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치킨과 맥주
반숙으로 익은 수란 위에 콩나물 해장국의 국물을 몇 숟가락 떠서 뿌려준다.
뜨거운 국물에 달걀흰자 부분이 조금 더 익어가는 게 보인다.
그 위에 김 가루를 살짝 뿌려 섞어주었다.
수란을 반으로 갈라 입에 넣은 배현지가 눈을 크게 떴다.
“와, 이것도 맛있네요. 수란은 처음 먹어보는데 엄청 부드러워요.”
“기름에 익히는 거랑은 또 다르죠. 거기에 국물의 고소한 맛도 섞였으니까 더 맛있고.”
“맞아요. 이것만 먹었는데 벌써 속이 좀 편안해지는 느낌이에요.”
아무래도 고통스러워하던 위장에 따뜻한 것이 채워지니 좀 낫긴 할 것이다.
오재영은 콩나물 해장국을 크게 한술 떴다.
뜨거운 국물을 후후 불어 식히고는 천천히 입 안에 넣었다.
노란 머리에 줄기가 통통한 콩나물이 아삭아삭 씹히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렸다.
듣기만 해도 시원하고 개운한 맛이 느껴지는 듯하다.
배현지와 오재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보았다.
“알코올이 날아가는 느낌이네요”
“역시 콩나물국이 해장에는 제일 좋은 것 같습니다.”
만족스럽게 식사를 하던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리 봐도 두 분 사이에 뭔가 있는 것 같아.”
배현지의 말에 오재영이 고개를 저었다.
“누나 또 그 소리예요? 내가 전에 그 얘기 앞에서 잘못해서 식겁했다니까. 다들 두 사람이 하도 친하니까 장난치는 거라잖아요.”
그냥 들어봐도 고영한과 유희진의 이야기다.
“주변에서 뭐라고 하든 간에 속마음은 또 모르는 거야. 내가 그냥 막 엮으려는 게 아니라 확실히 의심 가는 부분이 있어서 그래.”
“어떤 부분이요?”
“저번 휴식 시간에 희진 선배랑 이야기하던 중에 어쩌다 보니 연애 얘기로 주제가 넘어갔거든? 그때 내가 장난으로 영한 선배 어떠냐고, 남자다워서 은근히 인기 있을 것 같다, 두 분 뭔가 잘 어울린다고 했어. 다들 그런 농담 하길래 나도 가볍게 물어본 건데 희진 선배 반응이 이상하더라니까.”
관심 없어 보이던 오재영도 조금씩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무의식중에 더 잘 들으려고 하는 행동이다.
“어땠는데요?”
“걔랑은 이어질 일 없다고, 날 여자로 안 본다고 그러는데 표정이 씁쓸해 보였어. 한숨도 살짝 쉬었고.”
“진짜요? 평소랑은 반응이 좀 다른데?”
“맞지? 네가 생각했을 때도 그냥 친구는 아닌 것 같지?”
“그래도 현재진행형은 아닌 것 같은데 옛날에 썸을 탔거나, 한쪽이 짝사랑 중이거나 뭐 그런 걸까요?”
“희진 선배 쪽에서? 그런데 또 짝사랑이라기에 영한 선배가 너무 잘 챙겨주는데.”
“그래서 좋아하게 된 걸 수도 있죠.”
“글쎄…. 일방적인 것 같지는 않은데…. 사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두 분 자주 여기 와서 식사하시잖아요. 기류가 이상하다거나 그런 거 못 느끼셨어요?”
갑자기 대화의 방향이 내 쪽으로 틀어졌다.
같이 대화하는 중은 아니었지만, 부엌 바로 앞자리였고, 내 귀에 다 들릴 정도로 얘기하는 중이이긴 했다.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했다.
“저는 그런 쪽으로 눈치가 빠른 편은 아니라서요. 잘 모르겠네요.”
“하긴 저도 감은 오는데 확신하는 건 아니에요. 두 분이 너무 잘 어울려서 자꾸 이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가.”
“잘 어울리기는 하는데, 괜히 안 끼어드는 게 좋아요, 누나. 이런 건 둘이 알아서 해야지 잘못하면 욕만 들어요.”
“그건 맞지. 나도 뭘 해보려던 건 아니었어. 그런데 너는 네 연애는 못 하면서 이런 건 또 잘 알고 있다?”
“에이, 그거랑 그거랑은 다르죠!”
발끈하는 오재영을 보고 배현지가 재밌어하며 웃었다.
어찌 됐건 나도 오재영의 말에 동의하는 입장이었다.
흥미롭긴 하지만 딱 거기까지.
