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뚱뚱이
제자리에 가만히 앉지 못하고 식당 홀을 돌아다니는 엘시스.
평소 우아하게 자리에 앉아 컵을 들던 것과 사뭇 상반되는 모습이다.
그녀는 혼자 무슨 생각을 하는지 킥킥 웃음 짓다가, 앉아 쉬고 있는 베로에게 다가가 친한 척 등을 쓰다듬기까지 했다.
처음 있는 일에 베로가 깜짝 놀라 고개를 퍼뜩 들었다.
첫 만남의 공격적인 태도가 무색하게 요즘 엘시스와 몬스터들은 꽤 괜찮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도 가볍게 아는 척하는 정도가 다였기에 이런 행동은 꽤 놀라운 모습이었다.
의외의 스킨십에 놀랐지만, 그게 나쁘지 않았는지 베로의 꼬리가 살랑살랑 위로 솟아올랐다.
다시 내 앞으로 다가온 엘시스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정말 귀여운 아이입니다. 너무 예쁘고 사랑스럽습니다. 쫑알쫑알 병아리처럼 말하는 것을 듣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 얘기 아까도 했던 것 같은데.”
“그렇습니까? 하지만 자꾸 얘기하고 싶습니다.”
정령석을 정다은에게 준 지 일주일째.
다시 찾아온 엘시스는 이제 먹는 얘기가 아니라 새롭게 만난 여자아이 이야기만 줄줄이 늘어놓았다.
정령계에서 다른 정령왕들이 더는 들어주지 않아서 나에게까지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아주 똘똘합니다. 고집이 좀 있긴 한데, 너무 순하기만 한 거보다 그 정도 성격은 있어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타고나길 선한 아이입니다.”
“그런 걸 알 수 있어?”
“정령 친화력이 높은 사람은 제가 꽤 정확하게 성품을 간파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라 더더욱 잘 보입니다. 정령 친화력도 정말 좋고, 아직 드러나지 않은 잠재력이 높아 보입니다. 제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빠르게 성장할 수 있을 테니까, 이대로 자라나면 어젠가 저와 계약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귀에 못이 박이도록 칭찬하고 있다.
객관적인 부분도 있겠지만 상당 부분 주관적인 평가가 섞여 있다.
단점조차 장점으로 돌려버리는 걸 보면 콩깍지가 씐 것 같기도 하고.
“어제는 윤희수라는 꼬맹이를 조금 골탕 먹여주었습니다. 어찌나 다은이를 놀리던지, 제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두 주먹을 불끈 쥐었던 엘시스가 내 쪽으로 눈길을 돌리며 덧붙였다.
“아! 물론 어린아이니만큼 크게 괴롭힌 건 아니니 오해는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그런 생각은 안 했어.”
수천 년을 살아온 정령왕이니 선을 넘을 정도로 분별력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때 엘시스가 무언가 느낀 듯 고개를 들었다.
“아, 다은이가 저를 부르고 있습니다! 현호 님,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얼른 가봐. 나도 더 못 들어주겠다.”
뒷말은 못 들은 척 꾸벅 인사한 엘시스가 증발하듯 자리에서 사라졌다.
엘시스가 떠나기 전 식탁에 내려놓은 컵을 들어 보았다.
“이걸 남기고 갔네.”
뜨거운 핫초코가 반이나 남아있었다.
지난번에는 맛있다며 탈탈 털어먹고 갔었는데.
정령석이라고 해서 소환이 강제적인 건 아니다.
정령왕인 엘시스는 그 부름에 응할 수도, 응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도 핫초코까지 남기고 이렇게 급하게 사라진 것이다.
온 신경이 정다은에게로 쏠린 것이 너무 눈에 보인다.
정령석을 아이에게 준 건 꽤 괜찮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엘시스나 아이에게나 서로에게 득이 되는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아직 어린아이에게 너무 강한 힘을 쥐여주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지금으로서는 걱정할 필요도 없을 것 같고, 만약 일이 생기더라도 내 선에서 제어할 수 있으니 문제는 없겠지.
내가 할 일은 그저 꾸준히 지켜보는 것뿐.
어떻게 살아가는지 가끔 안부나 확인할 생각이다.
***
최지수가 거실에 편하게 누워 TV를 보고 있다.
쉬는 날이면 늘상 저러고 있으니, 익숙한 광경이다.
그리고 그 옆에는 검은 케르베로스, 베로가 찰싹 붙어 누워있었다.
