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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먹어 (69/125)

69화. 일단 먹어

베로는 구석 자리에서 고개를 돌린 채 엎드려있었다.

뭘 먹을 때 이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는데….

걱정되는 마음에 접시를 들고 다가가 보았다.

“베로. 몸이 안 좋아?”

“우웅…….”

진짜 어디가 아픈 건가.

나는 호떡 접시를 바닥에 내려두고 베로의 머리를 직접 잡아 들었다.

“…!”

침을 뚝뚝 흘리고 있는 베로의 얼굴에 깜짝 놀랐다.

얼굴을 대고 있던 곳에도 침 자국이 흥건하다.

“먹고 싶은데 참았던 거야?”

“우어어엉!”

서럽게 울고 다시 고개를 푹 숙인다.

씰룩거리는 콧구멍이 향하는 방향은 내가 내려놓은 호떡이 있는 곳.

하긴 냄새가 얼마나 달짝지근하게 맛있는데….

침이 줄줄 나올 만하다.

왜 이러는 건지 예상은 된다.

엊그저께 들었던 뚱뚱이 소리 때문일 것이다.

그거 말고는 먹고 싶은 걸 이렇게까지 참고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

베로가 우는 소리에 슬라임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호떡을 쥔 채 짧은 다리로 여기까지 달려온다.

“삐이?”

“삐이이이!”

“삐이이잇!”

반쯤 먹은 호떡을 서로 주겠다며 베로에게 들이댄다.

슬퍼 보이니까 맛있는 음식을 나눠주겠다는 것이다.

기특하긴 한데, 안타깝게도 이 행동은 베로를 더 괴롭게 만들 뿐이었다.

“워우우우우!”

슬픔의 하울링을 하는 베로의 눈가가 촉촉하다.

이거 아무래도 안 되겠다.

나는 호떡 하나를 들어 베로의 입가까지 가져다주었다.

“베로야, 그냥 먹어.”

“우우우….”

“먹어도 돼. 다이어트는 내가 시켜줄 테니까.”

그 말에 베로가 내 눈을 올려다본다.

“뚱뚱한 게 싫으면 먹고 더 많이 움직이면 되는 거지.”

“워우우우웅….”

이놈 이거, 움직이기가 싫다는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요즘에는 마계에도 통 나가지 않는 것 같다.

아무래도 누워 지내는 것에 너무 익숙해진 것 같다.

‘이대로는 안 되겠는데.’

이런 생활 방식이면 뭘 먹든 안 먹든 돼지가 되는 건 시간문제다.

귀엽기야 하겠지만, 건강 생각하면 안 될 일이다.

어떻게 해야 예전처럼 다시 돌아다니는 데 흥미를 붙일까.

곧바로 떠오른 것이 하나 있긴 했다.

공포에 질려 전속력으로 도망가는 사람을 쫓는 놀이.

칼로스가 황진성을 쫓아다녔던 그 일주일간 베로는 정말 신나 했고 그만큼 많이 움직였다.

다시 그를 보면 펄쩍펄쩍 뛰어다닐 게 틀림없다.

물론 황진성은 거품을 물고 기절할지도 모르겠지만.

‘황진성을 한 번 더 데리고 올까?’

잠깐 이런 생각이 들었으나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요즘도 대광 정육점을 찾아갈 때면 종종 황진성을 볼 수 있는데, 꽤 성실하게 지내는 중인 것 같다.

베로에게는 좋겠지만,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영 좋지 못한 일이니 신중해야겠지.

“우우우우….”

베로가 구슬픈 소리를 내며 호떡 앞에 머리를 툭 내렸다.

“일단 먹어, 먹어.”

입 앞에 가져다주자, 망설이던 베로가 결국 덥석 호떡을 물었다.

너무 불쌍하게 굴어서 매몰차게 할 수가 없다.

일단 이건 먹이고, 방법은 다시 생각해봐야겠다.

***

황진성은 오싹한 감각에 몸을 떨었다.

‘갑자기 또 왜 이러지?’

이유 없이 온몸에 소름이 돋았고 섬뜩하기까지 했다.

최근 종종 있는 일이긴 한데 방금은 좀 심했다.

병원에 한 번 가봤지만 별다른 이상은 없다고 했다.

각성으로 인해 좀 예민해져서 생기는 반응일 수도 있으니 좀 더 그냥 지켜보라고 했었지.

‘별거 아니겠지.’

황진성은 팔뚝을 쓱쓱 문지르고 이 문제에 관해서는 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상한 환청이 들리는 일도 요즘은 많이 줄어들었으니, 이것도 나아질 것이다.

그때 황진규가 그를 불렀다.

“진성아, 여기 정리 좀 해줘.”

“알겠어, 형.”

착실하기 짝이 없는 대답에 황진규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황진성이 각성한 지 약 두 달째.

처음엔 변화한 모습이 놀랍고 기쁘면서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도 있었다.