두 사람의 관계를 잘 아는 것도 아니고, 그들의 의사도 모르면서 이어주겠답시고 개입하는 건 오지랖이었다.
잘못하면 관계를 망가뜨릴 수도 있는 일이다.
‘참견하지 말아야지.’
다 큰 성인들 사이에 끼어들어서 뭘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고작 몇 시간 후, 생각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
저녁 영업을 마무리하고, 홀을 정리하려던 때였다.
입구에서 덩치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한성 길드의 고영한이었다.
그는 두리번거리다가 식당 한쪽 구석에서 의자를 밀어 넣던 나와 눈이 마주쳤다.
“아, 이제 들어가시려는 겁니까?”
“네. 그러려고 했죠. 이제 식사하러 올 사람도 없을 것 같아서…. 헌터님 뭐 드시려고 오셨어요? 그럼 만들어드릴 수 있습니다.”
고영한이 조금 난감한 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밥을 먹으러 온 건 아닌데….”
“그럼 따로 하실 얘기라도 있으세요?”
“음, 특별한 일이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술 한잔하고 싶어서 온 겁니다. 전에 술도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어서.”
생각해보니까 그런 얘길 한 적이 있었다.
“아, 안 되는 거면 부담가지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른 데 가도 되는 거니까요.”
뭔가 심란한 일이라도 있는 듯 고영한의 얼굴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혼자서 찾아온 걸 보니 내가 말동무라도 되어주길 바라는 것 같다.
길드원들에게는 털어놓을 수 없는 고민이 있는 듯했다.
“아뇨. 저도 좋습니다. 사냥 일정은 다 끝나셨어요?”
“네. 조금 전에 마무리까지 끝났습니다. 다음 일정은 내일 늦은 오후고요.”
“잠깐만 앉아 계세요. 안주로 먹을 것 좀 만들어볼게요.”
“그럼 저도 잠시 휴게소에 가서 짐 정리해놓고 오겠습니다.”
“치킨 좋아하시죠?”
“치킨도 있습니까? 당연히 좋아하죠!”
예상했던 대답이었다.
싫어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메뉴 아닌가.
마침 타이밍이 좋았다.
오늘 집에 가서 야식으로 닭 한 마리 뜯을 생각이었다.
최지수는 친구 집에 놀러 갔고, 혼자 영화나 한 편 보면서 먹을 생각이었지만… 아무래도 같이 먹는 게 더 좋겠지.
고영한이 휴게소로 돌아간 사이, 나는 게이트를 통해 집으로 넘어가서 닭을 포함한 재료 몇 가지를 챙긴 후 식당으로 돌아왔다.
‘튀길까, 구울까.’
짧은 고민 끝에 이왕이면 식당에 있는 화덕을 이용해 직화 로스트 치킨을 만들기로 했다.
튀긴 것도 맛있지만 지금은 기름이 쫙 빠져 담백한 치킨이 더 당겼다.
오늘 먹을 생각으로 이미 손질에 염지까지 다 해둔 생닭을 꺼냈다.
그냥 굽기에는 좀 심심하고, 마늘 치킨을 만들어야겠다.
버터 한 덩어리를 꺼내 녹이고, 다진 마늘을 크게 두 숟가락 추가했다.
거기에 약간의 소금을 추가한 다음 휘휘 섞어주었다.
닭의 겉면에 방금 만든 마늘 버터 소스를 꼼꼼히 발라주었다.
소스를 발라 윤기가 흐르는 닭 위에 통마늘도 여러 알 올린 다음 화덕에 넣고 불을 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늘 향이 솔솔 풍기기 시작했다.
돌아온 고영한이 코를 씰룩이며 냄새를 맡았다.
“마늘 냄새가 나는군요.”
“마늘 치킨이거든요. 이제 거의 다 됐습니다.”
화덕을 열자 후끈한 열기가 피부에 와닿았다.
그 속에서 꺼낸 치킨은 옅은 갈색빛을 띤 채 뜨거운 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꺼낸 통닭은 실온에 잠깐 식혀주었다.
이 과정을 통해 수분을 날려 보내면서 겉면이 더 바삭해지는 것이다.
잠시 후, 여전히 열기를 품고 있는 마늘 치킨을 식탁으로 옮겼다.
곁들여 먹을 절임 무와 맥주까지 빠르게 챙겨왔다.
“이거, 생각보다 준비를 너무 많이 하셨는데요. 그냥 간단하게 먹어도 괜찮았는데.”
“사실 제가 먹고 싶어서 만든 겁니다. 술도 술이지만, 이왕이면 안주도 맛있게 먹는 게 좋잖아요.”
