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생각
‘그러고 보니, 이제 각성할 때도 됐겠네.’
영 불안정해 보여서 말해뒀는데 정말로 문제가 생긴 모양이다.
뺀질거리던 꼴을 생각해보면 사고를 쳤을 수도 있겠고.
어쨌든 바로 가보는 게 좋을 것 같다.
나는 황진규에게 짧은 답장을 보낸 후, 웃옷을 챙겨입고 밖으로 나섰다.
* * *
황진성은 제 두 손을 신기하게 내려다보았다.
태어나서 이렇게 몸에 힘이 차오르는 느낌은 처음 겪어본다.
‘이게 바로 마나라는 거구나.’
말로만 듣던 그 신비한 힘이 자신의 것이 되었다.
정확한 등급은 측정해봐야 알겠지만,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나는 강하다.’
황진성은 실험적으로 힘을 사용해보았다.
마침 몇 미터 앞에 마주 걸어오는 남자가 한 명 보인다.
슈슈슈슉!
“으아아악! 뭐야···!”
가까이에 있는 작은 나무의 가지 하나가 비정상적으로 길어져 남자의 허리를
휘감아 들어 올렸다.
“내려줘! 살려줘! 괴, 괴물이야! 도와주세요!”
황진성은 이어폰을 고쳐 꽂으며 못 들은 척 그 옆을 자연스럽게 지나쳤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웅성웅성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몇 걸음 떨어져 힐긋 뒤를 돌아본 황진성의 입가에 씨익 미소가 걸렸다.
나무는 황진성의 의도대로 움직인 것이다.
그는 길가에 널린 식물들의 기운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평소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지나쳤던 그것들은 사실 내면에 엄청난 생명력을
갖추고 있다.
그 생명력을 조금만 건드리면 얼마든지 공격적인 도구로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흐흐흐···.”
혼자 음흉하게 웃은 그는 가볍게 발걸음을 옮겼다.
휘익!
휘릭!
휘리릭!
“꺄아아악!”
“으아아아악!”
“살려주세요!”
뒤쪽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들.
길 양옆의 가로수가 사람들을 하나씩 낚아채는 것이었다.
놀라서 도망가는 사람들도, 심지어 나무에 붙잡힌 사람들도 황진성이 범인이
라는 사실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직접 몸에서 식물 줄기를 뽑아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주변의 식물을 이용
하는 것이 더 강력하고, 또 정체를 들키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황진성은 달아나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자연스럽게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은 채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것에 묘한 짜릿함이 있었다.
이게 빌런의 기분인가.
이런 능력을 갖추고 왜 몬스터와 싸워야 하는 건가 싶었다.
이미 그쪽으로는 다른 수많은 헌터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황진성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위험하기도 하고 지저분하고 징그러운 몬스터를 마주하기도 싫다.
차라리 던전이 아닌 이곳에서 힘을 이용해 사람들의 우위에 서고, 권력을 휘
두르는 게 훨씬 이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상상력이 마구 뻗어나갔다.
황진성의 머릿속에서 그는 이미 음지에서 세상을 주무르는 암흑가의 보스가
되어있었다.
‘그럼 뭐부터 해볼까?’
방금 사람들에게 힘을 쓴 건 그저 장난에 불과했다.
본격적인 활동은 지금부터.
괜찮은 목적지가 하나 떠올랐다.
황진규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빚을 빨리 갚으라는 독촉 문자.
급전이 필요해서 소액을 빌렸는데 며칠도 안 지나서 이자가 두 배로 불었다.
아까까지는 그냥 형에게 돈을 받아서 갚고 정리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고작 몇 분 사이에 상황이 좀 달라졌다.
말도 안 되는 금리를 붙여 미성년자에게 돈 빌려주는 이놈들도 어차피 불법행
위를 저지르는 범죄자들이다.
마음대로 조져버려도 어디 신고도 못 할 거고······.
‘여길 먹는 것부터 시작하는 게 어떨까?’
황진성은 공부를 제외하고 다른 일에는 꽤 행동력이 있는 편이었다.
당장 통화 버튼을 누른 그는, 지금 바로 찾아가서 돈을 갚겠다고 의사를 밝혔다.
상대는 굳이 왜 찾아오려는 거냐는 의문을 표했지만, 돈을 갚겠다는 말 때문
인지 순순히 사무실로 오라고 했고.
“후후후.”
황진규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멋있게 몸을 날리며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 * *
정육점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유리문에 붙은 종이였다.
오늘 휴업하게 되어 죄송하다는 글이 짧게 적혀있다.
