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화해
“그리고 너희는 아까 세 개씩 먹었을 테니까 더 안 줘도 되지?”
고개를 돌려 베로와 만두에게 말했다.
“워우웅…!”
“삐이이잇!”
수긍하는 것 같긴 한데, 눈에 억울한 빛이 보인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던 거다.
원래도 베로는 덩치가 큰 만큼 슬라임에 비해 먹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만두도 나머지 둘보다 더 빨리 먹는 편이었다.
속도가 빨라서 먹다 보니 더 많이 먹게 됐는데 그걸로 빈정 상하면서 다툼이 시작됐겠지.
잘잘못을 가릴 수는 없다.
‘오히려 잘못이라면 이제 알아서 하겠거니 넘긴 나에게 있겠지.’
원래는 내가 양을 적당하게 배분해주곤 했는데, 얼마 전부터 알아서 잘 나눠 먹는 것 같아서 빵이나 과일 같은 건 그냥 한 접시에 주기 시작했던 거다.
기존에는 베로에게 더 넉넉하게 챙겨주고, 슬라임 셋은 항상 똑같은 양으로 분배해주었다.
그러니 오늘의 다툼은 아마 만두가 호빵이와 찐빵이보다 하나 더 먹은 것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어린애 같은 면이 있는 애들인데 요즘 워낙 잘 지내는 걸 보고, 그걸 간과해버렸다.
어쨌거나 남은 도넛을 똑같이 나누어주면서 상황은 일단락되었다.
호빵이와 찐빵이는 둘이 나란히 앉아 새로 받은 도넛을 우물우물 먹었다.
만두와 베로는 조금 떨어진 곳에 둘이 앉아있는데….
다들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태연하게 행동하지만, 자세히 보면 서로 힐긋힐긋 눈치를 보고 있다.
‘아무래도 조금 서먹하겠지.’
몬스터라고 해서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이런 감정적인 면에서는 사람과 비슷한 부분도 있어서, 상황이 해결되었다고 그 즉시 다시 사이가 좋아질 수는 없는 것이다.
여기서 내가 화해하라고 종용해봤자 큰 소용은 없을 것 같아서 잠깐 조용히 지켜보았다.
“삐익!”
어색하게 서로 눈치를 보다가 슬라임 하나가 벌떡 일어섰다.
평소에도 맏이처럼 행동하던 호빵이가 나서려는 모양이다.
결심한듯 비장하게 일어선 호빵이의 모습에, 찐빵이도 비어있는 한 손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찐빵이의 손에도 먹다 남은 도넛이 있었다.
호빵이와 찐빵이가 베로와 만두에게 다가가 반쯤 남은 도넛을 내밀었다.
“삐이이이!”
“삐익! 삐익!”
놀란듯 눈을 깜빡이는 베로와 만두의 입가로 도넛을 막 들이밀고 있다.
이건 누가 봐도 화해하자는 표현이다.
베로와 만두는 얼떨결에 입을 걸려 도넛을 받아 물었다.
반 개짜리 도넛을 꿀꺽 삼킨 베로와 만두는 감동하여 크게 울었다.
“삐이이잇!”
“우워어어우!”
베로를 중심으로 세 슬라임이 양 팔을 뻗어 서로서로 부둥켜안았다.
극적인 화해의 현장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한걸음 떨어져 지켜보았다.
감동적이어야 할 것 같은데 자기들끼리 감격해하는 걸 보니까 어이없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다.
어쨌든 알아서 성장하는 것 같아 보기는 좋다.
‘화해 기념으로 간식이라도 좀 더 줘야겠네.’
흐뭇하게 웃으며 부엌으로 가서 남은 도넛을 더 챙겨줬다.
오순도순 모여 맛있게 먹은 베로와 슬라임들은 배가 빵빵해진 모습으로 함께 누워 잠이 들었다.
***
저벅.
검은 구두가 칼로스의 땅을 밟았다.
“오랜만에 오게 되었군.”
붉은 곱슬머리를 늘어뜨린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
마계의 제6군단장 타론이었다.
휘하에 수많은 부하를 거느린 그였으나 지금 이곳에는 홀로 찾아왔다.
칼로스는 마족들이 북적이며 찾아오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마족이 개인적인 성향을 갖고 있긴 하지만, 칼로스는 그중에서도 좀 유별난 면이 있었다.
전쟁 같은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자신의 영역에 홀로 있고 싶어 했다.
