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반성
“사, 살려줘어어어…!”
황진성은 번쩍 눈을 떴다.
익숙한 천장이 보인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황진성은 이마에 흥건한 식은땀을 닦았다.
또 그 검은 짐승이 나오는 악몽을 꿨던 것 같다.
이번 꿈에서는 진짜 입 안에까지 들어갔다 나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앉은 채 조금 시간을 보내자 두근거리던 심장도 어느 정도 진정됐다.
몸이 편해지고 나니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내가 왜 집에 있는 거지?’
그 조폭 놈들에게 붙잡혀 꼼짝없이 끌려갔던 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눈을 떴을 때 집에 있다는 건 누군가 그를 집으로 옮겨놨다는 것이다.
‘대체 누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아무리 상황을 파악하려 해도 제대로 유추할 수가 없었다.
황진성은 일단 생각하기를 그만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쨌든 무사히 집에 돌아온 것만으로도 다행인 상황이다.
끼익.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아무도 없을 거로 생각한 문 앞에 누군가 떡하니 팔짱을 끼고 서 있다.
그의 형, 황진규가 야차처럼 무시무시한 눈으로 황진성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황진성은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갑자기 목이 타서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 이 순간 중요한 것은 형이 뭘 어디까지 알고 있느냐는 거였다.
그를 말 없이 쳐다보던 황진규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황진성.”
“혀, 형….”
“나는 네가 진짜 철든 줄 알았다.”
이 한마디로 알 수 있었다.
황진규는 황진성이 뭘 하고 왔는지 다 알고 있는 거였다.
물론 진짜 호기심에 구경만 하려고 했던 거라는 속내는 모르고 있을 것이고.
아니, 사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든 그런 위험한 곳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갔다는 것 자체에 문제가 있겠지만.
그래도 황진성은 어떻게든 변명을 해야 했다.
“형, 내 말 좀 들어봐. 뭔가 오해가 있는데…….”
“이제 정신 차리고 알아서 잘할 줄 알고 믿었던 건데, 그 믿음을 이렇게 배신해?”
“아니야. 내가 진짜 뭐 나쁜 짓을 하려고 했던 게 아니라….”
“아무래도 말로만 꾸짖고 넘어갔던 게 내 실책이었던 것 같네.”
우드득.
황진규는 양 손가락을 번갈아 누르며 소리를 냈다.
“자, 잠깐만. 내가 다 설명할게. 우리 말로….”
“말로 할 기회는 지금까지 너무 많이 줬던 것 같다.”
“형! 그게 아니라…!”
퍼억!
단단한 주먹이 황진성의 뺨에 정통으로 꽂혔다.
몸싸움하며 자라나는 다른 형제들과 달리, 황진규가 동생에게 주먹을 쓴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정육 일로 다져진 탄탄한 팔근육과 거친 주먹의 위력은 황진성이 상상하던 것 이상이었다.
‘개쎄네….’
고개가 돌아가는 와중에 든 생각이었다.
이후 황진성은 그 아픈 주먹에 반항 한 번 못하고 일방적으로 얻어맞아야 했다.
능력을 쓰면 충분히 몸을 보호할 수 있고, 반격하여 손쉽게 상황이 반전될 수도 있겠지만, 이제 그런 선택지는 황진성의 머리에 떠오르지조차 않았다.
그저 좀 억울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오늘 일을 진심으로 반성할 수밖에 없었다.
***
칼로스는 뻥 뚫린 성의 창문을 통해 바깥을 내려다보았다.
마계의 땅이 그의 시야에 훤히 들어왔다.
“아아아아악!”
“살려줘!”
“히이이익! 어, 엄마아아!”
손가락만큼 작아 보이는 인간들이 그의 땅에서 열심히 달리고 있다.
거기에 요란한 비명은 덤이다.
“이게 맞는 걸까.”
칼로스가 심란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본래도 평화롭기만 한 곳은 아니었다.
몬스터들 간의 크고 작은 싸움들은 당연히 있었고, 섭리에 따라 서로 먹고 먹히기도 하는 곳이 바로 이 마계였다.
하지만 몬스터 간의 목숨을 건 서열 싸움과 지금의 상황을 똑같이 취급할 수는 없었다.
“워우우우우!”
흥을 참지 못하고 하울링 하는 베로의 소리가 널리 울려 퍼졌다.
