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퍼포먼스
황진성의 정신 교육을 하는 일주일 동안에도 이 녀석들은 마계로 종종 마실을 나갔다.
칼로스는 황진성을 사냥감 삼아 베로에게 사냥놀이를 시켜주었다.
베로는 그걸 아주 제대로 즐겼던 것 같다.
공포에 질려 필사적으로 달아나는 인간 사냥감을 쫓는 게임을 좋아했다는 의미다.
이 귀여운 얼굴의 뒷면에는 사나운 몬스터의 모습도 분명히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황진성을 실제로 공격하진 않았지만.
어쨌든 성 위에서 그 장면을 목격했던 슬라임들은 내 던전에 돌아와서도 베로와 술래잡기를 하며 놀기 시작했다.
물론 짜리몽땅한 놈들이라 열심히 달려도 금방 따라잡혀 버렸다.
그래도 베로는 충분히 재미있어하는 것 같았다.
한참 뒤, 베로가 나에게 다가와서 무릎에 턱을 올렸다.
그리고 입을 우물우물하며 이상한 소리를 낸다.
“우우웡. 우우우웅.”
“다 놀았어?”
“우어우우웅.”
“왜? 뭐가 마음에 안 들었던 거야?”
“워엉….”
잘 노는 것 같았는데 뭐가 문제였을까.
나는 베로의 부들부들한 검은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이것저것 물어보고, 반응을 살폈다.
그렇게 나온 결론은….
“설마 황진성이 보고 싶은 거야?”
“우어우어엉…!”
격하게 대답하는 베로.
황당하게도 이게 베로가 침울해진 이유였던 것이다.
“걘 이제 못 봐.”
“우워어어엉!”
구슬프게 한번 울부짖은 베로가 불쌍하게 꼬리를 추욱 내렸다.
그 일주일간의 일방적인 놀이가 정말로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자기 뒤를 쫓던 검은 짐승이 그리워하고 있다는 걸 알면 황진성은 식겁하겠지만.
나는 슬퍼하는 베로를 한참이나 다독여주어야 했다.
그리고 마계 정신 교육은 슬라임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는데….
“삐이이이!”
“삐이익!”
잠시 쉬려고 누운 내 얼굴에 차가운 병이 닿는다.
힐링 포션이었다.
안 보이는 곳에 숨겨놨는데 기어이 찾아 들고 온 것이다.
“아니… 난 괜찮아, 얘들아….”
“삐이이이이.”
“삐이이잇.”
내 말은 듣지도 않고 어서 먹으라는 듯 포션 병 입구를 앞다투어 내 입에 가져다 댄다.
“난 안 아파서 안 먹어도 된다니까….”
이 녀석들은 일주일 내내 기절한 황진성을 쪼물딱거리며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다.
그러면서 칼로스가 시킨 대로 포션을 먹여주고 상처에 뿌려 주기도 했다.
필요해서 시킨 일이었으나 이걸 일종의 놀이처럼 여긴 모양인지 내 던전으로 돌아와서도 자꾸 이러는 것이다.
“그래그래….”
슬쩍 포션 뚜껑을 닫고, 꼴깍 받아먹는 시늉을 했다.
슬라임들이 그제야 만족하여 까르르 웃는다.
좀 정신 사납긴 한데, 저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까 괜히 나도 웃음이 났다.
혼자 누워 쉬는 것도 좋지만 귀여운 애들이 꼼지락거리는 걸 보면서 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어차피 또 새로운 놀이를 찾으면 자기들끼리 놀 테니, 그전까지는 좀 놀아주지 뭐.
나는 포션을 먹어서 힘이 난 것처럼 벌떡 일어났다.
슬라임들은 또 까르르 웃으며 즐거워했다.
***
오늘은 조금 특별한 이벤트가 있는 날이다.
지금까지 온 적 없는 새로운 손님들이 이곳에 오게 된 것이다.
병아리들이 우는 것 같은 재잘대는 소리가 식당을 가득 채웠다.
“와아아. 신기하다!”
“이런 게 던전인 거야? 우와….”
“저기! 저기 봐봐! 반짝반짝해!”
아직 초등학교도 못 들어갈 나이의 어린아이부터,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로 보이는 아이들까지.
아이들이 던전 식당의 손님으로 찾아온 것은 헌터 관리국의 요청을 수락했기 때문이었다.
각성자의 나이대는 굉장히 다양하다.
일반적으로 2~30대의 젊은 층이 주로 각성하는데, 그보다 나이가 어리거나 많아도 각성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평균 각성 나이에서 멀어질수록 각성할 가능성이 낮다.
보통 50대가 넘어서 각성하는 경우는 현역으로 활동하지 않는다.
이런 경우 보통은 D~F급 수준의 각성 능력을 갖추고 있기도 하고, 평생 해본 적 없는 몬스터와의 싸움을 원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린 각성자들은 사정이 좀 달랐다.
그들은 꽤 높은 등급으로 각성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자라서는 당연하게 헌터로 활동할 것이었다.