음흉한 마족놈들이 틈만 나면 술수를 부리려는 것이 짜증 난다고 했던가.
타론은 당장에 아름다운 날개를 펼쳐 성안으로 날아들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저 끝에 보이는 칼로스의 성까지 천천히 걸어가면서 이 땅의 몬스터들이 그를 의식하게 할 것이었다.
그렇게 자연히 이 땅의 주인인 칼로스에게 그의 존재를 알릴 수 있다.
갑자기 들이닥치듯 나타나는 것보다 훨씬 격식 있는 등장이었다.
“여긴 여전히 기괴하군.”
음산한 분위기의 식물과 하늘을 보며 타론이 중얼거렸다.
조금 전에 고블린 한 마리가 그를 목격하고 재빨리 달아났으니, 칼로스도 타론이 왔다는 걸 지금쯤 알았을 것이다.
그때, 한 마리의 검은 몬스터가 그의 눈에 띄었다.
거대한 케르베로스 한 마리가 산책하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의 앞길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오호….”
타론은 잠깐 자리에 멈춰 서서 케르베로스를 보았다.
‘분명 케르베로스인데 어떻게 머리가 하나일 수가 있지?’
세 개의 머리 중 하나만 죽어도 며칠 못 버티고 모두 죽어버리는 것이 케르베로스라는 몬스터였다.
원래도 개체 수가 많지 않은 희귀 몬스터인데, 저렇게 특이한 개체는 처음 보았다.
‘가지고 싶다.’
타론은 수집벽이 있었다.
특정 분야에 국한되지 않고, 아름다운 것, 독특하고 희귀한 것을 모았다.
그의 성에는 다양한 물건이 있었고, 그의 땅 한쪽에는 특이한 몬스터들을 모아놓은 구역이 따로 있었다.
저 머리가 하나뿐인 케르베로스 정도면 충분히 그의 수집품에 추가될 자격이 있었다.
“케르베로스여.”
타론이 고위 마족의 위엄을 담아 입을 열었다.
검은 케르베로스, 베로가 힐끗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그대는 이 땅의 주인, 마계 제1군단장 칼로스의 휘하에 있는 몬스터인가?”
“웡! 웡! 웡! 웡!”
케르베로스가 버럭 성질을 부린다.
“아니, 이놈이?”
“웍! 웍!”
“…….”
타론은 너무 황당하여 할 말을 잃었다.
물론 케르베로스 정도면 마계의 몬스터 중에서도 충분히 강한 축에 속하긴 한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고위 마족 중에서도 손꼽히게 강한 타론에게 이따위로 행동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지능이 없는 몬스터도 아니고, 케르베로스 정도면 정확한 타론의 직위는 몰라도, 자신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아채야 한다.
‘미친 건가?’
너무 건방진 모습을 보여주니, 오히려 이 케르베로스가 정상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하긴, 세 개여야 할 머리가 하나뿐이니 멀쩡한 게 더 이상한 걸 수도 있겠다.
그렇게 납득한 타론은 다시 처벅처벅 걸음을 옮기는 케르베로스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놈은 귀찮게 하지 말라는 듯 머리를 탈탈 털고 완전히 떠나버렸다.
“저, 저놈이….”
자신보다 약한 몬스터에게 이런 취급을 받은 건 처음이다.
뒤늦게 화가 치솟았다.
저 케르베로스를 당장에 제압해서 성으로 가져갈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으나, 타론은 빠르게 이성을 되찾았다.
여기는 자신의 땅이 아니다.
지성이 없는 몬스터라 할지라도 그쪽에서 먼저 공격하지 않는 이상 함부로 손을 대는 것은 매우 무례한 행동이었다.
괜히 케르베로스를 건드렸다가 자칫 선공했다고 오해받으면 걷잡을 수 없이 큰 싸움으로 번질 수 있는 일.
조금 더 조심스럽게 행동할 필요가 있다.
“미친 게 아니라면 칼로스 님이 엄청나게 아끼는 몬스터일 수도 있겠어.”
혼자 중얼거린 타론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케르베로스를 이대로 그냥 보낼 심산은 아니었다.
칼로스를 만나서 이 케르베로스에 관해 물어보고, 가능하면 데려가고 싶다는 요청을 할 것이다.
타론과 칼로스의 관계는 꽤 좋은 편이었다.
특정 몬스터를 아끼는 모습을 본 적은 없으니 무리 없이 수락할 것 같다.
