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움직이는 젤리
“허, 참. 조직에서 무더기로 몰려와서 자기가 잘못했다고 술술 자수하는데, 그 이유를 모르겠다고?”
“네….”
강태호는 억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계속 그렇게 뻗대 봐라. 내가 너 같은 놈들 한두 번 상대하는 줄 알아?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고.”
손영신 경장이 팔을 걷어붙이며 결연하게 말했다.
그러나 사실 강태호는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며칠 간의 기억이 증발한 것처럼 사라졌다.
문득 이상한 검은 잔상이 떠오를 때면 소름이 돋고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기까지 했다.
또한 무조건 자수하고 진심으로 반성해야 한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이는 강태호뿐만 아니라 함께 자수하고 있는 흑룡파의 다른 각성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손영신 경장을 비롯한 여러 경찰들이 집요하게 달라붙었으나, 이렇게 자수하는 동기에 대해서만큼은 아무리 추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경찰들은 이능력이 개입된 거라는 추측을 할 수밖에 없었다.
***
해가 완전히 지고, 가로등이 켜지는 밤 시간대.
매일 그렇듯이 오늘도 TV에서는 또랑또랑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흑룡파에서는 오래전부터 김동우 의원을 비롯한 고위 공무원들과 밀접한 거래가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김동우 의원 측에서 아는 바가 없다며 모든 혐의를 부인하고 있습니다. 또한 조직원 중에는 각성자가 다수 포함되어 있었으며…….]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핸드폰을 보던 최지수가 힐끗 TV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조폭 얘기야? 요즘에도 저런 게 있나.”
“그랬나 봐. 뉴스에 나오는 거 보니까.”
핸드폰만 보고 있는 줄 알았는데 꽤 흥미로운 뉴스였는지 어느새 바로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너무 이상하다. 자기들이 단체로 자수를 했다고? 무슨 협박이라도 받았나?
“…….”
거기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최지수도 답을 바라고 물은 건 아닌지 혼자 이런저런 추측을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협박이라기보다, 전에 황진성에게 썼던 방법을 그대로 이용했을 뿐이었다.
베로를 위해 뭘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중에 헌터 관리국 송혜연에게 연락이 왔었다.
근황 얘기를 하다가 얻은 사소한 힌트를 파고들어 흑룡파에 대한 정보를 좀 얻었다.
추측이지만 각성자가 있는 것 같다는 말에 이거 괜찮겠다 싶었다.
그렇게 황진성을 대신할, 명분 있는 사냥감을 좀 찾기 위해 한 일이었는데 관련 뉴스가 몇 날 며칠 방송되고 있다.
그냥 잔챙이들이 아니라 이래저래 많은 게 엮여있었던 것이다.
겸사겸사한 일인데 생각보다 큰 건이었던 것 같아서 당황스러울 뿐이다.
“조직에 각성자들도 있었다고 했지? 헌터로 먹고살면 되는데 왜 저런 데 들어갔대?”
화면은 다음 뉴스로 넘어갔는데 최지수는 아직도 그 사건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글쎄. 뭔가 이유가 있었겠지.”
“돈을 엄청나게 많이 주는 건가.”
지수는 혼자 결론을 내렸지만, 사실 좀 순진한 생각이었다.
이에 관해서는 어제 연락 온 송혜연에게서 들은 게 있었다.
놈들은 꽤 악랄한 방식으로 각성자를 조직으로 끌어들였다.
머리 굵은 정상적인 성인은 애초에 그쪽으로 발을 들일 일이 없다.
그러니 뭘 잘 모르는, 갓 각성한 미성년자를 꼬여내는 것이 놈들의 방식이었다.
돈을 빌려주어 목줄을 채우거나, 신상을 털고 가족으로 협박하여 빠져나갈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시작되는 조직 생활은 해가 지나면서 여러 일로 서로 얽히고 얽혀 결국 배신하는 것이 불가능해지게 된다.
우연히 마주친 황진성은 아마도 그 첫걸음을 내디디고 있었던 듯하다.
일이 생기기 직전에 내가 발견하고 꺼내왔으니 의외로 운이 좋은 녀석이었다.
생각보다 큰일이 되긴 했지만, 어쨌거나 내 목표는 달성했다.
일주일 정도 원 없이 사냥놀이를 한 베로는 살이 많이 빠진 상태였다.
