서 집으로 돌아온 사이 핸드폰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2건의 부재중 전화와 방금 온 듯한 문자 한 통.
핸드폰 화면에 뜬 이름은 대광 정육점 주인 황진규였다.
“음? 무슨 일이지?”
떨리는 손으로 쓴 듯 오타가 여럿 있는 문자였다.
그의 동생에 대한 이야기가 짧게 적혀있었다.
우연히 마주쳤던 것이 기억난다.
각성도 안 했는데 마나가 줄줄 새어 나오던 그 껄렁껄렁한 노란 머리 남자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