케르베로스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을 수도 있고.
사실 베로의 입장에서 타론에게 굽힐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잘한다 잘한다 하는 칭찬만 들어온 베로의 자존감은 하늘 높이 치솟아있었다.
또한 현호와 칼로스라는 뒷배가 있으니 마계에서, 그것도 칼로스의 영역에서 베로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타론은 케르베로스를 뒤로하고 다시 칼로스의 성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성에 도착한 타론의 앞에 스켈레톤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역시, 칼로스는 타론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었다.
“크르르륵!”
“크륵, 크륵….”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는 스켈레톤들의 모습에 타론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왔는데도 이렇게 반겨주는 것을 보면 역시 칼로스 또한 그를 가깝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때 복도 끝에서 다가오는 칼로스가 보였다.
우람한 몸체와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 무엇보다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몸이 굳어버릴 것 같은 엄청난 기세에 타론은 속으로 감탄했다.
같은 군단장이지만 일대일로 싸운다면 타론을 칼로스를 이길 자신이 전혀 없었다.
“…타론.”
가까이 다가오며 칼로스가 입을 열었다.
지난번 만남 때처럼 크게 반겨줄 거로 생각했으나 직접 마주한 칼로스는 표정이 그렇게 밝지 않았다.
“갑자기 무슨 일로 온 것이냐?”
그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싫다거나 불쾌해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보다는 왜인지 얼떨떨해하는 것에 가까운 것 같다.
“제가 언제 그렇게 미리 연락하고 왔습니까. 꼭 용건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가끔 생각나면 들려서 이야기도 나누고 할 수 있는 사이 아닙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면 좀 서운합니다.”
타론이 능글맞게 울상을 지으며 말하자, 그제야 칼로스가 피식 웃었다.
“그래. 그러고 보니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 것 같군. 반갑다는 말을 먼저 해야 했는데.”
“괜찮습니다. …여기에 계속 서 있을 건 아니겠죠?”
“아, 그럼. 안으로 들어가야지.”
칼로스는 좌우로 고개를 돌리며 묘하게 주변 눈치를 살피더니 타론을 응접실로 이끌었다.
***
타론은 웅장하지만 투박한 성의 내부를 잠깐 둘러보았다.
역시 그의 취향은 아니었다.
타론은 조금 더 아름답게 다듬어진 것을 좋아했다.
함께 응접실에 왔던 칼로스는 갑자기 해결해야 할 일이 있다며 빨리 돌아올 테니 잠깐만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비웠다.
오늘따라 타론이 원래 알던 칼로스의 이미지와 조금 다른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근엄하고 무게감 있으며 카리스마 넘치는 그가 지금은 왜 이렇게 불안해 보이는 건지 모르겠다.
“크르륵….”
그때 스켈레톤 한 마리가 찻잔을 하나 내왔다.
잔 속에는 검은 액체가 찰랑이고 있었다.
타론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검은 바이콘의 뿔과 돌연변이 샌드웜의 쓸개즙을 달여 만든 블랙티였다.
이 블랙티는 칼로스가 아주 아끼는 희소성 있는 차로, 귀한 손님에게만 내어주는 것이다.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에 기분이 좋았다.
칼로스가 그를 귀한 손님으로 대접한다는 의미였으니까.
그때 사라졌던 칼로스가 돌아왔다.
“기다리게 했군.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어쩔 수가 없었다. 이제 앉아서 이야기를 나눠보지.”
“네. 차는 감사하게 마시겠습니다.”
칼로스는 타론이 쓴맛에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홀짝홀짝 블랙티를 마시는 모습에 크게 만족스러워했다.
두 마족은 잠깐 근황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할 이야기가 다 떨어졌다.
친분이 꽤 있는 편이지만 그렇다고 몇 시간씩 쓸데없는 대화를 하며 하하호호하는 사이는 아니었다.
잠깐의 침묵 후 칼로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 타론. 진짜로 나를 찾아온 용건이 무엇이지?”
아까는 꼭 용건이 있어야 올 수 있는 사이는 아니지 않냐고 말했으나, 타론이 지금껏 용건 없이 칼로스의 성을 찾은 일은 없었다.
정말 안부만 묻고자 했다면 굳이 찾아오지 않고도 소식을 전할 수 있다.
그런데도 이렇게 찾아왔다는 것은 새어나가서는 안 될, 얼굴이 마주하며 해야 하는 이야기가 있다는 의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