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모른 척
고영한 본인은 굉장히 절절해 보이는데, 사실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면 상당히 답답하다.
아침에 배현지가 했던 얘기를 떠올려 보면 유희진도 그에게 마음이 있을 것이다.
가까이에서 그들을 지켜보는 사람들뿐 아니라 처음 본 지수까지도 그 기류를 느낄 수 있을 정도인데, 막상 당사자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게 아이러니했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한 사람이라도 용기를 내면 될 텐데 고영한이나 유희진이나 참 미련스럽다.
뭐, 마음이 크기 때문에 더 조심스러운 것도 있긴 하겠다.
아무래도 현재의 관계조차 무너질까 봐 걱정스러운 거겠지.
‘그냥 서로 솔직히 터놓고 얘기만 하면 될 것 같은데 말이지.’
그럼 깔끔하게 해결될 텐데, 그 간단해 보이는 게 그렇게 쉽지 않은가 보다.
‘조금만 관여해볼까.’
지금 고영한의 상태를 보아하니, 저렇게 괴로워하다 말라죽을 것 같다.
물론 진짜 죽지는 않겠지만 몇 년은 더 지지부진하지 않을까?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지, 이렇게 미적거리다가는 잘될 것도 안 되게 생겼다.
“그냥 고백해보세요.”
“그건 안 됩니다…. 지금의 관계를 망가뜨릴 용기가 없어요…. 어차피 안 되는 거 차라리 친구로 남아있는 게….”
답답하게 굴던 고영한은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만취해서 나중에는 내 말을 거의 듣는 것 같지도 않았다.
저 상태로는 집에 갈 수도 없을 것 같다.
“오늘은 아무래도 휴게소에서 주무시는 게 낫겠네요.”
“아, 아아…. 네네. 네에….”
눈을 감고 고개만 끄덕이는 그를 나는 한성 휴게소로 수면실로 옮겨 주었다.
쓰러지듯 침대에 누운 그는 순식간에 잠들고 말았다.
***
다음 날 아침.
고영한은 평소와 달리 조금 꾀죄죄한 모습으로 식당을 찾아왔다.
성격상 일어나자마자 바로 찾아올 줄 알았기에 나는 그가 찾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멋쩍게 턱수염을 쓸며 들어온 그는 곧장 나에게 다가와 꾸벅 머리를 숙였다.
“사장님, 어제는 좀… 실례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제가 생각보다 너무 많이 취했었어요. 그렇게 술에 약하지 않은데, 좀 과했습니다.”
“괜찮습니다. 저도 같이 마셨는데요. 똑같은 얘기를 여러 번 하긴 하셨지만, 들을 만했어요.”
“…제가 그랬습니까? 주정을 부리는 타입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어제는 왜 그랬는지….”
“뭐, 휴게소까지 옮기는 게 좀 힘들었지, 얘기 들어주는 건 재밌었습니다.”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고영한이 미안해서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사실 힘든 건 없었고, 크게 주정 부리지도 않았다.
혼자 끙끙 앓으며 괴로워했지 나는 오히려 흥미롭게 들었다.
휴게소까지도 거의 걸어서 이동했고.
그런데 굳이 이런 말을 꺼낸 이유는 일부러 미안한 마음을 느끼게 하려는 의도였다.
“사과는 안 하셔도 되고, 대신 하나 드리고 싶은 게 받아주실래요?”
“네? 뭘 주신다는 건지…?”
나는 준비해뒀던 병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렸다.
투명한 유리병 속에서 옅은 갈색의 액체가 찰랑거렸다.
아스키나 대륙의 드워프들이 보내온 맥주였다.
그들이 사는 곳에서 나는 보리의 맥아로 만든 맥주로, 이것도 아주 귀한 선물이었다.
오크통에 담겨있던 것을 맥주병에 소분해서 보관하는 중이다.
병을 눈으로 훑은 고영한이 당황하며 물었다.
“맥주처럼 보이는데 맞습니까?”
“네. 맥주 맞아요. 아는 분한테서 받은 건데, 맛있을 겁니다.”
라벨도 없고, 누가 봐도 시중에 파는 건 아니라 출처는 대충 얼버무렸다.
고영한이 두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아, 아닙니다. 술 때문에 폐를 끼쳤는데 어떻게 또 이런 걸 받겠습니까. 그것도 아는 분께 선물 받은 거면 제가 또 죄송해서….”