그러나 아직 황진성은 단 한 번도 형에게 대드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전에 말했던 대로 검정고시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었다.

워낙 기초가 없어서 점수가 잘 나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공부를 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대견한 일이었다.

그는 친구들, 친한 손님들에게까지 진성이가 철들었다는 얘기를 여기저기 하고 다녔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목격할 때마다 황진성은 내심 수치스러웠다.

‘완전 찌질해 보이잖아.’

황진성에게는 세 보이고, 멋있어 보이는 게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그래서 없어 보이고 찌질해 보이는 것만큼 싫은 것도 없었다.

하지만 어쩌겠나, 이상하게 형이 뭐라고 하면 꼼짝도 못 하고 들을 수밖에 없는 것을.

생각과 행동의 괴리에 혼란스러워하는 중에 황진성의 핸드폰이 울렸다.

이예준.

가출했을 때 같이 어울렸던 친구였다.

“여보세요.”

- 야, 황진성. 요즘 왜 안 보이냐? 뭐 하고 살길래 이렇게 코빼기도 안 보여?

“…왜? 무슨 용건 있어?”

- 아니, 그냥 뭐 하고 사는지 궁금해서.

“형네 가게에서 일하고 있다.

- 일을 한다고? 갑자기? 고기 같은 거 만지기 싫다고 하지 않았나? 완전 웃기네. 크크크크크!

“…….”

그런 얘길 했던 게 기억나서 비웃는 소리에도 뭐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한참을 비웃던 이예준이 키득거리며 말했다.

- 에이, 그럼 그렇지. 별 희한한 소문이 돌길래 설마설마했는데 아니었네, 역시.

“소문? 무슨 소문?”

- 아니, 말도 안 되는 건데, 너 각성한 거 같다는 얘기가 있었거든.

“뭐?”

각성 직후 사고를 치고, 일주일 정도 기억을 잃고 나서는 정육점 일만 돕는 중이었다.

어디 가서 각성했다는 얘기를 한 적도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인가.

“누가 그랬는데?”

- 김철형 알지? 예전에 잠깐 너랑도 어울렸던. 그놈이 네가 헌터 협회에서 나오는 걸 봤다고 했거든. 걔가 그 동네 살잖아. 잘 못 본 거 아니냐고 했는데 확실하다고 하도 우겨서 다들 긴가민가했어. 하필 그때쯤부터 네가 안 나타나기도 했고.

이게 용건이었구나.

이예준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나는 믿지도 않았다. 네가 각성은 무슨 각성이냐. 그런 건 특별한 사람한테나 있는 일이지.

자존심을 건드는 말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놈은 은근히 자신을 무시하고 꺼내라는 식의 말을 많이 했었다.

대놓고는 아니라 은근히라서 지적하기도 애매한 방식으로.

욱하는 마음에 황진성이 딱딱하게 대꾸했다.

“아니. 나 각성한 거 맞아.”

- 뭐? 헛소리하지 마. 네가 무슨 각성이야. 그게 아무나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크크큭.

“진짜라니까. 그것도 B급이고, 스카우트 받은 적도 있어.”

각성 등급 테스트 이후, 어떻게 안 건지 길드에서 먼저 연락이 오기도 했다.

그래도 미성년자니까 공부가 우선이고, 던전에 들어가는 건 위험할 것 같으니 좀 더 생각해보자는 형의 의견에 따라 답변은 미뤄둔 상태였다.

몇 번 더 말이 오가고 나서야 이예준이 점점 황진성의 말을 듣기 시작했다.

- …진짜야?

“그래. 눈앞에서 보여줄 수도 있다니까.”

- 그럼 지금 나올 수 있냐?

“지금? 글쎄….”

- 되면 되고, 아니면 아닌 거지 글쎄가 뭐냐?

“아직 일하는 중이라서…. 형한테 물어보고 되면 나갈게.”

- 형한테 물어본다고? 완전 범생이가 따로 없네. 크크크. 그럼 물어보고 다시 연락해. 아, 맞다. 그리고 내 보조배터리 네가 가져갔던 거 맞지?

“그거 나한테 있는 거 같다.”

- 올 때 그거 챙겨 와라. 필요한데 안 보여서 한참 찾았잖아.

“어어. 알겠어.”

대충 전화를 끊은 황진성이 조금 망설이다 정육점으로 돌아갔다.

오전에 손님이 꽤 많았는데 지금은 많이 한산하다.

원래도 혼자 하던 정육점이고, 지금도 보조로 돕기만 하기 때문에 꼭 황진성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니었다.

“형. 있잖아. 나 잠깐 나갔다 와도 돼?”

“뭐? 어디?”

조심스러운 질문에 칼을 정리하던 황진규가 동생을 돌아봤다.

“그게, 친구가 잠깐 보자고 해서….”

“친구?”

잠깐 황진규의 눈이 가늘어졌다.

질 나쁜 친구들와 어울렸던 일을 떠올리는 것이다.