퉁실퉁실했던 살이 탄탄하게 올라붙어 전보다 더 듬직해진 느낌이었다.
먹는 것에 비해 그렇게 살이 많이 찌는 것도 아니고, 한바탕 뛰어주고 나면 다시 원상복구 되는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할 체질이었다.
평소에 양껏 먹고 종종 기회 생길 때 이런 식으로 운동시켜주면 괜찮을 것 같다.
“오빠, 베로는 뭐해? 여기로 부르면 안 돼?”
텔레파시가 통한 건지 마침 최지수가 베로 얘길 꺼냈다.
“안 될 건 없지.”
“요즘 살 많이 빠진 것 같은데 다시 먹을 거 좀 줘도 될까?”
뚱뚱하다고 놀린 이후로, 베로는 최지수에게 한동안 삐져있었다.
좋아서 꼬리를 흔들며 다가갔다가도 갑자기 고개를 홱 돌리며 토라졌는데, 아마도 놀림 받았던 생각이 떠올라서 그런 듯했다.
가장 쉽게 마음을 풀고 달랠 방법이 바로 맛있는 음식을 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바로 삐진 이유인 살과 직결되는 거라 얼마 동안 자제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많이 풀린 것 같지만 그래도 조금 더 마음을 얻기 위해 간식을 이용하고 싶은가 보다.
“베로야!”
나는 허공에 게이트를 열고, 베로를 불렀다.
타닥타닥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빠르게 가까워졌다.
멀리서부터 달려온 베로가 작게 짖으며 거실로 불쑥 머리를 내밀었다.
“웡…!”
평소처럼 똘망똘망한 눈빛이 아니라 절반쯤 눈꺼풀이 덮여 게슴츠레하다.
초저녁부터 깊이 잠들었던 모양이다.
“베로! 이리와. 누나가 맛있는 거 줄게!”
최지수가 벌떡 일어서서 부엌으로 걸음을 옮긴다.
그러다 갑자기 멈칫하며 다시 베로를 돌아보았다.
“응? 엉덩이에 저거 뭐지?”
그 말에 베로의 궁둥이 쪽을 보았다.
뭔가 있다.
정확히는 오른쪽 허벅다리 쪽에 푸른 주머니 같은 게 대롱대롱 달려있다.
‘이런….’
슬리임 하나가 두 주먹으로 베로의 털을 꽉 쥐고 매달려 있는 것이다.
콩알 같은 두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돌리는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얼떨떨해 보이는 것이, 자기도 어쩌다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 같다.
아마 찰싹 붙어서 자던 중에 갑자기 일어나 달리는 베로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을 것이다.
나는 베로의 엉덩이 쪽에 달린 슬라임을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그제야 뭔가 있다는 걸 느낀 베로가 뒤로 고개를 돌렸다가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웡! 웡웡!”
전혀 눈치를 못 챘던 것 같다.
이렇게 둔한 녀석이 아닌데, 최고로 깊은 단잠을 잤었나 보다.
베로에게 딸려온 슬라임 얼굴을 자세히 보니, 눈이 좀 크고 얼굴이 동글동글한 게, 세 슬라임 중에서도 만두였다.
“이게 뭐야? 인형? 베로 장난감이야?”
최지수가 대수롭지 않게 물으며 슬라임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와, 무슨 젤리 같네? 몰랑몰랑해.”
지수가 감촉에 감탄하여 한 번 더 찌르려는데, 슬라임이 한발 늦게 소리를 냈다.
“삐이이, 삐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조금 놀랐는지 짧은 두 팔을 뻗으며 내 품에 엉겨 붙었다.
“꺄악! 뭐야! 움직이고 있어!”
최지수는 만두가 진짜 인형인 줄 알았던 듯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무릎을 조금 넘을 정도의 크기니까 조금 큰 인형으로 오해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나를 제외한 셋이 각자의 이유로 깜짝 놀란 상태였다.
내가 나서서 상황을 정리하고 진정시킬 수밖에.
나는 옷자락을 붙잡고 삑삑 소리를 내는 만두의 등을 토닥이고, 어리둥절 당황해하는 베로를 진정시켰다.
동시에 최지수에게는 슬라임에 대해 말해주었다.
“이게 슬라임이라고? 내가 아는 거랑은 다르게 생겼는데?”
“음, 그냥 좀 특이한 종류라고 보면 돼. 어쩌다가 데리고 있게 됐어.”
