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해장
새해에 떡국을 먹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희고 기다란 가래떡은 장수를 상징하고, 떡을 썰었을 때의 둥글납작한 모양은 엽전을 뜻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 가래떡이 들어간 떡국을 설날에 먹으면서 올해도 풍족하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실제 영향이 있는 건 아니겠지만 의미를 되새기며 먹으면 한결 더 좋지 않을까.
“좋은 아침입니다!”
“사장님, 안녕하세요~”
이른 아침부터 한성 길드 사람들이 줄줄이 식당으로 들어왔다.
유희진, 고영한, 그리고 신입 헌터 오재영, 배현지까지, 모두 아는 얼굴들이다.
조금 전까지 잠잠하던 홀이 금세 왁자지껄해졌다.
“저희 때문에 명절까지 고생 많으십니다, 사장님.”
“고생이랄 것까지 있나요. 늘 하던 일 하는 것뿐인데. 고생은 헌터님들이 하시죠.”
오재영이 메뉴판을 보고 소리쳤다.
“오, 떡국!”
“역시 떡국을 준비하셨네요. 너무 맛있겠다.”
유희진이 입맛을 다셨다.
헌터들은 익숙하게 부엌과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나는 그들에게 뜨거운 떡국을 한 그릇씩 퍼주었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뽀얀 국물에 흰 가래떡이 동동 떠 있었다.
가운데에 소고기, 계란지단, 김 가루를 소복이 올려 보기에도 맛있어 보이는 떡국이었다.
“잘 먹겠습니다.”
“오늘도 잘 먹겠습니다!”
담백한 국물과 간이 된 고기와 고명이 어우러져 딱 알맞게 간이 맞춰진다.
쫀득한 가래떡은 씹을수록 입에 감긴다.
“으음!”
“역시 맛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떡국을 먹는 모습을 나는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가끔은 내가 맛있는 걸 먹는 것보다, 내 요리를 맛있게 먹는 사람을 보는 게 더 기분 좋은 것 같기도 하다.
한참 잘 먹던 오재영이 자기 그릇을 내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기분 이상하네요. 몬스터랑 사냥하다가 떡국이라니. 선배님들은 항상 이렇게 새해를 맞이하셨겠군요…. 앞으로는 저도 가족들이랑 집에서 먹는 떡국보다 이게 더 익숙해지겠죠?”
아련하게 말하는 그를 보고 유희진이 헛웃음을 흘렸다.
“항상 이렇게 보냈을 리가 있겠어?”
“아, 그, 그렇죠? 아무리 그래도 설날인데 최대한 집에서 가족들이랑 보내는 게 맞겠네요. 오늘은 하필 돌발 던전이 떠서….”
“흠, 그 얘기가 아니었는데?”
“네? 그럼….”
“원래는 설날마다 몬스터 사냥하다가 몰래 숨어서 전투식량을 허겁지겁 먹었다는 말이었지. 떡국이라니, 나 때는 상상도 못 했어. “
“아, 그런 의미로….”
“떡국은 먹어본 지도 4년? 아니, 5년 정도 된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이상하게 설날마다 돌발 던전이 많이 생겨서 아예 쉴 틈이 없었네. 설날이고 떡국이고 신경도 안 쓰고 살았어.”
“맞아. 거의 항상 몬스터랑 새해를 맞이했던 것 같네.”
고영한이 입가에 미소를 띤 채 거들었다.
옛날 생각이 났다.
헌터가 된 후에 나도 딱히 명절을 챙겨본 적이 없었다.
어디 소속된 건 아니었지만 먹고 살려면 쉬는 날도 거의 없이 움직여야 했으니까.
나와 비슷한 처지인 사람들과 하급 고블린을 피해 맛없는 전투식량을 꾸역꾸역 삼키곤 했었지.
“그거 좀 서글픈 이야긴데요.”
선배들의 얘기에 오재영과 배현지가 차마 웃지 못하고 숙연하게 입을 열었다.
“서글플 거 있나. 이제는 사냥하면서도 따뜻한 밥 먹고, 편안한 침대에서 잘 수 있는데. 뭐, 항상 그런 건 아니지만 우리는 설날에 운 좋게 휴게소를 이용할 수 있는 던전에 걸렸잖아.”
한성 길드에서 사냥 가는 던전과 연결할 수 있는 게이트는 단 두 개뿐.
다른 한성 길드원들은 오늘도 몬스터들 사이에서 설날을 보내야 한다.
