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정령사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엘시스가 이해가 가지 않는 듯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정령왕인 본인을 소환할 수 있게 하는 정령석은 그녀의 입장에서는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일 것이다.
“이유라고 할 게 따로 있나. 굳이 불러낼 필요가 없으니까 그렇지.”
“갑자기 위험한 일이 생길 경우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지구와 아스키나 대륙, 그리고 마계.
이곳에서 현재 나보다 강한 존재는 없다.
엘시스도 알고 있겠지만, 정령왕 또한 내 상대가 되지 않는다.
말을 내뱉고 나서야 별 의미 없는 질문인 걸 알아챘는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효용성에 대해 어필한다.
“아니면 급하게 물이 필요해진다거나….”
“검이 주무기지만, 이런 것도 가능하거든.”
정신을 집중하자 공기 중에 주먹만 한 물방울이 생겨났다.
기본적인 수(水)속성 마법 정도는 할 수 있다.
“그럼 말동무로 부르시는 건 어떻습니까?”
“내가 그렇게 한가하지는 않아서 말이야. 그리고 불러내지 않아도 스스로 이렇게 찾아오는데, 이게 쓰일 일이 있을까 싶네.”
자잘한 일에 도움이 될 수는 있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엘시스가 반드시 있어야만 할 일은 없을 것 같다.
“그렇군요…. 필요가 전혀 없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과거 아스키나 대륙의 인간들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정령석을 굉장히 귀중한 물건으로 여겼고, 정령왕의 기운이 담긴 정령석을 얻은 자는 그 시대를 풍미하는 위대한 인물로 남게 되었습니다.”
엘시스는 진지한 표정으로 혼자 중얼거렸다.
“인간들은 저보다 강할 수 없으니 그랬던 거였겠습니다….”
당연한 것을 이제야 깨달은 것 같다.
“뭐, 받아둘 수야 있겠지만, 영 쓸 일이 없을 것 같은데, 창고에 썩혀두기보다 다른 필요한 사람한테 주는 게 어때?”
후루루룩.
그 와중에 엘시스는 핫초코를 한 모금 더 마시고 입을 열었다.
“…이제 대륙에는 별로 궁금한 게 없어서 말입니다. 사람도 많이 없고… 그만큼 정령 친화력을 가진 사람도 거의 없습니다. 게다가 겨우 평화를 되찾은 터라 모두들 일상을 유지하는 것에 모든 에너지를 쏟고 있습니다.”
“이제 보니까 겸사겸사 지구 생활을 해보고 싶었던 거네.”
“…그것도 맞긴 한데, 저는 정말 좋은 선물이라 생각했습니다….”
모험 활극 같은 걸 꿈꿨던 것 같은데, 그런 거라면 더더욱 나와 관계없는 일 아닌가.
나는 주로 던전에서 요리를 하며 시간을 보낼 뿐이니까.
“네가 직접 지구로 갈 수는 없는 건가?”
“그건 좀 어렵습니다. 시도하려면 해볼 수는 있겠지만, 힘이 너무 많이 소진될 겁니다.”
“요즘에는 지구에도 정령들이 많이 가지 않나? 정령사로 각성한 헌터들이 불러내곤 할 텐데.”
“그건 정령 친화력이 있는 정령사들이 차원의 통로 역할을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럼 별다른 힘을 쓰지 않고도 쉽게 드나들 수 있게 됩니다. 하급 정령들 중 요즘 지구에 소환되어다가 정령계로 돌아오곤 하는 아이들이 몇몇 있습니다. 지구의 정령사들과 계약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정령왕급을 소환할 수 있는 사람은 애초에 거의 존재하지 않아서….”
엘시스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식탁에 놓인 푸른 돌을 집어 들어 보았다.
“어쨌든 이 정령석이 정령사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거군.”
“네. 둘 다 차원 간의 매개체가 되어줄 수 있는 겁니다.”
“새로운 걸 알았네. 이런 게 있을 줄이야. 이걸 가지면 계약하게 되는 건가?”
“계약과는 조금 다른 개념입니다. 음… 정확한 개념은 아니지만 비유적으로 설명하자면, 정령석을 통해 소통하는 건 가벼운 친구 정도의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하지만 계약은 그보다 훨씬 끈끈하고 큰 의미를 지닙니다. 어쩌면 인간의 혈연관계보다 더 진할 수도 있겠습니다. 계약을 파기하는 건 서로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기 때문에….”