자기 덩치보다 큰 베로를 지수가 인형처럼 껴안고 쭈물거린다.
진짜 마음대로 주물럭거리는데도 베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커다란 고깃덩어리를 질겅거리느라 바쁘다.
“아유, 귀여워라.”
“우우웅….”
그 와중에도 대답은 착실하게 해준다.
그때 지수가 베로의 배를 툭툭 건드리면서 나를 보았다.
“오빠.”
“왜?”
“베로 살찐 것 같지 않아? 뭔가 더 많이 잡히는데?”
순간 베로의 입이 움직임을 멈추고 귀를 한번 펄럭였다.
우리 얘기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솔직히, 살이 좀 붙긴 했다.
엄청 뚱뚱해진 건 아닌데 원래의 모습에 비하면 조금 포동포동해졌다는 느낌이 있다.
어찌 보면 그냥 좀 듬직해진 것 같기도 하고….
살이 쪘다고 표현하기 직전의 미묘한 경계에 있는 것 같다.
“최근 많이 먹긴 했지. 활동량도 많이 줄었고.”
겨울이 온 후로, 최지수는 춥다며 평소보다 외출을 줄였다.
그 때문인지 베로는 조금 더 자주 집으로 넘어왔다.
종종 뜨끈한 방바닥에 몸을 지지듯이 누워있는 베로의 모습을 많이 목격했다.
요리할 때마다 옆에 붙으면 고기나 간식거리를 입에다 넣어주는데, 요즘 그 빈도가 늘기도 했고.
평소보다 많이 먹고 안 움직이니까 살이 안 찌는 게 더 이상하겠다.
“이거 봐. 이거, 이거. 볼살이 아주 두툼해.”
지수가 베로의 볼살을 양옆으로 쭉 당겼다 놓기를 반복했다.
“다리도 뭔가 통통해진 것 같고, 무엇보다도 여기.”
지수의 손이 베로의 배 쪽으로 이동했다.
탄탄해 보였던 배는 뭔가 조금 늘어진 것 같은 모양이었다.
“뱃살 좀 봐. 다른 데보다도 배는 좀 심한 것 같은데?”
최지수가 여기저기 건드는 동안에도 베로는 고기를 입에 문 채 미동도 없었다.
아니, 잘 보니 검은 동공이 흔들리고 있는 것 같다.
“촉감이 너무 좋다. 부들부들하고 몰랑거려. 자꾸 건드리게 되네.”
베로의 표정을 보지 못한 지수는 그저 뱃살 만지는 데 집중하고 있다.
“이제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응? 왜?”
나는 베로 표정을 좀 보라는 의미로 눈짓했다.
내 눈길을 따라간 최지수가 고기를 문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베로의 얼굴을 보았다.
“어? 베로!”
“…….”
“베로야!”
“…….”
원래라면 웅얼거리면서라도 대답해주는 녀석인데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다.
기분이 상한 것이다.
그러나, 그 모습에 최지수는 도리어 심장을 움켜쥐었다.
“으아아아! 귀여워!”
확실히 귀엽긴 했다.
그러나 저게 베로가 원한 반응은 아닐 것이다.
지수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싱글싱글하면서 베로의 궁둥이를 토닥였다.
“삐진 거야? 삐진 거지!”
“…….”
“귀여워어어어! 귀여워라, 우리 뚱뚱이~”
“……!”
툭!
베로의 입에 있던 고깃덩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명백히 충격받은 표정.
뚱뚱이라는 말이 치명적이었던 것 같다.
씩씩대며 콧김을 내뿜던 베로가 결국 벌떡 일어서더니 고개를 치켜들고 울었다.
“우우우어어어엉!”
“푸하하학!”
“푸흡!”
베로는 진지한 것 같은데, 웃음을 터트리지 않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두 사람이 다 웃어버리자 그게 더 서러운지 한 번 더 억울한 듯한 소리를 낸다.
“워우우어어어!”
“어이구, 그래그래. 누나가 잘못했어. 우리 베로 뚱뚱이 아닌데.”
“우어어우엉!”
“그냥 조금 통통한 건데, 그치?”
“워어우우어우!”
“그래도 귀여우니까 괜찮아.”
“우어우어웅….”
완전히 삐친 베로는 쉽게 마음이 풀리지 않아 한참을 토라져 있었다.
지수와 내가 같이 나서서 뚱뚱하지 않다고 몇 번이나 얘기해줘야 했다.
그제야 베로는 떨궜던 고기를 다시 입에 물었다.