“저는 몇 병 더 있어서 괜찮습니다. 진짜 미안하시면 받아 가세요.”
단호하게 말하자 머뭇거리면서 병을 손에 쥔다.
“그리고 이건 유희진 씨랑 같이 드셨으면 좋겠어요. 희진 씨한테도 드리고 싶은데 더 드릴 건 없어서 말이에요.”
“아아, 그렇군요.”
“네. 두 분께 드리는 선물이니까 꼭 같이 드세요. 단둘이 어색하면 다른 사람들도 함께 드셔도 되고요.”
조금 이상한 요구이긴 한데, 실수한 게 있다 보니 의문이 생겨도 따지는 것처럼 들릴까 봐 되묻지 못하는 것 같았다.
잠깐 입을 달싹이던 고영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어쨌거나 희진이와 함께 마시면 좋겠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만큼 맛있는 술입니다.”
“네. 조만간 희진이랑 길드원들 몇 명이 저녁 함께하기로 했는데 그때 맛보면 되겠네요. 선물 감사합니다.”
고영한이 맥주병을 챙겨 들고 식당을 떠났다.
저 맥주는 평범한 맥주가 아니었다.
어느 드워프 마을의 전통주였는데, 드워프들이 선물했다는 것만으로도 특별하지만, 맛을 떠나서 다른 특수한 효과도 가진 술이었다.
신경계를 파괴하는 독성을 띠고 있어 똑똑한 동물들은 먹지 않는 보리로 만들었다고 한다.
독주 아닌가 싶을 수도 있는데, 발효되는 과정에서 독성은 거의 희석되고 아주 약간만 남아있는 것이다.
이 술은 사람의 정신에 크게 해롭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데 그 결과, 평소보다 훨씬 더 솔직하게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게 된다.
사실 이건 일반적인 술을 마셔도 마찬가지지만, 이 드워프들의 술은 거의 멀쩡한 정신 상태로도 솔직해질 수 있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진짜 깊숙한 비밀을 자백하게 할 정도로 강력한 영향을 주는 건 아니다.
드워프들은 서로 허심탄회하게 얘기하고 싶을 때, 또는 화해를 하거나, 마음을 표현하고 싶을 때 마시는 술이라고 한다.
‘이 사람들에게 딱 필요한 거지.’
어제 고영한의 얘기를 들으면서 창고에 넣어둔 이 맥주가 떠올라서 꺼내온 것이었다.
물론 저게 만능은 아니다.
절대 꺼내고 싶지 않은 얘기라면 저 술을 마신다고 해서 말이 나오지 않을 수도 있는 거고.
결국 나는 아주 살짝 물꼬를 터준 것뿐이고, 결국 자기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어떤 결과가 있을지 궁금하긴 하네.’
고영한이 떠난 길을 잠시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
며칠 후, 한성 길드 신입 헌터 배현지와 오재영이 잠깐 벽에 기대어 수다를 떨던 중이었다.
무심코 함께 고개를 돌리던 그들은 놀라운 장면을 목격하고 큰소리를 지를 뻔했다.
‘미친! 내가 지금 뭘 본 거야!’
그들의 눈길이 향한 곳에서는 고영한과 임유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방금 전에, 두 사람은 잡았던 손을 빠르게 놓았다.
찰나여서 확실한 건 아니었지만, 분명 수상한 움직임이 있었다.
“아,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가까워진 두 사람에게 오재영과 배현지가 어색하게 인사했다.
“좋은 아침!”
“크흠, 그래. 안녕.”
유희진과 고영한이 인사를 받았다.
“…두 분 같이 오시네요?”
“어, 요 앞에서 만났거든.”
오재영의 질문에 유희진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씩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둘 다 컨디션 괜찮지?”
“네. 좋습니다.”
“그래. 오늘도 화이팅하자!”
“아, 네, 넵!”
밝게 말하며 어깨를 두드리는 유희진의 모습은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오재영과 배현지는 서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멀어져가는 두 선배의 뒷모습을 잠깐 멍하니 바라보았다.
“…누나 봤어요?”
오재영이 떠보듯 배현지에게 물었다.
“…너도?”
뭘 봤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혼자 본 거였으면 착각으로 넘겼을 테지만, 두 사람이 같은 걸 동시에 보았다.