일이 생기고 급하게 만들어 붙인 모양이다.
“형님!”
내가 가게 안으로 들어서기 전에 황진규가 밖으로 튀어나오며 나를 붙잡았다.
헝클어진 머리에 퀭한 두 눈.
상태가 상당히 안 좋아 보인다.
“다른 분들은 어디 계시죠···?”
“나 혼자 왔는데.”
“아···. 그, 그렇군요.”
당연히 다른 사람들과 함께 올 거로 생각했던 것 같다.
도와주겠다는 말이 헌터 생활하면서 생긴 인맥을 이용한다는 의미인 줄 알았
나 보다.
하긴 황진규의 동생이 어느 등급으로 각성했는지도 모르는데, F급 헌터 혼자
뭘 하겠다는 게 믿음직스럽지 않을 것도 같다.
내 눈에 보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황진규는 실망감을 크게 티 내지 않으려 했다.
정육점 안쪽을 한번 들여다보았다.
평소처럼 깨끗하지 않고 잡동사니들이 바닥을 나뒹굴고 있다.
그중 눈에 띄는 것은 가게 안쪽 구석에 놓인 화분 하나.
줄기 하나가 지나치게 길게 늘어져 가게 중앙 바닥까지 뻗어 나와 있다.
자연스럽게 자라난 모양이 아니었다.
“이게 쭈욱 길어지면서 제 발목을 잡아챘어요. 그렇게 넘어지면서 가게가 엉
망이 됐고···. 이걸 떼어내고 밖으로 나갔을 때는 이미 보이지 않더라고요.”
“식물을 다루는 능력이 생긴 것 같네.”
“그런 것 같습니다···.”
“어디로 갔는지 짐작 가는 곳은 있어?”
“······.”
황진규는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전에도 보셨겠지만,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는 아니어서···. 가끔 집에 들
러주기만 해도 고마웠을 정도라 전혀 모르겠어요.”
“흠, 그래? 뭐, 잠깐 사이에 엄청나게 멀리 가진 못했을 테니 이 근처 어디에
있겠지.”
황진규는 절실한 손짓으로 내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형님, 부탁드립니다. 진성이를 찾아주세요. 일단 저랑 싸우다가 흥분해서 나
갔으니까 데려오기만 하면 제가 잘 얘기해서 타일러보겠습니다.”
“그래. 금방 찾을 수 있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진 말고···.”
그때 멀리서 커다란 소리가 들려왔다.
콰콰콰쾅!
“···저기겠네.”
폭발음이 동생과 관련 있음을 직감한 황진규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여기 있어. 내가 갔다 올테니까.”
나는 황진규를 두고 곧장 소리가 난 곳으로 이동했다.
머지않은 사거리의 건물 3층.
깨진 창문으로 검은 연기가 솟아올랐고, 길을 가던 사람들이 놀란 듯 그곳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 * *
“으윽···.”
황진성은 머리를 부여잡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갑작스러운 폭발에 머리가 멍하고, 어지러웠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사무실에 찾아왔고··· 돈 내놓으라는 말에 그냥 바로 공격했던 것 같은
데···.’
몇몇 덩치들이 그를 싸늘하게 내려다보았지만 전혀 두렵지 않았다.
각성한 자신이 비각성자가 두려워할 이유가 어디 있겠나. 그 반대라면 몰라도.
당당하게 갚을 생각이 없다고 말했던 것 같다.
죽기 싫으면 내 말 들으라고 경고했고.
물론 덩치들은 그 말을 듣지 않고 험악한 얼굴로 손가락 관절을 풀며 다가왔다.
그 정도는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능력을 보여주고 협박할 생각으로 뒤쪽에 있던 화분의 식물을 이용했다.
그냥 형식상 가져다 둔 것인지 잘 관리되지 않은 것 같았지만 그런 건 관계없
었다.
채찍질하듯 흔들리며 줄기가 여러 개 솟아났다.
덩치들은 놀라 도망치려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한 화분에서 솟아난 수십 개의 녹색 줄기는 그들의 팔과 다리를 강하게 압박
하여 벗어날 수 없게 만들었다.
이제 갑을이 바뀌었고, 새롭게 이야기를 시작해볼 타이밍이었다.
그런데 그때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머리가 어질어질해지며 온몸에 열이 올랐다.
아까 각성하기 전에 있었던 증상이었다.
잠깐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순간, 폭발이 일어났다.
그리고 눈을 뜨니 사람들이 모두 쓰러져 있었다.
식물 또한 엉망으로 터져서 녹색 파편이 벽이며 바닥에 여기저기 튀어 있다.