***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식당을 찾아왔다.
“안녕하세요. 지금 식사 됩니까?”
점잖은 미소와 함께 말을 건넨 남자는 한성 길드의 길드장 한성진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심까!”
“안녕하십니까! 길드장님!”
한 자리 차지하고 식사 중이던 한성 길드원 3명이 벌떡 일어나 각 잡고 인사했다.
“안 일어나도 됩니다. 그냥 밥 한 끼 먹으러 온 거니까 신경 쓰지 않고 편하게 있어요.”
“옙!”
“예! 알겠습니다!”
우렁차게 대답하는 것이 전혀 편해 보이지 않는다.
전혀 강압적이지 않게, 부드럽게 말했음에도 상대방은 은근한 압박을 느끼는 것이다.
그런 반응을 의도한 건 아닌 듯, 한성진은 난처한 미소를 짓고 그냥 걸음을 옮겼다.
빨리 지나가 주는 게 맞다고 판단한 거겠지.
지금 상황에는 좀 맞지 않지만, 아마도 저런 면이 그가 길드를 이렇게까지 키울 수 있었던 능력 중 하나일 것이다.
계약 후, 식당에 들른 적이 없는 사람이라 속으로 조금 놀랐다.
하지만 티 내지 않고 나도 웃으며 인사로 답했다.
“안녕하세요, 길드장님. 식사는 당연히 됩니다. 여기 앉으세요.”
“조금 더 일찍 찾아왔어야 했는데, 시간이 잘 나지 않더라고요. 휴게소에는 몇 번 들렀지만, 식당에 와서 밥까지 먹을 시간은 도저히 나지가 않아서….”
“오늘은 여유가 생기신 모양이네요.”
“맞습니다. 기업과의 미팅이 있었는데 갑자기 취소됐거든요. 갑자기 한 시간이나 여유 시간이 생기니까 순간 뭘 해야 할지를 모르겠더라고요. 마침 점심시간이 다 되어서 오랜만에 밥이나 편하게 먹기로 했습니다. 여기가 가깝기도 하고, 길드원들이 맛있다는 얘기를 하도 많이 해서 꼭 먹어볼 생각은 항상 가지고 있었거든요.”
“잘 오셨습니다. 편하게 식사하고 좀 쉬다 가세요.”
“하하, 그럴게요. 이렇게 된 김에 진짜 쉬려고 비서도 떼어놓고 왔습니다. 이런 날도 하루쯤은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죠.”
한성진은 부엌과 마주 보는 자리에 앉았다.
사실, 여유가 생겨서 쉬러 왔다고는 하지만 이것도 완전한 휴식은 아닐 것이다.
나와의 관계도 엄연히 계약으로 연결된 관계.
시간이 생긴 김에, 겸사겸사 나와의 친분도 생각해서 찾아온 거라 봐야겠지.
결국 이것도 어느 정도는 일과 관련된 선택이라 볼 수 있겠다.
나는 한성진에게 물과 컵을 갖다주며 물었다.
“오늘 메뉴는 수제비인데, 어떻습니까? 혹시 다른 드시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주세요. 최대한 의견 반영해서 만들어드릴 테니까.”
너무 무난하고 수수한 메뉴인 것 같아서 뒷말을 덧붙였다.
4대 길드 중 하나인 한성 길드의 길드장.
사회적으로 이미 크게 성공한 사람이었다.
돈도 많이 벌었을 테고, 비싸고 유명한 음식도 많이 먹었을 것 같아서 뭔가 새로운 걸 원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한성진은 망설이지 않고 입을 열었다.
“수제비! 정말 좋습니다. 날도 추운데 딱 맞는 메뉴네요.”
“아뇨. 그래도 좀 더 맛있는 거로….”
“아닙니다. 수제비 얘기하시니까 진짜 먹고 싶어졌습니다. 저 특별히 고급스럽거나 대단한 음식을 선호하지는 않거든요.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하는 말인지 진심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항상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어서 속내를 읽어내는 게 쉽지 않은 사람이다.
한성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제가 제일 많이 먹는 건 샌드위치예요. 할 일이 많아서 먹는 데에 시간을 많이 쏟을 수가 없거든요. 먹으면서 일할 때도 종종 있고…. 사업차 고급 식당에 갈 일은 많지만 그럴 때는 또 마음 편하게 먹을 수가 없죠. 그냥 친숙한 음식, 편하게 한 끼 하는 게 딱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정도면 진심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잠깐 기다리세요.”
“네. 시간 있으니까 천천히 하셔도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