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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주인인데 (78/125)

78화. 내가 주인인데

짐승의 얼굴을 한 칼로스와 달리, 등 뒤에 검은 날개가 달려있다는 것만 빼면 타론은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의 양손에 검은 연기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인간들이 마계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닌다는 건 알지만, 이렇게 마족의 땅까지 발을 들일 줄은 몰랐군요.”

지구에 생기는 게이트로 던전을 클리어하는 상황을 말하는 것이었다.

오직 몬스터들이 지구로 넘어오는 걸 막기 위한 것이었지만 타론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마족의 땅에 던전이 설정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타론은 지구고 뭐고 다른 세상은 궁금하지도 않았다.

지금까지는 관심이 없었기에 크게 신경쓰지 않았지만, 이렇게 마주치게 된 이상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그것도 감히 현재 마족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칼로스 님의 땅을 침범한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베로를 데리고 가고 싶다고 했나?”

고개를 까딱 기울이며 입을 여는 인간의 모습에 타론은 입꼬리를 올렸다.

케르베로스고 인간이고 간이 배 밖에 나온 놈들뿐인 듯하다.

흥미로웠다.

또 무슨 자신감으로 이러는 건지 궁금하기도 했다.

바로 죽일 수도 있지만, 몇 마디 들어본 다음 목을 치기로 했다.

흔히 생기는 일이 아니니 잠깐 즐겨봐도 되겠지.

“이 모자란 케르베로스의 이름이 베로인가? 인간이 몬스터와는 무슨 상관이지?”

거만하게 내려다보는 타론에게 최현호가 툭 던지듯 대답했다.

“무슨 상관이냐니, 내가 주인인데.”

“하하! 제대로 미친 인간이구나. 케르베로스는 누군가를 주인으로 따르는 몬스터가 아니다. 인간이여.”

케르베로스는 마족조차 길들일 수 없었다.

힘으로 굴복시킬 수는 있으나 그렇다고 주종관계를 맺는 건 본 적이 없다.

고로, 저 인간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었다.

“웡웡!”

그때 베로가 보란 듯이 현호에게 꼬리를 흔들며 다가가 몸을 비볐다.

“오호…!”

말도 안 되는 허세라고 생각했던 타론이 자기도 모르게 소리 내며 감탄했다.

저 케르베로스는 확실히 특별한 놈이다.

성에 가둬두지 말고 어디 갈 때마다 데리고 다녀도 될 것 같다.

놀라운 광경에 다른 마족들이 필시 감탄하며 부러워할 것이다.

‘더 탐나는군.’

주인이니 뭐니 아무 의미 없는 소리.

귀찮게 하는 건 죽여버리고 필요한 것만 얻어가면 되는 것이다.

그래도 마족의 앞에서 겁먹지 않고 당당히 서 있는 걸 보면 마냥 비실거리는 인간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치고받는 싸움이 될 리는 없다.

그냥 일격에 빠르게 죽여버리기로 한 타론이 칼로스를 보며 말했다.

“주변에 다른 인간들이 더 있는 것 같지는 않군요. 주제도 모르고 혼자 이곳을 찾은 모양입니다. 칼로스 님,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성가신 일 하나를 해주면서 생색을 내면 저 케르베로스를 데려가는 것이 더 쉬워질 것이다.

말을 끝낸 직후, 타론이 검은 연기가 일렁이는 두 손을 들었다.

단숨에 목을 딸 생각으로 땅을 박차며 앞으로 튀어 나가려 했다.

그러나 그의 몸은 생각처럼 나아가지 못하고 무언가에 턱하고 가로막혔다.

“그, 그만!”

칼로스가 크게 소리치며 타론의 앞에 팔을 뻗었던 것이다.

“…이게 무슨 행동이십니까, 칼로스 님?”

“공격해서는 안 된다. 물러나거라, 타론.”

“허.”

황당한 말에 타론이 코웃음을 쳤다.

강자에 대한 예의를 갖추어 칼로스의 앞에서 그를 비웃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건만, 지금 이 순간만은 참을 수 없었다.

“이 인간과 아는 사이라도 되는 겁니까?”