뛰어난 헌터는 국가의 보물이나 마찬가지.
나라에서는 그들의 잠재력을 최대한으로 일깨우고 성장시켜야 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능력의 위험성을 모르고 날뛸 아이들을 제어할 필요도 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아직 덜 자란 아이들은,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 어른에 비해 미숙할 수밖에 없었다.
그 두 가지 역할을 모두 수행하는 기관이 바로 각성자 학교였다.
중학생 이하의 각성자들은 일반 학교가 아닌 각성자 학교에 다니며 학업과 훈련을 병행했다.
이들은 헌터들 중에서도 엘리트로 키워지는 아이들이었다.
내 던전을 찾아온 아이들은 총 7명으로, 서울시 소관의 초등학생 이하 각성자들이었다.
목적은 헌터라는 직업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던전의 환경을 미리 체험해보는 거였다.
훈련을 위한 동기 부여가 필요한 거겠지.
아이들은 한성 길드 휴게소를 둘러보고, 실제 사냥을 마치고 돌아온 헌터들을 만나고 난 다음 내 식당으로 들렀다.
원래의 목적은 다 끝났지만, 그래도 내 던전에 온 손님들을 그냥 보낼 수는 없는 법.
맛있는 점심을 만들어 줄 생각이다.
내가 고른 메뉴는 떡볶이였다.
흔하지만 대다수의 아이들이 좋아하는 무난한 음식이다.
‘시작해볼까.’
먼저 속이 깊은 프라이팬에 레비아탄 가루를 넣은 육수를 준비한다.
거기에 고추장과 간장, 설탕을 비율에 맞춰 넣고 불을 올렸다.
이제 끓기까지 다른 재료를 준비해야 한다.
‘다음은….’
“저리 비켜!”
톤이 높은 목소리에 집중이 깨졌다.
무슨 일인가 싶어 소리 나는 쪽을 보았다.
“싫어!”
“내 자리란 말이야!”
“싫어! 네가 가!”
내 허리쯤 올 것 같은 어린 여자아이 둘이 의자 하나를 두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옆에 널린 게 의자인데 왜 저거 하나 가지고 싸우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둘은 진지한 것 같다.
“자, 자, 여기 의자 하나 더 줄게. 싸우면 안 되지.”
눈썹이 아래로 처져 순해 보이는 여성이 아이들의 싸움을 중재하려 했다.
그녀는 아이들을 이끌고 온 각성자 학교 선생님이었다.
안타깝게도 아이들은 그 말을 전혀 듣지 않았다.
“싫어요! 이 의자가 제 거란 말이에요!”
“내 거라고!”
“이이이익!”
“자자, 얘들아. 이거랑 이거랑 똑같은 거야. 싸울 이유가 없어.”
그래도 씩씩거리며 가자미 눈으로 서로를 노려보던 두 아이.
그중 조금 더 큰 아이가 교사 몰래 혓바닥을 내밀며 고개를 흔들었다.
약이 오른 작은 아이가 화를 참지 못하고 손을 뻗었다.
그 손짓에 따라 공중에 물방울이 솟아났다.
동그란 물방울이 조금씩 커지면서 하늘하늘하게 펼쳐졌다.
그냥 물방울이 아니라 물의 정령이다.
그것도 하급 운디네가 아닌 중급 정령 운다인.
‘저 나이에 벌써 중급 정령을 다룬다고?’
아직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았을 것 같은 작은 아이인데, 꽤 능력 있는 정령사인 것 같다.
듣던 대로 어린 나이의 각성자들은 일반 헌터들에 비해 비범한 면이 있는 듯하다.
파앙!
운다인이 아이의 의도에 따라 공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목표물에 닿기 전에 투명한 벽에 부딪혀 튕겨 나왔다.
교사가 막아낸 것이다.
상처를 입힐 만큼 강한 공격은 아니었고, 위협에 가까웠기에 큰 힘을 쓰지 않고 쉽게 막아낸 것 같다.
“다은아! 선생님이 힘 함부로 쓰지 말라고 했지! 수업할 때만 쓰라고 했잖아!”
“그치만! 쟤가, 쟤가 먼저…!”
운다인은 크게 타격을 입은 것 같지 않았지만, 금방 사라졌다.
정다은이라는 아이가 울먹이면서 자연스럽게 힘이 빠진 것 같다.
공격당할 뻔했던 아이가 씩씩거리며 소리친다.
“엄마한테 다 말할 거야!”
“나도 말할 거야…!”
“네가 누구한테 말한다는 건데? 넌 엄마 없잖아!”
어린아이들은 때때로 지나치게 잔혹하다.
조금만 더 자라도 하지 못할 말을 저 나이 때는 잘못된 줄도 모르고 쉽게 내뱉어버린다.
“윤희수, 그만해.”
선생님이 엄하게 끼어들었다.
그러나 다투기 시작한 아이들은 제 할 말만 계속 내뱉었다.
“나도 말할 사람 있어!”
“거짓말! 정다은 또 거짓말한다. 선생님, 정다은 거짓말해요!”