“무슨 젤리 같아. 엄청 귀엽게 생겼다.”
만두는 이제 놀라움이 아닌 호기심으로 동그랗게 눈을 뜨고 있었다.
두리번거리는 녀석의 팔뚝을 최지수가 거의 무의식중에 쭈물거리는 중이었다.
몬스터라는 생물에 대한 두려움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긴 베로의 외형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애가 슬라임을 무서워할 리도 없지.
어느 정도 몬스터 무서운 줄은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 싶지만, 일상에서 일반인이 몬스터를 마주할 일은 거의 없으니 관계없겠지.
그간 집에 슬라임들을 데리고 오지 않은 것은 안전상의 이유가 컸다.
슬라임은 마계의 몬스터 중에서도 거의 최약체라고 볼 수 있다.
웬만한 위험은 스스로 이겨낼 수 있을 만큼 강한 베로와는 완전히 달랐다.
내 던전 안은 안전하지만, 바깥세상은 주의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슬라임들은 내 말을 잘 따르지만 호기심이 강한 편이다.
만약을 위해 던전과 칼로스의 영역 이외에 활동 범위를 더 넓히지 않는 게 좋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그리고 슬라임 인간 셋이 각자 집을 돌아다니면 제대로 지켜보기 어려울 것 같다는 이유도 있었다.
어느새 만두는 내 품이 아니라 최지수의 무릎 위에 있었다.
최지수가 신기한 듯 조몰락거리는 손길을 얌전히 받아들이면서 초롱초롱한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아무래도 던전과 집은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새로운 세상을 하나 더 목격하게 되었으니 신기하기도 할 것이다.
그 모습에 마음이 약해졌다.
‘어쩔 수 없나.’
모르면 몰랐지 이런 곳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던전으로 돌려보내도 계속 궁금해할 거다.
그냥 집까지 제대로 보여주는 게 나을 것 같다.
세 슬라임은 매일 자기들끼리 삑삑거리며 소통하니까 만두에게만 특별대우를 해줄 수는 없다.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말했다.
“던전에 두 마리 더 있어.”
“더 있어?”
최지수가 눈을 빛내며 고개를 들었다.
눈빛에서 빨리 데리고 오라는 압박이 느껴진다.
게이트 안으로 발을 디디자 높은음의 소리가 들려왔다.
“삐이이이!”
“삐이이잇!”
나머지 두 녀석이 갑자기 사라진 만두를 찾아 여기저기 헤매고 있었다.
‘그 생각까진 못했네.’
베로야 혼자 따로도 잘 다니지만, 슬라임 삼총사는 따로 떨어지는 법이 거의 없다.
같이 붙어서 자고 있던 애가 보이지 않아서 많이 몰랐을 거다.
나는 둘이 손을 꼭 잡고 던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던 호빵이와 찐빵이를 동시에 들고 집으로 데려왔다.
“삐이이이!”
“삐이이잇!”
“삐이이이익!”
거실에 내려놓자마자 호빵이, 찐빵이, 만두가 서로 얼싸안고 빙글빙글 돌았다.
사실 만두는 그냥 새로운 환경과 사람을 신기해하고 있다가 얼떨결에 뛰는 것 같다.
베로도 그걸 보고 덩달아 신나 혼자 빙글빙글 돌았다.
나는 최지수에게 슬라임들을 정식으로 소개해주었다.
지수는 처음엔 작명 센스가 그게 뭐냐고 한마디 들었지만, 조금 뒤에는 이름이 잘 어울린다고 말을 바꿨다.
그리고 금방 호빵이와 찐빵이와 만두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부터 집이 조금 더 복작복작해질 것 같다.
***
벌써 새해가 되고도 한 달이 더 흘러 설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헌터들에게는 명절이라고 특별할 게 없다.
그들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몬스터를 처리하기 위해 사냥을 나가야만 했다.
던전의 몬스터들이 한국의 명절에 맞춰 쉬어줄 리가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나 또한 그 일정에 맞추어 설날에도 식당을 영업하기로 했다.
어차피 찾아갈 친척도 없고 특별히 다른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돌발 게이트가 열려서 다수의 한성 길드원들은 설 연휴까지 포함한 3일 내내 휴게소에서 숙박하며 사냥을 하는 일정이었다.
오늘의 메뉴는 당연히 떡국이었다.
예상 가능한 메뉴지만 그렇다고 준비하지 않으면 아쉬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