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겨울 간식
나는 수제비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미 육수는 가득 끓여뒀고, 밀가루 반죽 또한 충분히 숙성시켜두었다.
주문 후 요리를 내는 시간은 짧으면 짧을수록 좋은 법.
당연히 장사를 시작하기 전에 미리 준비해둔 것이다.
끓는 육수에 먹기 좋은 크기로 썬 감자를 먼저 넣어주었다.
다음으로는 잘 숙성되어 찰지게 늘어나는 수제비 반죽을 가능한 얇게 떼어내 국물에 퐁당퐁당 빠트려준다.
보글보글.
어느 정도 반죽이 익었을 때, 대파를 비롯한 채소 몇 가지를 더 넣어주면 완성이다.
“감사합니다. 맛있어 보이네요.”
싱긋 웃은 한성진이 수제비와 국물을 함께 떠서 후후 불었다.
뜨거운 김이 올라와서 안경을 흐리게 했다.
그러자 당황하여 안경을 벗고 다시 수제비를 먹는다.
일반인과는 다른 위치에 있는 사람 같은데, 밥 먹는 모습은 여타 다른 사람들이나 똑같다.
쫄깃쫄깃한 수제비지만 두께가 얇아 씹어 삼키는 과정이 불편하지 않다.
감자는 입에 넣자마자 부드럽게 부서질 정도로 포슬포슬하고, 묵직한 맛을 내는 뜨거운 국물 한입에 사르르 녹아 없어진다.
그리고 한두 입마다 김치 한 점씩 입에 넣어주면 수제비가 더더욱 입에 착착 감긴다.
한성진은 그 뜨거운 수제비를 금세 다 해치웠다.
그리고 조금 민망한 얼굴로 말했다.
“아, 너무 빨리 먹어버렸네요. 이게 일을 다 하려면 밥 먹는 시간을 줄여야 해서 급하게 먹는 습관이 생기는 바람에…. 고치려고 해도 잘 안 고쳐집니다. 저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니겠지만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던전에서 활동하는 수많은 헌터들도 같은 고충을 겪고 있다.
과거의 나도 마찬가지였고.
전투 식량으로 간단하게 끼니를 해결하지만, 언제든지 습격당할 위험이 있어서 그조차도 허겁지겁 먹어 치우는 게 현실이었다.
그리고 사실 이건 헌터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시간에 쫓기는 바쁜 직장인 중에서도 상당수가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한성진처럼 할 일이 많아서 식사 시간이 부족한 경우도 있을 거고, 주어진 피로에 찌들어 빨리 먹고 주어진 점심시간 동안 쉬기 위해서이기도 할 거다.
“그래도 휴게소를 이용하는 길드원들은 요즘 많이 좋아졌어요. 초반에는 소화불량에 시달린 헌터들도 몇몇 있었는데, 이제는 다 익숙해진 것 같습니다.”
내 말을 들은 한성진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길드원들 컨디션이 요 몇 달 동안 엄청나게 좋아졌다는 걸 저도 체감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제가 밀어붙이긴 했는데 제 생각 이상으로 많은 이득을 보고 있는 것 같군요.”
한성진은 계속 말을 이어가려 했으나, 나는 그의 앞에 있는 그릇이 텅 비어있는 것이 신경 쓰였다.
“수제비 좀 더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이 정도가 딱 양에 맞네요. 정말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럼 디저트는 어떠세요?”
디저트라는 말에 안경을 닦던 한성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디저트 들어갈 배는 있을 것 같군요.”
차나 한 잔 주려다가 그냥 물어본 건데 의외의 반응이었다.
“단 것도 괜찮으신 거죠?”
“네. 사실 아주 좋아합니다. 그렇게 안 보이는지, 이 얘길 하면 다들 한 번씩 더 물어보더군요. 저는 아메리카노보다도 시럽을 듬뿍 넣은 바닐라 라떼를 좋아하는데 말입니다.”
아메리카노만 마실 것 같은 이미지이기는 하지만, 음식 취향이 외모와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한성진에게 내어 준 디저트는 겨울철이면 빼놓을 수 없는 간식, 호떡이었다.
“이건 호떡인가요?”
“맞습니다.”
누가 봐도 호떡인데 한성진이 되물은 것은, 길거리에서 종이컵에 넣어 파는 호떡과 조금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물론 맛있지만 나는 호떡에 한 가지를 더 추가했다.
위에 바닐라 아이스크림 한 스쿱을 얹은 것이다.
호떡 맛도, 아이스크림 맛도 모두 이미 알고 있을 테지만 이 두 가지를 합치면 또 이렇게 색다른 간식이 된다.
사실 아는 사람은 아는 조합인데 한성진은 처음 보는 듯 신기해했다.
“이렇게 나오는 건 처음 봅니다. 특이하네요.”