“…….”

뭐라고 해야 하나.

칼로스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물론 아는 사이이고, 이 인간은 보통 인간이 아닌 초월자였다.

그러나 초월자라는 말을 해봤자 단숨에 먹힐 것은 아니었다.

초월자의 존재는 오래전부터 전설처럼 구전으로 전해져왔지, 직접 목격한 것은 칼로스도 현호가 처음이었다.

따라서 초월자의 힘에 대해서도 정확히 인지할 수 없었다.

인간 초월자가 마왕을 죽였다는 소문을 있는 그대로 믿을 마족은 없을 것이다.

아예 헛소문이라 생각하는 마족도 있었고, 뭔가 다른 힘을 빌렸거나, 여러 가지 운이 겹쳐서 이루어진 일이라고 생각했다.

칼로스의 경우는 직접 그를 마주하고 힘을 일부라도 경험했기에 그 소문이 진실임을 알았지만, 타론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이걸 다 설명하고 설득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텐데….’

한편, 최현호는 눈앞의 붉은 머리 마족을 보며 혀를 찼다.

탐욕이 눈에 다 훤히 드러난다.

‘이놈을 어떻게 할까.’

마족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거칠고 이기적인데 강하기까지 해서 온 세상을 자기 발아래에 둔 것처럼 행동한다.

아스키나 대륙에서 접한 놈들은 하나같이 재수가 없었다.

이미 마계에서는 칼로스에게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아는 마족이 더 필요하지는 않을 것 같다.

‘죽일까?’

현호의 눈빛이 바뀌었고, 고민하던 칼로스는 순간 섬뜩한 살기를 느꼈다.

그래서 더 머리 굴릴 겨를도 없이 둘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자기 선에서 처리하는 것이 그나마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타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게 뭐 하는 겁니까, 칼로스 님? 설마 지금 이 인간을 보호하시려고 하는 겁니까?”

완전히 틀렸다.

인간이 아닌 타론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너를 위한 일이다. 이만 물러서라, 칼로스.”

“저를 위한 일이라고요? 이해가 안 되는군요.”

“그래. 네가 죽기를 바라지 않아서 이러는 거다.”

“푸하하핫!”

어이가 없어서 저절로 웃음이 튀어나왔다.

“하하하하! 크크큭!”

타론은 아예 배를 잡고 웃었다.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 정말로 너무 웃기는 소리였다.

칼로스의 말은 마치 이 인간과 싸우면 타론이 반드시 죽는다는 소리처럼 들렸던 것이다.

눈물까지 닦으면서 타론이 입을 열었다.

“와…. 이 정도로 웃어본 건 근 20년 만에 처음인 것 같습니다. 칼로스 님이 이렇게 웃기는 재주가 있으신 줄은 몰랐군요.”

비꼬는 말에도 칼로스는 덤덤히 오른손을 들었다.

치이이잉!

시뻘건 대검이 나타나 그의 손에 감겨들었다.

그제야 아까 그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깨달은 타론이 피식 웃었다.

“…실망입니다. 고작 인간 하나 때문에 저를 이렇게 대하실 줄이야….”

“그런 게 아니다. 있다가 설명해줄 테니 일단 진정해라. 타론.”

칼로스의 등에 난 털이 식은땀으로 축축이 젖어가고 있었다.

여전히 초월자에게서 은은한 살기가 느껴진다.

여기서 타론을 제지하지 못하면 저놈은 진짜로 죽게 될 것이다.

“후후후…. 좋습니다. 칼로스 님의 뜻이 그러시다면 받아들이지요. 저희가 제대로 겨뤄본 것도 거의 100년이 다 되어가는 것 같군요.”

타론은 눈을 가늘게 뜨고 칼로스를 보았다.

마계 제1군단장 칼로스.

마왕이 없는 지금, 가장 강한 마족은 바로 그였다.

그런데 마족으로서의 긍지를 보여야 할 칼로스가 인간 하나를 어쩌지 못해 쩔쩔매고 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칼로스도 예전의 그가 아닌 것이다.

‘어쩌면 내가 이길 수 있을지도.’