“네…. 분명히 두 분 손 잡고….”
“친구로서 잡은 건 아니겠지?”
“누나 저랑 손잡고 다니고 싶어요?”
“아니…. 그럼 대체 언제부터 저런 사이가 된 거지?”
“모르겠어요. 원래 서로 의식하고 있다는 생각은 했는데… 설마 처음 저희가 들어왔을 때부터 만나고 있었던 건 아니겠죠?”
“그건 아닌 것 같아.”
“와, 아무튼 대박이네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두 사람의 관계에 진전이 있었던 것 같다.
“이거, 아는 척하면 안 되겠지?”
“바로 손 떼는 거 보면 티 낼 생각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요.”
“…모른 척해드리자.”
“네….”
대화가 끝난 후에도 오재영과 배현지는 한동안 얼떨떨하게 서 있었다.
이어지면 잘 어울리겠다고 생각했던 커플이긴 한데, 현실적으로 잘될 거라 예상하진 못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새 커플이 관계의 변화에 대해 직접 밝히기 전까지 아는 척은 하지 않기로 말을 맞추었다.
***
평화로운 던전 식당에 작은 사건이 발생했다.
식당 일이나 손님, 한성 길드와는 전혀 관계없는 내부적인 일이었다.
오후 늦은 시각.
물가에서 삑삑거리는 소리와 베로가 짖는 소리가 함께 들려서 뭔가 큰일이 났구나 싶어 빠르게 가보았다.
그곳에서 나는 꽤 생소한 장면을 목격했다.
베로와 만두, 그리고 호빵이와 찐빵이가 서로를 마주 보며 대치 상태로 소리치고 있는 것이었다.
“삐이이이이!”
“삐잇!”
“웡! 웡웡!”
“삐이이이익!”
표정과 몸짓과 소리로 봤을 때, 이건 분명히 싸움이 난 거였다.
‘얘들이 싸움을 한다고?’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항상 서로를 찾으면서 사이좋게 지내던 애들이었다.
갑자기 이렇게 편이 갈려 싸운다는 사실이 상당히 놀라웠다.
“자, 자, 얘들아. 일단 진정하고 조용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나는 녀석들의 중간에 끼어들며 말했다.
“삐이이이이!”
“삐익! 삐익! 삐익!”
“웡! 웡! 웡!”
흥분해서 각자 소리치는데 뭐라고 하는 건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슬라임의 손가락이 납작한 접시를 가리키는 거로 봐서 아까 내가 먹으라고 갖다준 도넛 때문에 싸움이 난 것 같다.
네 마리의 몬스터들 모두 입가에 빵부스러기가 묻어있다.
이 녀석들이 노는 곳에 간식을 두고 가는 일은 종종 있었다.
굳이 내가 지켜보지 않아도 나중에 보면 접시는 깨끗이 비워진 채 사이좋게 놀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뭐가 문제였을까.
나는 잠깐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지수가 도넛 가게에서 사 온 도넛 두 상자 중 한 상자에서 도넛을 꺼내 간식으로 챙겨주었다.
여기서 뭐가 문제가 됐을까.
“너희 싸우지 말고 얌전히 있어. 금방 갔다 올 테니까.”
나는 엄하게 말하고 빠르게 부엌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른 한 개의 도넛 상자를 열었다.
총 10개. 한 상자에 든 도넛의 개수였다.
아무래도, 숫자가 안 맞아서 이것 때문에 싸움이 일어난 것 같다.
‘둘이 3개를 먹고 다른 둘은 2개만 먹은 건가.’
짐작일 뿐이지만 이것 때문에 다툼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크다.
어지간히 맛있었나 보다.
부엌에 있던 새 도넛 상자를 들고 다시 녀석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얌전히 있으라는 내 말 때문에 큰 소리를 내고 있진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분위기는 좋지 않다.
“자, 아까 도넛 두 개 먹은 애들 누구야. 이쪽으로 와 봐.”
호빵이와 찐빵이가 짧은 다리를 움직이며 다가왔다.
어깨를 들썩이는 걸 보니 여전히 화가 나서 씩씩거리는 것 같다.
“여기 하나씩 더 줄게. 이러면 다 똑같이 먹은 거지?”
“삐이이이!”
“삐이익!”
호빵이와 찐빵이가 두 팔을 위로 뻗어 도넛을 하나씩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