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내려놓아라
타론이 근처의 스켈레톤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칼로스 님, 새로운 마왕의 탄생은 아직입니까?”
“…….”
칼로스가 대답없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이 질문이 나올 거라는 건 짐작하고 있었다.
마계는 힘의 논리에 의해 돌아가는 세계로, 마왕이라는 절대자에 의해 통치되었다.
마왕은 태생부터 다른 힘을 가지고 태어난다.
마계라는 세계가 마왕의 존재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마왕의 힘은 압도적이어서 날고 기는 마족이나 몬스터 모두 마왕의 앞에서 약자일 뿐이었다.
드넓은 마계의 모든 것을 관리할 수는 없지만, 마족을 비롯하여 어느 정도까지는 통제할 수 있었다.
반대로 말하면, 마왕의 부재는 마계에 엄청난 혼란을 가져다준다는 뜻이다.
마왕이 없는 마계는 서로의 강함을 증명하기 위해 끝없이 피 튀기는 싸움이 벌어지는 거대한 격투장이 되는 것이다.
‘전대 마왕이 예상외로 너무 일찍 죽는 바람에 뭔가 잘못된 것일지도…….’
아스키나 대륙으로 넘어갔던 마왕은 초월자에게 죽임당했다.
그렇다고 칼로스가 초월자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었다.
어차피 마왕에 대한 충심은 오로지 그 힘에 대한 두려움에서 솟아났던 것이기 때문에, 마왕의 죽음에도 슬픔을 느끼지는 않았다.
칼로스가 가진 감정은 마왕에 대한 두려움이 초월자에 대한 두려움으로 옮겨간 것에 가까웠다.
칼로스는 마계가 혼돈에 빠지기를 원치 않았다.
제1군단장인 그는, 마왕이 없는 지금 마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존재였다.
그러나 마왕만큼 압도적인 힘이 없기에, 안정적으로 마계를 통치할 수는 없다.
게다가 새 마왕이 태어나지 않는다는 소문이 퍼지면, 호시탐탐 권력을 노리는 수많은 마족들이 그의 목숨을 노릴 것이다.
‘지금이라도 마왕이 탄생해야 할 텐데….’
칼로스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거짓말을 해도 타론은 이미 거의 확신하고 묻는 것이기에 믿지 않을 것이다.
그나마 타론은 군단장 중 믿을 만한 마족이니 현 상황을 솔직히 말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침묵하는 칼로스에게 타론이 다시 한번 물었다.
“벌써 1년 가까이 지나지 않았습니까? 아직도 새로운 마왕이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거면… 뭔가 잘못된 거 아닙니까?”
“아직 확답은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전대 마왕의 죽음 후 새로운 마왕이 태어나기까지 정확한 기간이 정해진 게 아니니까. 고작 1년 가지고 그렇게 판단하는 건 어렵지.”
“하지만 전대 마왕이 죽고 6개월 안에 새 마왕이 태어나는 게 일반적이지 않습니까.”
“기록에는 2년이 걸린 적도, 3년이 걸린 적도 있었다. 아직 더 기다려봐야 해.”
“그 두 번을 제외한 나머지 십수 번의 탄생에는 모두 수백 년이 넘는 공백이 있었죠. 만약 이번에도 그렇게 된다면….”
“타론. 아직 함부로 판단할 때가 아니다.”
칼로스가 엄중하게 말을 끊었다.
그러나 그도 내심 타론이 말하는 걱정을 똑같이 하고 있었다.
수십만 년의 세월 동안, 6개월 이내에 새 마왕이 나타나지 않은 경우는 겨우 10번 안팎이었고, 그중 2, 3년 만에 탄생하는 일은 딱 두 번뿐이었다.
확률적으로 이번에도 수백 년의 공백이 생길 가능성이 높았다.
“아직은…. 그러나 만약을 위해 대비는 해둬야 할 것 같습니다. 조금 있으면 다른 마족들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챌 테니까요.”
타론의 말에 칼로스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칼로스와 타론이 살아오는 동안은 항상 전대 마왕의 통치 아래에 있었기에 그들도 마왕이 없는 세계가 어떨지 정확히 상상하긴 힘들었다.
하지만 엄청난 혼돈이 찾아올 거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만 가봐야겠군요.”
“그렇게 해라.”