“아니야!”
“있으면 누군지 말해봐!”
“있다고!
악을 쓰듯 소리치는 정다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그만 하라니까, 둘 다! 밖에 나와서까지 이럴 거야?! 내가 못 살아….”
선생이 버럭 화를 내자 아이들이 조용해졌다.
그녀는 골치가 아픈 듯 이마를 짚으며 눈을 감았다.
고생이 많아 보인다.
어찌 됐건 나는 하던 요리를 마저 해야 한다.
보글보글.
붉은 양념이 이미 끓고 있었다.
거기에 불려둔 떡과 아이들의 입 크기에 맞게 좀 작게 썰어둔 어묵을 퐁당퐁당 빠트렸다.
아이들이 몇 없는데도 식당은 시끌벅적하고 소란스러웠다.
던전 구경이라는 특별한 사건에 다들 많이 들뜬 것 같다.
다만 교사만은 무슨 일이 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아이들을 진정시키려 하고 있었다.
‘좀 도와줄까.’
산만한 분위기를 정리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집중할 거리를 만들어주면 된다.
나는 겉껍질을 벗기고 깨끗이 씻은 양배추 한 통을 위로 던졌다 받았다.
몇 번을 반복하고 있자니 아이들의 시선이 하나둘 이쪽으로 모인다.
휘익!
그 순간을 노려 높이 던진 양배추에 빠르게 식칼을 휘둘렀다.
조각난 양배추들이 투두둑 둥근 접시에 떨어졌다.
“우와아아아!”
아이들이 작은 손을 들고 짝짝짝 박수를 친다.
놀라고 감탄스러운 걸 보면 손을 마주쳐 소리 내야 한다는 걸 어디서 배웠나 보다.
교사 또한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묻는다.
“아니…. 사장님 이게 무슨 기술이에요?”
“제가 검을 쓰는 헌터였거든요. 별다른 능력이 없어서 그냥 이런 기술을 익히는 쪽으로 노력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어쨌든 대단하시네요.”
대충 얼버무렸더니 그럭저럭 넘어간다.
아이들은 입을 헤 벌리고 이쪽만 바라보고 있다.
또 뭔가 보여주길 기대하는 것이다.
이번에는 양파를 꺼내어 빠른 속도로 채 썰었다.
타타타타탁!
중간에 식칼을 한번 휘리릭 돌려주기도 했다.
아이들이 입을 헤 벌리고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요리보다는 서커스 하는 기분도 들기는 하는데, 그래도 한곳에 집중하게 만들어놨더니 산만했던 분위기가 좀 가라앉았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아까 물의 정령을 불렀다가 혼났던 아이가 혼자 구석에 가서 풀썩 주저앉아버린 것이었다.
울고 있는지 무릎에 고개를 파묻고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우선은 음식부터 완성하자.’
소스에 남은 재료를 모두 쏟아부었다.
아이들이 먹기 좋은, 맵지 않은 맛을 내기 위해 토마토소스를 조금 첨가했다.
보통은 케첩을 넣지만 그러면 특유의 신맛이 더해질 수 있기 때문에 토마토소스로 대체한 것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국물이 보글보글 끓고 떡볶이가 완성되었다.
숟가락을 들어 살짝 국물 맛을 봤다.
매운맛보다는 달짝지근하게 입에 달라붙는 맛이다.
애들이 딱 좋아할 것 같다.
여덟 개의 그릇에 떡볶이를 담았다.
삶아뒀던 계란도 한 개씩 얹고, 빨간 국물을 한 국자 떠서 위에 뿌려 주었다.
맛있는 냄새가 퍼져나가자 아이들이 코를 들고 킁킁거리는 게 보였다.
퍼포먼스를 보여준 이후로, 주방을 보며 얌전히 요리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맛에 대한 기대감까지 올려버린 것 같다.
트레이에 그릇을 옮겨 담고 식탁으로 옮겨주었다.
“완성됐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이리 주세요.”
교사가 일어서서 그릇 옮기는 걸 도와주었다.
10살쯤 될 것 같은 통통한 남자아이가 자기 앞에 떡볶이가 놓이자마자 젓가락을 움켜쥐고 떡을 찍었다.
“우영아, 잘 먹겠습니다, 인사부터 해야지.”
“잘 먹겠습니다!”
다급하게 선생님의 말을 따라 한 남자아이가 곧바로 떡을 입에 넣었다.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그 뒤를 따라 다른 아이들도 합창하듯 인사하고 떡볶이를 먹기 시작했다.
나는 쫀득한 쌀떡을 짭짭 씹는 우영이라는 아이에게 물어보았다.
“맛이 어때?”
“완전 맛있어요!”
입 안에 떡볶이를 가득 담고 우물거리면서도 즉시 대답한다.
다른 아이들도 입가에 소스를 잔뜩 묻히면서 열심히 입을 움직이고 있다.
모두 맛있게 잘 먹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덟 개의 그릇 중 두 개는 손도 대지 않은 채 덩그러니 식탁 위에 놓여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