황진성이 변명하듯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내가 물건 빌렸는데 안 돌려줬었거든. 그거 지금 달라고 해서 돌려주고 올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형에게 거짓말은 할 수 없었고, 이건 거짓말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굳이 가출했을 때 만난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거나, 능력을 보여주러 간다는 말을 덧붙이지 않았을 뿐이지.

그때 황진규가 입을 열었다.

“갔다 와.”

생각보다 흔쾌한 허락에 황진성이 깜짝 놀랐다.

“어! 진짜?”

“그래. 동안 계속 일 돕고, 공부도 열심히 했으니까 조금 쉬는 날도 있어야지. 너무 늦게만 들어오지 말고.”

“알겠어. 일찍 들어올게.”

이런저런 잔소리도 많이 붙지 않았다.

그간 꾸준히 좋은 모습을 보여서 이제 완전히 신뢰를 얻은 듯했다.

황진성은 오랜만에 들뜬 마음으로 약속 장소를 향했다.

***

“야, 미친. 대박이네.”

이예준은 입을 헤 벌린 채 황진성을 보았다.

스르르륵.

바로 옆의 키 작은 가로수에서 새롭게 자라났던 가지가 다시 제자리를 찾아 돌아갔다.

“이제 믿냐.”

“이걸 보고 어떻게 안 믿겠어! 너 진짜 대단하다!”

이예준의 태도가 바뀌었다.

각성자의 능력을 눈앞에서 본 것이 처음이니 놀랄 만도 할 것이다.

특별할 것도 없이 나뭇가지 하나 움직이는 약한 능력 하나 보여줬을 뿐인데, 반응이 장난 아니다.

이예준이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야, 혹시 무슨 특별한 방법 같은 거 있어? 각성하기 직전에 평소랑 다르게 뭔가를 했다든가. 혹시 뭔가 관련 있는 게 있을 수도 있잖아. 방법 좀 알려주라.

“방법은 무슨. 그런 거 없어. 그냥 어느 순간 힘이 느껴지더라고.”

“이야…. 힘이 느껴진다고? 그게 대체 무슨 느낌이냐? 대단하다, 진짜.”

거만한 대답에도 이예준은 계속 감탄했다.

은근한 무시가 완전히 사라졌고, 오히려 부러워하는 것에 황진성은 점점 우쭐해졌다.

***

그리고 며칠 후, 황진성은 이예준의 전화를 다시 받았다.

- 내가 너한테 좋은 거 하나 소개해줄까?

“뭔데?”

- 나 아는 형님의 아는 형님이 알려주신 건데, 각성자들을 모으는 조직이 있대.

“각성자들을 모은다고?”

- 어. 알잖아, 좀 불법적인 쪽으로 활성화된…. 내가 듣기로는 거기 제일 윗선이 각성자인데 그중에 A급 각성자도 있다더라고. 음지에서 돈도 많이 굴려서 들어가면 제대로 대우해줄 거래. 혹시 아는 사람 중에 이쪽으로 관심 있을 만한 각성자 없냐면서 물어보던데 네가 생각나서 말이야.

음지에서 활동하는 각성자들의 조직.

각성하자마자 생각했던 것이었다.

머릿속에 각자의 능력을 발휘하며 부하들을 거느린 검은 조직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사이에 자연스럽게 검은 정장을 입은 자기 모습을 끼워 넣어보았다.

꽤 멋있는 그림이 그려진다.

- 어때? 좋은 기회 아니냐?

“…아무래도 나는 형 하는 일을 도와야 해서….”

- 이런 미친! 진짜 찌질하게 구네.

“아니, 그게 좀….”

- 야, 그냥 만나기만 해봐. 어차피 네가 원한다고 해서 무조건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래. 그쪽에서도 면접을 거쳐서 뽑는 거라서.

“…….”

- 야, 됐다 됐어. 이번에 특별히 뽑고 있다는데, 싫으면 어쩔 수 없는 거지. 나중에 다시 소개해달라는 소리는 하지 마라.

제안하던 놈이 갑자기 확 뒤로 물러나니까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한 번 만나기라도 해볼까?”

- 뭐야, 만나보려고?

“어. 그냥 면접만….”

- 그래. 그럼 내가 얘기 전달해놓을게. 조만간 부를 테니까 시간 빼놔. 급하게 사람 구하는 것 같았거든.

“알았어.”

황진성은 이예준과의 전화를 끊었다.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잘하는 짓은 아닌 것 같은데, 마음속의 로망 같은 것이 있었기에 확 끊어내기가 어려웠다.

그렇다고 진짜 뭔가 나쁜 짓을 할 생각은 아니었다.

면접을 보면서 분위기만 구경해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황진성은 몰랐지만, 악의가 아닌 호기심이었기에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것이었다.

만약 진심이었다면 세뇌의 효과로 오히려 시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며칠 후, 황진성은 이예준에게서 약속 시각과 장소를 전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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