칼로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타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볼일을 마쳤으니 바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때 칼로스의 성 어딘가에서 들려서는 안 될 소리가 들려왔다.
“삐이이이!”
“삐익!”
타론과 칼로스가 동시에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 어떻게 나온 거지!”
칼로스가 크게 당황하며 벌떡 일어섰다.
그의 붉은 동공이 지진 난 듯 흔들리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타론의 방문에 성에서 놀던 슬라임들을 허둥지둥 숨겨놓았던 참이다.
어차피 잠깐 들렀다 떠날 것이고, 오래 기다리게 할 수도 없어서 대충 빈방에 넣어두고 문을 잠갔었는데….
잠금장치에 손도 안 닿는 녀석들이 무슨 재주로 이렇게 밖으로 탈출한 건지 모르겠다.
반면 타론은 두 눈을 크게 뜨고 알 수 없는 푸른색 덩어리들이 이쪽으로 달려오는 모습을 보았다.
“칼로스 님, 이것들은 도대체….”
타론이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푸른 생물들을 위아래로 훑었다.
슬라임.
놀랍게도 팔다리가 달려 이족보행을 할 수 있는 슬라임이다.
“오호….”
타론의 입에서 감탄이 흘러나왔다.
백 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왔지만 이런 희한한 것은 처음 본다.
‘이건 돌연변이인가? 아니면 칼로스 님이 손을 대서 이런 모양을 만들어놓은 건가?’
뭐가 됐든 놀라웠다.
지금껏 모아온 수많은 수집품 중에도 이것과 비슷한 것은 없다.
돌연변이가 아니라 누군가의 손길이 닿은 거라면 상상 이상으로 정교한 기술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능력으로 이런 슬라임을 만들어낼 수가 없었다.
“삐이이이!”
슬라임 인간 하나가 새로운 마족에게 호기심을 보이며 다가왔다.
동그란 얼굴에 박힌 검은 눈알이 깜빡거리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다.
마계에 이런 생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머리가 벗겨진 고블린 정도가 평균적인 외모 수준이었다.
처음 보는 깜찍함에 타론이 자기도 모르게 두 손을 뻗어 슬라임을 집어 들었다.
“삐이이이!”
투박한 손짓에 찐빵이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그, 그만! 내려놓아라!”
“이거 하나 주시면 안 됩니까? 너무 마음에 드는데요.”
타론은 바로 내려놓지 않고 느긋하게 슬라임을 한 번 더 살펴보았다.
초조해진 칼로스가 더 크게 소리쳤다.
“미친 소리! 빨리 손 떼라니까! 뭐 하는 짓이냐! 이 멍청한 놈!”
타론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아니, 답지 않게 왜 그러십니까. 어째서 저에게 그런 식으로 말씀을….”
칼로스가 타론에게 이렇게 험하게 대하는 건 처음이었다.
물론 다른 마족들에게는 거친 말과 행동을 일삼았지만, 타론은 항상 눈치껏 칼로스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았고, 칼로스도 그 점을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지금의 일은 타론이 크게 잘못한 것 같지 않았다.
별것도 아닌 거로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은 부당하다.
비록 힘으로 따지자면 칼로스가 더 강하긴 하나, 그렇다고 이렇게 막 대해도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만 내려놓아라. 안 그러면 내가 힘을 써야 할 테니까.”
마음 급한 칼로스가 결국 협박하듯이 말했다.
눈치 빠른 놈이 왜 지금은 이렇게 말을 안 듣는 건지 답답하기만 했다.
초월자가 나타나서 이 모습을 보면 분노할 게 분명했고, 그 불똥은 타론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튈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칼로스 님. 이 슬라임들을 귀하게 여기시는 모양이니 손대지 않겠습니다.”
타론은 순순히 대답하면서 슬라임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주변을 살피는 듯 눈동자를 굴리며 과격하게 말하는 칼로스의 모습은 타론에게 너무 낯설었다.
항상 강해 보였던 칼로스가 지금은 구석에 몰린 쥐처럼 불안해 보였다.
슬라임들은 새로운 인물의 등장에 신이 나서 시끄럽게 떠들며 뛰어다녔다.
그러나 두 마족 사이의 분위기는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타론은 칼로스의 태도에 기분이 상했고, 칼로스는 지금의 상황이 불안하고 답답했다.