“조금 죄송하네요. 그냥 괜히 가려는 사람을 붙잡은 것 같아서….”
“이럴 땐 그냥 맛있게 드셔주는 게 좋습니다.”
내 말에 고영한이 멋쩍게 웃었다.
“…그게 맞겠군요. 그럼, 잘 먹겠습니다.”
“많이 드세요.”
씩 웃으면서 맥주 뚜껑을 따고, 서로 잔을 채워주었다.
우리는 손에 비닐장갑을 끼고 본격적으로 치킨을 먹기 시작했다.
닭 다리를 뜯자 안쪽에 숨어있던 흰 속살이 결 따라 찢어졌다.
여전히 뜨거운 치킨을 후후 불어 살짝 식힌 다음 한입 뜯었다.
파삭.
겉면이 부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향긋한 마늘 향이 올라왔다.
수분이 빠져 바삭한 껍데기와 촉촉하게 수분을 머금은 속살.
정반대의 두 가지 식감이 동시에 입 안을 맴돌았다.
염지를 통해 속살까지 스며든 소금기 때문에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느껴진다.
기름기도 없고 끝맛이 깔끔해서 많이 먹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다.
입을 우물거리는 고영한의 눈에 감탄의 빛이 서렸다.
크게 내색하지 않아도 굉장히 맛있게 먹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쨍!
잔을 한번 부딪치고 차가운 맥주를 꿀꺽꿀꺽 마셨다.
시원한 감각이 입 안에서부터 배 속까지 흘러가는 게 느껴졌다.
역시 치맥은 언제나 옳다.
치킨과 맥주를 먹으면서 몇 마디씩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고영한은 원래도 말이 많지 않아서 잔잔한 분위기에서 대화가 이어졌다.
시끌벅적한 것도 좋지만, 이런 편안한 분위기에서 일대일로 나누는 대화를 통해 사람을 알아가는 것도 나름의 재미가 있다.
치킨과 맥주가 조금씩 줄어들면서 고영한의 말이 조금씩 많아졌다.
***
고영한은 술이 꽤 셌다.
맥주로 가볍게 시작했으나 어느새 주종이 변경되었다.
좀 취하고 싶다는 말에 냉장방에 있던 소주를 들고 온 것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고영한은 조금씩 취하기 시작했다.
던전이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요즘 이슈와 같은 가벼운 주제로 시작된 이야기는 술병이 비워지는 만큼 사적인 내용으로 바뀌었다.
후우….
갑갑한 듯 한숨을 푹푹 내쉬는 고영한.
조금 전부터 꺼낼 듯 말 듯 했던 속마음이 튀어나오기 시작했고, 오늘 그가 술 한잔하고 싶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이미 너무 멀리 와버린 것 같습니다…. 너무 편한 사이가 되고 말았어요. 이런 걸 원한 게 아니었는데…….”
나는 횡설수설하던 그의 말을 한마디로 정리해주었다.
“그러니까 친구에서 연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너무 답답하다 이거네요?”
“…맞습니다아….”
그리고는 또다시 한숨을 푹 내쉰다.
이미 많이 취해서 얼굴이 시뻘겋고 눈도 좀 풀렸다.
고영한은 마음의 벽이 두꺼워서 이 정도는 취해야 속마음을 겨우 꺼낼 수 있는 것 같다.
항상 무덤덤해 보였는데 이런 면이 있을 줄은 몰랐다.
“몇 년째 거의 동성이나 다름없는 친구로만 지내다가 뒤늦게 마음을 깨달았는데, 이 관계를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포기했었는데 가끔 이렇게 마음이 복잡합니다. 매일 볼 수밖에 없으니, 정리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솔직하게 얘기해본 적은 없어요?”
내 말에 고영한이 고개를 푹 떨구고 중얼거렸다.
“있긴 한데… 전에 술에 취해서 횡설수설하면서 말했던 것 같아요. 뭐… 어차피 안될 걸 알아서 고백할 생각은 없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같이 일할 사이인데 거절당한 다음 어색한 관계가 될 걸 생각하면, 그냥 묻어두는 게 맞겠죠….”
보니까 머리로는 완전히 포기했는데, 마음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것 같다.
“오늘따라 너무 답답해서 술이 마시고 싶더라고요. 원래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는데 말입니다.”
그러고는 혼자 소주 한 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싸울 때는 거침없는 남자가 이런 쪽으로는 영 용기가 없는 모양이다.
유희진이 그를 거절할 거라고 확신하고 있기에 표현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