한성진이 나이프를 들었다.
바삭한 호떡 두 개 중 하나를 가르자 꿀처럼 녹은 설탕이 끈적하게 흘러나왔다.
“진짜 오랜만에 먹어봅니다. 어릴 때는 많이 사 먹었었는데. 요즘엔 이렇게 고급스럽게도 나오나 보군요.”
“단 걸 좋아하시면 입에 딱 맞을 겁니다.”
한입에 넣을 수 있는 크기로 조각난 호떡 위에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한 스푼 올린다.
그걸 한꺼번에 입에 넣은 후 맛을 음미한다.
“오….”
감탄한 듯 작은 소리를 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맛 괜찮죠?”
“제 입에 딱 맞습니다. 단맛과 단맛이 더해져서 더 달아졌는데, 또 그게 다른 느낌의 단맛이라 그렇게 과하지도 않네요.”
“거기다 호떡의 바삭하고 쫄깃한 식감과 아이스크림의 차가움이 더해져서 더 다양한 맛을 느낄 수 있지요.”
“확실히 그렇네요.”
한입을 더 먹은 한성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맛있습니다.”
항상 여유 있게 웃는 얼굴인 그였으나, 지금의 미소는 진짜였다.
이제 진짜 휴식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아까보다 더 편안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전해 들으셨을지 모르겠는데, 휴게소의 효과가 엄청납니다. 기대 이상으로요.”
“구체적인 건 전달 못 받았습니다. 그냥 겉으로 보기에도 잘 돌아가고 있다는 건 보이지만요.”
“금전적인 효과는 물론이고, 한성 길드의 인지도 또한 엄청나게 높아졌습니다.”
“그거 다행이네요.”
그만한 가치를 했다니 듣기 좋은 얘기였다.
돈을 준다니 받긴 했는데 만약에라도 받은 만큼의 가치를 못하면, 법적으로는 잘못이 없을지라도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을 것이다.
“사실… 던전 식당과의 계약 이전에는 4대 길드 중에서도 다른 길드에 비해 조금 밀리는 면이 있었습니다.”
4대 길드라고 묶어 얘기하지만, 사실 영웅 길드가 규모나 인지도 면에서 조금 떨어지는 건 나도 알고 있었다.
던전 식당 계약을 하는 데 그런 부분이 크게 중요한 건 아니었기에 그냥 진행했지만.
“그런데 이제는 신입 헌터들이 가장 선호하는 길드에 한성 길드가 1위로 올라섰어요. 휴게소 때문에 부상 인원이 현저히 줄었거든요.”
“들어 보니, 일반인들도 이제 한성 길드를 복지가 좋고 안전한 길드라는 인식하는 것 같더라고요.”
최지수가 주변에서 들은 얘기였다.
“실제로 그걸 체감하고 있어요. 지금 신입 길드원 모집을 시작한 지 겨우 이틀째인데 반응이 대단하거든요. 아직 초반인데도 지난번 전체 지원자 수의 2배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거기서 추려낼 생각을 하면 머리가 아프긴 한데….”
“즐거운 고민인 것 같은데요. 그래도 그만큼 인재가 많을 테니까요.”
“맞습니다. 배부른 소리죠. 자랑하려고 꺼낸 이야기였습니다.”
한성진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던전 식당과 계약한 지 몇 달 지나지도 않았는데 단기간에 엄청난 효과를 보고 있습니다. 그때 계약 참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짜고짜 찾아왔는데 수락해주신 것도 감사하고요.”
“서로 이해가 맞아서 진행한 건데 감사할 게 어디 있겠습니까.”
“사실만 따지고 보면 그렇긴 합니다만… 개인적으로는 고마운 마음이 듭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한성 길드는 몇 달 전만 해도 침체기였습니다. 겉에서 볼 때는 모르지만, 내부적으로 삐걱거리는 일들이 있었거든요.”
한성진이 포크와 나이프를 놓으며 말했다.
어느새 그릇이 텅 비어있었다.
“생각해보면 저도 조금 지쳐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성 길드를 만든 지 벌써 12년이 지났거든요.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한번 최고로 키워 보자, 우리는 뭐라도 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 하나로 시작한 일이었죠.”
우리라는 것이 S급 헌터 성민혁과 한성진이라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래도 S급 헌터와 함께 시작했으니까 충분히 가능성은 보였던 것 같은데요.”
“네. 그게 자신감의 원천이었죠. 그런데 이게 그냥 힘이 있는 것과 사업은 아예 다른 거더라고요. 쉽게 보고 시작했던 거죠. 사실, 몰라서 시작할 수 있었던 겁니다.”
옛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재미있는 듯 한성진이 피식 웃음 지었다.
“의견이 안 맞아서 싸우기도 많이 싸웠고, 한성 길드가 완전히 파산할 위기도 여러 번 있었는데 어떻게 여기까지 오긴 했네요.”