거기다 한성 길드 소속이 아닌 다른 수많은 헌터들은 그걸 당연하게 여기고 있을 것이고.
어쨌거나 신입 헌터들은 정말 운이 좋았다.
내가 한성 길드와 계약할 시기에 길드원이 되어, 비교적 편하게 활동을 하고 있으니까.
유희진도 같은 생각인지 신입 헌터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나 때도 이런 휴게소가 있었으면 진짜 너무 좋았을 것 같은데. 너희는 진짜 타이밍 맞게 잘 들어왔다. 등급도 다른 사람들보다 빨리 올릴 수 있을 거야. 쓸데없이 낭비하는 시간이나 체력이 거의 없이 효율적으로 경험치를 쌓을 수 있으니까.”
“그런가요? 빨리 등급 오르면 진짜 좋겠는데.”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성장 속도가 더 빨라. 지금도….”
도란도란 얘기하면서도 떡국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최지수가 부엌에서 손을 털며 걸어 나왔다.
떡국이 만들기 복잡한 것도 아니라 사실 크게 도울 일은 없는데, 심심하다고 돕겠다고 해서 식당 보조로 부른 거였다.
“오빠, 재료 손질 다 했어. 또 뭐 할 거 있어?”
“당장은 없는데. 좀 쉬고 있어.”
“베로랑 잠깐 놀다 올까?”
“마음대로.”
그때 이쪽을 헌터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일손이 많이 필요할 때는 고영한과 신입 헌터들의 도움을 받았지만, 평소에는 주방 일을 돕는 사람 따로 없이 나 혼자서 일한다.
최지수가 왔던 것은 한성 휴게소를 열었던 첫날뿐인데, 그때 이 사람들은 식당에 오지 않았다.
완전히 처음 보는 얼굴이라 궁금한가 보다.
오재영이 조심스럽게 나에게 물었다.
“옆에 분은 누구….”
“제 동생입니다. 오늘 도와주겠다고 왔어요.”
“최지수라고 합니다!”
최지수가 끼어들어 인사했다.
“아, 사장님 동생분이시구나. 그러고 보니까 닮은 것 같아요.”
“저희는 한성 길드 헌터들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저도 반가워요!”
오빠가 헌터였어도, 실제 사냥하고 돌아온 헌터들을 직접 만나는 건 일반인으로서 쉽게 경험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지난번에는 주방 일이 너무 바쁘고 정신없어서 홀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최지수는 한성 길드 헌터들과 자연스럽게 통성명하며 몇 마디 말을 나눴다.
콜록.
유희진이 고개를 돌려 캑캑거렸다.
“급하게 먹지 말고. 그러다 체해.”
“급하게 먹은 거 아니거든. 콜록콜록.”
고영한이 자연스럽게 물을 따라 건넸고, 유희진이 그걸 받아 마셨다.
배현지가 걱정하며 물었다.
“괜찮으세요?”
“어후, 갑자기 사레가 들려서. 미안. 신경 쓰지 말고 먹어.”
“천천히 꼭꼭 씹어 먹어.”
“그러고 있다니까.”
고영한과 유희진이 평소처럼 티격태격했다.
떡국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니, 이상하게 대가족이 모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바쁘게 헌터 생활을 하던 시기 이전에도 설날은 단출하게 보냈다.
부모님이 모두 살아계셨던 아주 어렸을 적 이후로 항상 지수와 둘이서 떡국을 먹었다.
지금은 그게 익숙하고 편해졌는데, 이런 복작복작한 분위기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길드원들은 그릇을 다 비우고 일어섰다.
“잘 먹었습니다. 덕분에 설날을 설날답게 보낸 것 같아요.”
“맛있게 드셔서 저도 좋았습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볼게요. 잠깐 배 꺼트리고 바로 또 나가봐야 하거든요.”
“네. 조심히 사냥하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사장님!”
“헌터님들도 복 받으세요.”
“저녁에 또 올게요.”
훈훈한 새해 인사를 하면서 한성 길드원들이 떠나갔다.
“멋있다. 한성 길드 전투복 입고 있는 것도 엄청 있어 보여.”
“헌터들 보긴 많이 봤잖아. 나도 있고, 박 씨 아저씨랑 정연 씨도 친해졌으면서.”
“오빠는 뭐… 그냥 그렇고, 아저씨랑 언니도 그냥 평상복 입고 밖에서 봤던 거잖아. 지금은 확실히 느낌이 달라.”