“너는 인간과 계약해본 적이 있어?”
“그렇습니다.”
엘시스는 먼 옛날을 회상하는 듯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미소 지었다.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단 세 번의 계약을 경험했습니다. 즐거운 일도, 힘든 일도 함께 겪었습니다. 그리고… 그 끝은 굉장히 고통스러웠습니다. 계약자들 또한 물질계의 존재. 자연의 섭리를 이길 수 없어 이별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처음 보는 씁쓸한 표정을 짓는다.
나는 그녀의 빈 컵을 핫초코로 다시 채워 앞에 내려다 주며 물었다.
“그래서 후회해?”
엘시스가 즉시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들은 저에게 가족이었습니다.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같은 선택을 하고 함께 시간을 보낼 것입니다.”
‘가족이라….’
그때, 떠오르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힘없이 터벅터벅 걸어가던 가냘픈 아이의 뒷모습이 생각났다.
“엘시스.”
“네?”
“너 어린아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좋아? 싫어?”
“어린아이… 많이 접해보지는 못했지만, 굉장히 귀여운 존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흠, 그래? 그럼 이건 어때?”
내 말을 귀 기울여 듣던 엘시스의 푸른 눈동자가 점점 더 초롱초롱해졌다.
***
정다은, 나이 6세, 사는 곳은 희망 보육원.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희망 보육원은 정다은의 집이자 세상이었다.
평범한 일상을 지내던 정다은에게 특별한 일이 생긴 건 3주 전이었다.
홀로 열심히 색칠 놀이를 하던 중에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아직 너무 어린 정다은은 대체 뭐가 평소와 다른 건지 정확히 집어낼 수 없었다.
그날따라 더욱 재밌게 느껴지는 색칠 놀이에만 더더욱 집중했다.
“꺄아아악! 다은아! 이게 뭐야!”
몇 분 후 선생님이 비명을 질렀다.
그제야 아이는 자신이 뭔가 사고를 쳤다는 걸 알아챘다.
방바닥 전체에서 문 바깥쪽까지 온통 물이 흥건했다.
심지어 아래쪽 벽면까지 몇 cm 젖어있었던 거로 봐서 물이 방안에 조금씩 차오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선생님과 큰 아이들이 몇 시간에 걸쳐 청소했다.
그다음, 정다은은 원장 선생님에게 따로 불려갔다.
그녀는 아이를 정말로 예뻐했다.
아이 또한 원장 선생님을 보육원에서 가장 좋아하고, 가장 따랐다.
그러나 그날은 딱딱하게 굳은 원장 선생님의 얼굴이 조금 무서웠다.
“다은아, 방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그 물은 어디서 들어온 거야?”
“모르겠어요.”
“창밖에서 누가 물이라도 뿌린 거야? 아니, 이것도 말이 안 되는 거지….”
“…….”
“그 방에는 한참 전부터 너밖에 없었는데… 네가 뭔가 한 거야? 아니면 누구랑 같이 장난이라도 친 거니? 솔직히 말해도 되니까 선생님한테만 말해봐.”
“진짜 저는 아무것도 안 했어요….”
원장 선생님이 한참 동안 더 물어봤지만, 모르겠다는 말밖에는 할 수 없었다.
그게 사실이었으니까.
큰 소리를 내지 않았음에도 그 분위기가 무서워서 정다은은 끝내 울먹거리고 말았다.
다음 날, 정다은은 선생님을 따라 처음 가보는 장소로 가게 되었다.
무서운 인상의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이것저것 하다 보니 아이의 앞에 물의 정령이 형체를 드러냈다.
무의식중에 소환해버린 물의 정령 운다인이, 전날 장난을 쳤던 것이었다.
희망 보육원에 각성자가 나타난 것은 설립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선생님들은 당황하여 이게 축하할 일인지 아닌지 논의하다가, 저녁에 케이크 하나를 준비해 손뼉을 치는 시간을 가졌다.
다른 아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케이크에만 정신이 팔렸고, 정다은 또한 마냥 즐거웠다.
혼날 때는 무서웠지만, 물의 요정 같은 존재가 신기하기도 했고, 축하해준다니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 후 주변 환경이 급격히 변했다.
자신과 비슷한 아이들이 모인다는 각성자 학교라는 곳에 가게 된 것이었다.
처음에는 새로운 환경이 신기하고 떨렸다.
보육원 아이들 외의 다른 친구들을 만나는 것도 기대되었다.