“12년이면 우여곡절이 없을 수가 없는 세월이군요.”
“그렇죠. 그땐 힘들었는데 다시 떠올려보면 그만큼 재미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는 너무 안정된 데다가, 더는 성장이 힘들 것 같아서 회의를 느끼고 있었는데… 그때 이 던전의 존재를 알게 되었죠.”
“타이밍이 좋았군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한성진의 입가에 항상 걸려있던 잔잔한 미소가 사라졌다.
본적 없는 진중한 얼굴로 그는 말을 이었다.
“덕분에 더 큰 목표가 생겼습니다.”
“더 큰 목표요? 여기서 더 올라갈 데가 있나요?”
“한성 길드를 대한민국을 넘어서는 세계적인 길드로 키워볼 생각입니다.”
대격변은 전 세계적으로 거의 동시에 발생했다.
각성자의 등장 시기 또한 비슷했다.
때문에 사회가 안정을 되찾고 길드가 생겨나는 과정 또한 큰 차이가 없었다.
길드는 사업이나 마찬가지로, 각성자 개개인의 역량으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마석이나 부산물 등을 처리하는 데에 다른 기업과 연계도 필수였기 때문에 아무래도 강대국들의 성장이 더 빠를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의 시장도 꽤 컸지만, 그래도 세계를 논하기에는 조금 부족한 실정이었다.
“야망이 엄청나신데요.”
조금 기분 나쁠 수도 있는 말에 한성진은 순순히 인정하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저도 12년간 생각해본 적 없는 목표입니다. 옛날에는 제 시야가 그렇게 넓지 않았기 때문이고, 최근까지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서 염두에 두지도 않았죠. 던전 식당을 발견하기 전까지는요. 아직은 까마득히 멀어 보이지만, 사장님께서 저희와 계속 함께해주신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일 겁니다.”
의지가 엿보이는 말이었다.
어찌 보면 계약 관계인 나에게 저런 말을 하는 건 손해가 될 수도 있는 일.
내가 과도한 요구를 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도, 진실성을 보이는 것이 괜찮게 느껴졌다.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길드장님이라면, 한성 길드를 더 키울 수도 있을 것 같네요.”
계약이 만료되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
확답은 할 수 없으니, 조금 여지를 남기는 대답으로 마무리 지었다.
한성진도 그저 이야기를 풀어놓은 것뿐인지 자연스럽게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며 일어섰다.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식사도, 디저트도 맛있었습니다.”
“저도 즐거웠습니다.”
“사실 이런 얘길 하려고 온 건 아닌데… 저도 모르게 생각하고 있던 것이 튀어나왔네요.”
“그만큼 편하게 쉬었던 거 아닐까요?
“하하, 맞는 것 같네요. 다음에 또 시간이 나면 꼭 여기로 와야겠군요.”
“그땐 다른 디저트를 만들어드릴게요.”
“그럼 시간이 나면 올 게 아니라, 시간을 내서 와야겠는데요.”
“언제든지 환영이죠.”
처음 봤을 때보다 눈빛이 좋아졌다.
마치 20대 청년처럼 생기있고 또렷해진 느낌.
아무래도 새로운 목표가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이룰 수 있을지 없을지를 떠나, 목표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삶에 활기가 생기니까.
식당을 떠나는 한성진의 발걸음은 한층 더 힘차 보였다.
***
“삐이이?”
“삐이익!”
“삐이이이잇!”
내 앞에 줄지어 선 슬라임들이 콩알 같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간식을 좋아하는 녀석들이다.
모처럼 만든 호떡을 나눠주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요즘엔 요령이 생겨서 설거지 속도도 더 빨라졌다.
정령계로 흘려보내는 그릇의 수도 절반 정도로 줄었고.
어차피 떠내려가 봐야 물의 정령들이 다시 가져다주기 때문에 별문제 될 게 아니긴 하다.
어쨌든, 기특한 일은 맞다.
“뜨거우니까 천천히 먹어.”
“삐이!”
호빵이에게 호떡 하나를 주자 두 손으로 받고 꾸벅 인사를 한다.
뒤에 서 있던 만두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와 또 호떡을 주었다.
그렇게 하나씩 호떡을 받아 간 녀석들이 둥글게 자리 잡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양손에 호떡을 쥐고 볼이 빵빵해지도록 입에 밀어 넣는다.
완전히 호떡에 정신이 팔린 걸 보면 이것도 역시 입에 잘 맞는 것 같다.
그리고 쟁반에는 아직 남은 호떡이 세 개 있다.
이 호떡은 베로의 몫으로 가져온 것이다.
평소라면 당장 다가와서 달라고 기다리고 있었을 놈인데 오늘은 베로의 반응이 좀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