‘왜 이렇게 된 거지? 뭐가 문제길래···.’
다리에 힘이 풀려서 무릎을 꿇고 바닥에 엎드린 채 몸을 웅크렸다.
몸이 터질 것처럼 뜨거운데 또 피부는 으슬으슬 떨렸다.
감당할 수 없는 어떤 힘이 몸속에서 이리저리 튀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주, 죽을 것 같아···!’
바로 옆의 식물처럼 몸이 터져버릴 것만 같다.
암흑가의 보스고 뭐고 지금 당장 죽을 것 같아서 너무 무서웠다.
“흐, 흐윽···. 엄마···.”
눈물 콧물이 주르륵 쏟아졌다.
아픈 엄마가 짜증나고 미운데, 무서운 상황이 닥치니 저절로 엄마 소리가 튀
어나왔다.
"쯧쯧···. 아주 가지가지 하네.”
머리 위쪽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위를 올려다보려는 순간 목덜미에 강한 충격이 가해졌다.
눈앞이 캄캄해졌고, 황진성은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
나는 황진성을 들고, 떠들썩한 사건 현장을 조용히 벗어났다.
그리고 우선은 대광 정육점으로 이동했다.
“형님···! 진성아!”
황진규는 내 말대로 정육점에서 그대로 기다리고 있었다.
“괜찮아. 그냥 잠깐 기절한 것뿐이고 아무 데도 안 다쳤어.”
정신을 잃은 황진성을 보고 놀라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를 진정시켰다.
“병원에 가지 않고, 이대로 둬도 괜찮을까요?”
“금방 일어날 거야. 그것보다, 진규야.”
“진규야.”
“예, 형님···.”
“너 얘 감당할 수 있어? 원래도 말 안 듣는 놈이 각성까지 했는데. 이제 힘으
로도 안 될 거 아니야.”
“······그렇겠죠.”
황진규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아까는 대화로 풀어보겠다고 했지만, 될 리가 없다.
그게 그렇게 쉬운 거였으면 애초에 말을 잘 들었겠지.
게다가 지나가면서 보니 길 가던 행인들에게까지 몹쓸 짓을 한 것 같았다.
어린놈이 꽤 질이 나빴다.
나에게 꽤 좋은 생각이 있었다.
“얘 나한테 맡겨 볼래?”
“···네? 형님한테요?”
“내가 사람 만들어 줄게.”
“······!”
나는 놀란 얼굴의 황진규에게 믿음직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 * *
마계, 칼로스의 성에 발을 딛자마자 칼로스가 쿵쿵 발소리를 내며 뛰어나왔다.
“오셨습니까, 현호님··· 이 아니라 왔는가, 현호!”
“그래.”
칼로스는 존댓말을 하다 말고 잽싸게 말을 바꿨다.
주변의 스켈레톤을 의식한 것인데 사실 소용없는 짓인 것 같다.
스켈레톤들은 생각보다 지능이 있었다.
이미 나와 칼로스의 서열 관계 정도는 읽고 있을 것이다.
알면서도 그냥 그러려니 하는 것 같은데, 칼로스는 아직 그걸 못 느끼는가 보다.
“그때 좀 덜 말랐던 레비아탄 고기가 이제 바짝 마른 것 같아. 오늘 가져가도
되겠어.”
“왜 이렇게 반갑게 맞이하나 했더니 그거 때문이었구나. 고기 가져가라고.”
“아,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칼로스가 두 손을 내저으며 강하게 부정했다.
대부분의 고기는 수거했지만 일부 두툼한 것들은 덜 마른 채로 이 성에 남아
있었다.
나한테 티는 못 냈지만 눈치로 봤을 때 그걸 꽤 거슬려 하는 것 같다.
“절대 아니다! 그냥 내가 신경 써서 잘 관리하고 있다는 걸 보여드리려고 한
거였지!”
“어쨌든 보여주기식으로 오늘 오버했던 거 맞네.”
“···아, 아니라니까···!”
억울한 듯 외치는 칼로스를 보고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은근히 놀려먹는 재미가 있었다.
털북숭이 못생긴 마족이 쩔쩔매는 모습은 어디서도 보기 어려운 모습일 테니까.
“아무튼 그 고기는 이따 내가 들고 갈 테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그보
다, 다른 용건이 있어서 말이야.”
칼로스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내 어깨 위를 가리켰다.
“저, 지금 들고 있는 건 혹시··· 인간 아닌가?”
“맞아.”
털썩.
나는 어깨에 메고 있던 비실비실한 체형의 노란 머리를 바닥에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