하지만, 그 기대는 첫날부터 산산이 조각났다.
“이거 봐라! 우리 엄마가 사준 건데 예쁘지?”
반짝거리는 핀을 가리키며 새침하게 자랑하는 또래의 여자아이.
“우리 엄마가 너무 잘 어울린다고, 공주님 같다고 했다?”
“…….”
“그리고 아침에 우리 엄마가 소시지 문어 모양으로 구워줬는데 너무 맛있었어. 우리 엄마 요리 잘하거든. 너희 엄마는 어때?”
“…….”
우리 엄마, 우리 엄마.
‘듣기 싫어.’
정다은은 두 귀를 그냥 막아버리고 싶었다.
대답하지 않는 정다은을 윤희수는 이상하게 바라보다 떠나버렸다.
친해지려고 말 거는 건데 무시한 게 잘못인 건 알았다.
엄마, 아빠 이야기는 듣고 싶지도 않고 하고 싶지도 않아서 어쩔 수가 없었다.
한때 정다은은 자기를 천사님이 데려다준 아기라던 원장 선생님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었다.
엄마, 아빠 같은 건 원래 없는 특별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도 이것저것 듣는 이야기들이 있었다.
보육원의 언니, 오빠들이 하는 말들로 원장 선생님의 말이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걸 어느 순간 알게 되었다.
그 순간, 세상 한가운데 홀로 떨어진 것 같은 극심한 외로움을 느꼈었다.
그래도 보육원에서만큼은 같은 처지의 아이들과 함께 지냈기에 일상생활을 할 때 그렇게 크게 다가오진 않았다.
그러나 지금, 각성자 학교에서 부모님이 있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어울리게 되니 상황이 달라졌다.
특히나 매일 엄마 얘기를 하는 윤희수 때문에 짜증 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순간순간 질투가 나고 부럽고 속상해서 울고 싶기도, 화를 내고 싶기도 했다.
결국 운다인으로 한 번 공격해버린 적이 있는데, 그때부터는 완전히 사이가 틀어지고 말았다.
던전 식당에서의 싸움은 그 연장선이었고.
오늘은 각성자 학교에서 일주일간의 합숙 훈련을 마치고 각자 집에서 휴식을 취하는 날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고, 정다은은 홀로 보육원에 돌아왔다.
‘뭔가 어색해.’
가족으로 여겼던 보육원 사람들과 묘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보이지 않는 벽 같은 게 생긴 것 같았다.
자신들과는 결이 다른 사람으로 여기는 것이었다.
어렸지만, 여러 아이들 사이에서 함께 지내왔던 정다은은 또래보다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게다가 이제는 대부분의 시간을 각성자 학교에서 보내게 되었다는 것도 큰 이유일 것이다.
각성을 기점으로 너무 많은 것이 바뀌었다.
정다은은 불안해졌다.
‘각성한 걸 취소할 수는 없나?’
물의 정령 운다인과는 말이 잘 통하지 않았는데, 그래도 의도는 어느 정도 전달되었다.
운다인은 자꾸 앞으로 함께하기로 약속하자는 의사를 보내왔으나 정다은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아이는 어렸지만 신중했다.
정령사는 이제 겨우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고, 각성자 학교에도 정령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
누구에게 물어보거나 기댈 수 없이, 스스로 판단해야 했다.
아직 6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에게 너무나 어려운 일이어서 계속 답을 주지 않고 있었다.
“다은아.”
그때, 선생님이 혼자 있는 아이를 불렀다.
“널 보고 싶어 하는 분이 계셔. 전에 던전 체험하러 갔던 날 기억하지? 그 던전 주인 아저씨가 다은이랑 얘기해 보고 싶대.”
“…저랑요?”
떡볶이가 맛있었던 던전이 금방 생각났다.
멋있고 친절했던 요리사 아저씨도.
정다은은 그와 둘이서 1시간가량 이야기를 나눴다.
아저씨는 정령과 능력에 대해 각성자 학교 선생님들도 해주지 못한 많은 조언을 해주었다.
그동안 궁금했는데 물어보지 못한 사소한 질문에 대한 답도 얻을 수 있었다.
마지막에는 아저씨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그는 정다은의 손등에 영롱한 푸른색 보석을 올려주었다.
푸른 보석은 피부에 스며들어 보이지 않게 사라졌다.
아저씨가 떠나고, 혼자가 된 정다은은 눈부시게 아름답고 놀라운 존재와 마주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