태연해 보였는데 속으로는 설렜던 모양이다.
“그런데 아까 그 두 분은 부부야?”
“누구?”
“단발머리 여자분이랑 턱수염 난 남자분.”
“아니?
“어? 아니야? 그럼 사귀시는 거?”
“무슨 소리야. 그런 얘기 하면 식겁해, 둘 다.”
“응? 진짜?”
최지수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그냥 너무 편해 보여서. 오래된 연인이나 아니면 부부 사이인 줄 알았지.”
“그렇게 보여?”
“응.”
전에도 누가 비슷한 얘길 한 적이 있었다.
“어떤 부분에서? 아까 잘 챙겨주는 것 때문에?”
“아니, 그런 거야 친구끼리도 당연히 생각해줄 수 있는 거지. 그런 단순한 행동 때문이 아니라 뭔가 미묘하게 느낌이 온다고 해야 하나? 말로 설명은 못 하겠는데 촉이 오더라고. 내가 또 이런 쪽으로 눈치가 빠르잖아.”
“흠, 그래?”
나는 두 사람을 그냥 오래된 친구로만 생각했는데, 주변에서 자꾸 이러는 걸 보면 진짜로 뭔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때, 통로에서 또 다른 손님들이 들어왔다.
이번에는 한성 길드 소속이 아닌 외부의 헌터들.
“손님 왔다. 그릇 좀 꺼내와.”
“알겠어.”
대화를 중단하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오늘은 설날이니만큼 떡국 한 그릇을 모두에게 저렴하게 제공하고 있었다.
식당을 찾은 손님들은 떡국을 먹으며 잠깐이나마 명절 분위기를 느끼고 즐거워했다.
***
며칠 후, 이른 아침, 오재영과 배현지가 식당을 찾아왔다.
“어우, 속 아파. 안녕하세요, 사장님.”
“어서 오세요. 이 시간에 오시는 건 처음이네요?”
“좀 이르죠? 속이 너무 쓰려서 뭐라도 좀 먹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속이 어떤 식으로 쓰린데요? 뭐 안 먹는 게 나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하하.”
오재영이 민망한 듯 웃었다.
배현지는 옆에 서서 인상을 찌푸린 채 계속 배를 쓸고 있었다.
어지간히 많이 마셨나 보다.
“원래 사냥 전날에는 잘 안 마시는데 어제 갑자기 선배 한 분이 사주겠다고 하셔서…. 머리도 지끈거리고 죽겠습니다.”
“오랜만에 마시니까 자꾸 들어가더라고요. 조절해야 했는데. 혹시 해장할 만한 거 뭐 만들어주실 수 없어요?”
“만들 수 있죠. 어려운 것도 아니고. 잠깐만 기다리세요.”
“오, 역시! 감사합니다.”
‘해장이라... 뭐가 좋을까.’
사람들은 다양한 해장음식으로 숙취를 해소한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는 초콜릿으로 해장하기도 한다고 하던데… 아무래도 한국인에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콩나물국이겠지.
뜨뜻한 국물이 피곤한 위장을 한번 데워주면 쓰라린 속이 금세 안정된다.
숙취 해소 효과도 탁월하고, 지금 있는 재료로 가장 만들기 쉬운 메뉴였다.
뭘 만들지 결정했으니 망설일 것 없이 바로 요리를 시작했다.
먼저 육수를 불 위에 올리고, 재료를 준비한다.
해장을 위한 가장 메인 재료인 콩나물은 줄기 끝을 떼어내지 않고 다듬었다.
끝부분에 포함된 아스파라긴산이 시원한 맛을 내준다던가.
육수에 콩나물을 담그고, 가운데에 대파, 새우젓, 다진 마늘을 얹어주었다.
바글바글 끓는 콩나물 해장국에 을 냄비째로 하나씩 서빙했다.
“와, 콩나물 해장국! 너무 좋습니다.”
“속 쓰릴 때는 역시 이거죠.”
수저를 드는 헌터들에게 밥과 물속에서 익힌 수란도 두 개 가져다주었다.
달걀 또한 해장에는 아주 좋은 음식이다.
달걀의 메타오닌 성분이 간을 보호해주고, 레시틴은 위장 건강에 도움이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국물과 함께 수란으로 먹는 것이 참 맛있으니, 이걸 빠트릴 수가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