베로는 이 인간을 쫓다가 저 인간을 쫓기를 반복하면서 온종일 뛰어다니는 중이었다.
인간들은 지쳐서 쓰러지기도 하고, 베로에게 물려 뼈가 부러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쪽저쪽으로 흩어져 포션을 마구 뿌려주는 슬라임 인간들 때문에 얼마 쉬지도 못하고 다시 일어나 도망을 쳐야만 했다.
칼로스의 영역이 베로의 놀이터이자 인간 사냥감들의 훈련소 같은 것이 되어버린 거다.
인간 한 명 교육하는 것 정도는 칼로스도 꽤 재미있게 할 수 있었다.
색다른 경험이기도 했고, 초월자가 이제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것 같은 느낌도 받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과연 이렇게 정신 사나운 일이 단 한 번이 아니라 계속해서 주기적으로 발생한다면?
처음 한 번은 그냥 특별한 일로 생각했는데, 지금 상황을 보면 이런 일이 반복될 가능성이 상당히 컸다.
홀로 턱을 쓰다듬던 칼로스가 옆을 보며 물었다.
“너는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지?”
가장 가까이에 서 있던 스켈레톤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크르륵. 크륵!”
“흐음. 그래….”
“크르르르…. 큭!”
“오호…. 이런 분위기도 나쁘지 않은 것 같나?”
“크륵, 크륵!”
스켈레톤은 칼로스가 내심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었다.
놀랍게도, 스켈레톤들은 칼로스의 생각 이상으로 충심이 깊고, 주인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스켈레톤에게 둘의 힘을 가늠할 수 있는 능력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주인의 태도로 봤을 때, 그 인간이 주인보다 강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정도는 하고 있었다.
종종 찾아오는 강한 인간에게 허세를 부린다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 못 본 척했던 것뿐이었다.
부하의 대답을 들은 칼로스의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하긴 보모 노릇만 하는 것보다는 이런 게 훨씬 좋긴 하지.’
약간 억지스럽긴 하지만 칼로스는 점차 현재 상황을 납득해갔다.
어차피 싫은 마음이 들어도 초월자에게 반항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크르르륵!”
적절한 타이밍에 스켈레톤이 차라리 즐겨보라는 충심이 담긴 조언을 해주었다.
“그래. 이런 기회를 통해 초월자가 아닌 다른 인간들을 다루는 기술도 더 향상시킬 수 있는 거겠지.”
“크륵! 크륵!”
“알겠다. 그럼 다녀오마.”
“크르르르르!”
아까보다 표정이 한결 편해진 칼로스가 검은 날개를 활짝 펼치며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
서울의 어느 경찰서.
여느 때와 같이 아침 일찍 출근하던 이민철 순경은 희한한 장면을 목격했다.
당황한 그는 눈을 몇 번이나 깜빡이고 비비적거렸다.
“……이게 뭐지?”
경찰서 정문 앞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상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읍읍읍!”
“으으읍!”
“우우우웁!”
대여섯 명의 사람이 마치 가판대 위의 생선처럼 엎드려 꿈틀거리고 있었다.
두 팔은 등 뒤로 묶여있고, 두 다리도 구속된 것 같다.
테이프로 입이 막혀 뭐라고 하는 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기괴하기까지 한 모습에 이민철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무슨 상황인지 전혀 파악할 수가 없다.
자신이 함부로 손댈 일이 아니라고 판단한 그는 당장 경찰서 안으로 뛰어 들어가며 소리쳤다.
“경장님! 밖에 저거 뭡니까?”
“밖에 저거? 뭔 소리야?”
“밖에 사람들 묶여있는 거요!”
“사람들이 묶여있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네. 정문 앞에 대여섯 명이 묶여서 누워있습니다. 들어올 때 못 보셨습니까?”
“나도 방금 들어왔는데, 뭐 이상한 거 없었는데?”
“이, 일단 나와서 한 번 보십시오! 말로 설명을 못 하겠습니다.”
“아니,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빨리요!”
손영신 경장은 이민철 순경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 일단 급해 보였기 때문에 서둘러 일어섰다.
“여기! 여기 좀 보세요, 경장님!”
뒤따라 나간 경장은 순간 말을 잃었다.
이민철 순경이 말한 그대로 손발이 묶인 사람들이 땅에 널브러져 있는 것이었다.