빨리 돌려보내고 싶지만 이대로 보내는 건 좋지 않을 것 같다.
조금 분위기를 풀 필요가 있었다.
“크흠, 떠나기 전에 내 땅을 한 바퀴 둘러보는 게 어떻겠나?”
“……그거 좋은 생각이군요.”
사실 예전에도 본 적이 있고, 성에 들어오기 전에도 대충 이미 한번 봤으나, 칼로스의 의도를 알아챘기에 타론도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이 좋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이걸로 척질 것은 아니었다.
***
두 마족은 성 밖을 나서서 길을 걸었다.
얼마간의 침묵 후, 타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까는 처음 보는 생물이라 너무 신기해서 저도 모르게 건드렸습니다. 아끼는 것을 함부로 만지면 기분 나쁜 게 당연하지요. 제가 생각이 짧았던 것 같습니다.”
먼저 태도를 굽히자, 칼로스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다. 내가 좀 심했던 것 같다. 말 못 할 사정이 있어서 그런 거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라.”
“…그럼요. 조금 놀라긴 했지만 이해합니다.”
“역시 자네는 속 좁은 다른 마족들과는 다르군. 하하하하.”
“그럼요, 저는 그런 사소한 걸 일일이 마음에 담아두는 옹졸한 마족이 아닙니다. 하하하하하.”
아무렇지 않게 웃으면서 타론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는 아까 봤던 케르베로스를 잊지 않고 있었다.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칼로스는 타론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이런 분위기면 슬라임은 그냥 두더라도, 머리가 하나뿐인 케르베로스 정도는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칼로스 님은 그런 쪽으로 영 관심이 없으니까.’
그는 오직 힘과 강해지는 것에만 집중하는 마족이지, 이런 잡다한 일은 신경 쓰지 않는다.
슬라임에 대한 건 이해할 수 없지만, 그냥 예외적인 거로 생각해야겠지.
그리고 타이밍 좋게 두 마족의 앞에 아까 봤던 케르베로스 한 마리가 나타났다.
“오, 칼로스 님. 안 그래도 아까 이 케르베로스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어떻게 머리가 하나밖에 없는데 살아있는 것입니까? 이런 건 처음 봅니다.”
“…글쎄.”
칼로스의 동공이 아까처럼 흔들리기 시작한 것을 타론은 알아채지 못했다.
오히려 짧게 말을 끊는 것을 보고 역시 이런 몬스터에 관심이 없는 것이라 여겼다.
“칼로스 님은 제가 특이한 몬스터를 수집한다는 거 알고 계실 겁니다.”
“……”
“머리 두 개가 없으니 그만큼 힘도 약할 텐데…. 지금까지 살아남은 게 용하군요. 그래서 말인데, 이 케르베로스 제가 가지고 가도 되겠지요? 관심 없을 거 알지만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그건 불가능하다.”
딱 잘라 거절하는 칼로스의 말에 타론은 입을 다물었다.
칼로스에 대해서는 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당연히 가능할 거라는 가정하에 최소한의 절차로 한마디 물어보았던 것이다.
설마 거절의 답이 나올 줄은 몰랐다.
타론은 굳은 얼굴로 칼로스를 바라보았는데, 칼로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돌렸다.
“시간도 많이 흘렀는데 너무 붙잡고 있었던 것 같군. 이만 떠나야 하지 않겠나?”
두 마족이 만난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갑자기 티 나게 내쫓으려는 것 정도는 타론도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오늘따라 정말 이상하시군요.”
“어떻게 생각해도 상관없으니까 빨리 가기나 하라고.”
칼로스가 목소리를 낮추며 재촉했다.
그때 마족들에게 관심 없는 듯 갈 길을 가는 케르베로스의 뒤에서 검은 머리 남자가 나타났다.
타론은 그가 마족이 아니라는 것을 곧바로 알아챘다.
“……인간? 인간이 왜 여기에…!”
타론은 최현호를 향해 적개심을 드러냈다.
그는 이미 멀리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그리고 이 새로운 마족이 베로를 탐내고 있다는 것까지 알았다.
‘수집이 어쩌고 하는 걸 보면, 단순히 전시용으로 원하는 거겠지.’
영 불쾌한 소리에 가만히 있지 못하고 한 발 앞으로 나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