이 사람들이 피해자인지 아니면 어떤 사건에 연루된 인물들인지도 알 수 없었다.
인질처럼 보이기도 해서, 경찰을 공격하기 위한 함정 같은 게 아닌가 하는 의심도 생겼다.
날이 이렇게 밝은데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지는 않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
“이 순경, 조심해. 천천히 주변 살펴보면서 접근해보자고.”
“알겠습니다.”
조심스럽게 쓰러진 사람들에게 다가간 두 경찰은 혹시 누군가 남겨둔 메시지가 있는지까지 확인했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이, 일단 얘기부터 들어보자.”
경장이 가장 가까이에 있는 남자의 입에서 청테이프를 뜯어냈다.
찌이익!
“아아아악!”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고등어처럼 퍼덕거렸다.
그 고통이 자신의 입에도 느껴지는 것 같아 이민철 순경도 덩달아 인상을 찌푸렸다.
손영신 경장이 침착하게 그에게 물었다.
“누구십니까?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 거죠?”
입이 아픈지 입술을 한참 꿈틀거리던 남자가 불안하게 눈을 굴리며 겨우 입을 열었다.
“저, 저는 흑룡파 간부 강태호입니다. 자수하러 왔습니다.”
“뭐라고요?”
“…자수하러 왔다고?”
두 경찰이 제 귀를 의심하며 서로 마주 보았다.
“이 순경. 방금 이 사람 흑룡파라고 한 거 맞아?”
“저도 그렇게 들었습니다…. 경장님, 이거 장난치는 거 아닙니까?”
“장난을 누가 이따위로 쳐? 자료 들고 와서 진짜 강태호 맞는지 확인부터 해봐.”
“알겠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 되는 일인가….”
이민철이 혼잣말하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한 사람도 아니고 무더기로 자수하러 왔다는 것도 이상하고, 자수하러 왔다면서 묶여있는 건 더 이해가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게 진짜라면 아주 중요한 일이다.
흑룡파는 꽤 오래전부터 경찰들의 골머리를 썩이는 조직이었다.
자잘한 사건, 사고를 지속해서 일으키며 경찰서를 들락거렸는데, 또 큰일로 들어오는 일은 없었다.
심증적으로는 분명 일을 치고 있는 것 같은데, 꼬리가 영 잡히지 않았다.
얼마 전에는 클럽에서의 난동으로 잔챙이들을 한 무더기 잡아 온 일이 있었으나 내부에서 싸움이 일어났던 것으로 결론 났다.
이민철이 긴가민가하며 자료와 자신을 강태호라 주장하는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그 횟수가 늘어날수록 그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경장님! 맞습니다. 강태호 맞아요!”
“진짜? 진짜 강태호라고?”
“네. 확실합니다. 광대뼈 이렇게 튀어나온 거나, 코 옆에 점, 삐뚤어진 치열까지 정확히 일치합니다.”
“이거 대박인데. 내가 다른 놈들도 확인하고 있을 테니까 너는 안에 들어가서 이놈들 둘러업을 만한 사람 아무나 몇 명 더 데리고 나와. 이 상태에서 계속 조사할 수는 없으니까.”
“네!”
놀랍게도 경찰서 앞에 쓰러져있던 흑룡파 조직원들은 모두 각성자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조직에 각성자가 포함된 것 같다는 의심은 있었으나, 증거는 없었고, 그 수가 이렇게 많을 거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경찰서 내부는 한참 동안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각성 능력을 갖춘 특수 경찰이 그들을 감시했고,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헌터 관리국에 지원 요청까지 했으나, 조직원들은 특별히 능력을 쓰거나 반항하지 않았다.
자수하러 왔다는 말 그대로 얌전히 그간 저질렀던 범죄를 줄줄 불었을 뿐이었다.
심지어는 조직과 커넥션이 있는 정치권, 검경 고위직 인물까지 스스로 밝혔다.
물론 그 말이 사실인지는 조금 더 면밀한 조사가 필요할 것이다.
손영신 경장은 맞은 편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인 강태호를 보며 목을 까딱까딱하며 풀었다.
“그래. 뭐, 다 알겠어. 묻는 말에 아주 그냥 다 대답을 해주네. 살다 살다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야.”
“…….”
“근데 다른 건 다 바로 대답하면서 대체 왜 이러는 거냐는 말에는 왜 아무 말도 못 해?”
“그게… 그건 진짜 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