타론은 다른 마족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강함을 추구해왔다.

지난 세월 동안 그도 놀고먹지는 않았다.

당연히 질 거로 생각해서 대우해줬지만, 찍어누를 가능성이 보이는데도 굽신거릴 생각은 없다.

강자가 약자를 발아래에 두는 것이 마계의 섭리였다.

타론의 두 손을 감싸던 검은 기운의 색이 점점 더 짙어졌다.

칼로스의 대검도 점점 붉은빛이 강해졌다.

한참 동안 서로의 힘을 가늠하던 두 마족이 동시에 날아올랐다.

콰아아앙!

하늘에서 두 힘이 맞붙으며 굉음이 터져 나왔다.

칼로스의 영역에 사는 몬스터들은 두려움에 떨며 각자의 집으로 숨어들었다.

현호는 조금 놀란 베로와 슬라임들을 다독이며 편하게 자리 잡았다.

“칼로스가 생각보다 눈치가 있네.”

“워어어엉?”

고개를 갸웃하며 올려다보는 베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그 또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싸움 구경이 제일 재밌는 게 아닌가.

처음부터 칼로스가 우세하긴 했으나, 타론이라는 놈도 그리 만만치는 않았다.

치명타는 이리저리 피하면서, 때때로 빈틈을 찾아 날카로운 공격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호의 눈에는 칼로스가 이길 거라는 게 이미 보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칼로스가 더더욱 우세해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하아아아암.”

아무리 재밌는 거라도 똑같은 장면만 반복해서 보면 질리기 마련이다.

치고받는 싸움이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안 되겠다. 나중에 다시 오자.”

자리를 털며 일어서자 옆에서 꾸벅꾸벅 졸던 베로와 슬라임들도 일어섰다.

베로와 슬라임들은 어차피 위에서 뭐가 번쩍번쩍한다는 정도밖에 인식하지 못했기에 더더욱 재미가 없었다.

현호는 게이트를 열고 던전 식당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하루에 한두 번 정도 마계로 나와 상황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확인했다.

두 마족의 싸움이 완전히 끝난 것은 3일을 꼬박 다 채운 이후였다.

***

붉은 곱슬머리가 바닥에 물결처럼 흐트러져 있다.

슬라임 세 마리가 그 곁에 쪼그려 앉아 비단 같은 머리카락을 한 움큼씩 부여잡았다.

“삐이이잇!”

“삐이익!”

“삐이이이!”

슬라임들은 머리카락을 쭉쭉 잡아당기고 흔들면서 장난을 쳤다.

그 머리카락의 끝에는 대짜로 널브러진 타론의 머리와 몸뚱이가 있었다.

반질반질하던 얼굴이 얼룩덜룩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나는 붉은 머리 마족의 몸을 발끝으로 툭툭 건드리며 칼로스를 보았다.

“죽었나?”

“…안 죽였습니다. 죽이면 안 됩니다. 현호 님. 이 녀석 좀 봐주십시오.”

칼로스는 바위에 걸터앉아 힘없이 중얼거렸다.

힘없다는 것은 평소의 칼로스에 비해 그렇다는 것이고, 실제로 크게 몸이 안 좋다거나 다친 것은 아니었다.

자잘한 상처들이 좀 있고, 체력이 많이 고갈되었을 뿐.

두 마족의 전투가 길어진 건 둘의 실력이 그만큼 막상막하라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전력을 다해 싸웠다면 하루가 지나기 전에 타론의 패배로 마무리되었을 싸움이었다.

싸움이 길어진 이유는 칼로스가 타론을 죽이지 않고 완전히 제압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둘은 힘의 격차가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칼로스가 타론을 가지고 놀 정도의 차이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냥 전력을 다해 죽이는 것보다 훨씬 오래 걸렸던 것이다.

“그런데 왜 이놈을 죽이면 안 되는 건데? 마족 간에도 그런 의리가 있어?”

“그게… 마계에도 사정이 좀 있습니다.”

칼로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겨우 입을 열어 마계의 상황을 설명했다.

내가 죽였던 전대 마왕 이후로 새 마왕이 탄생하지 않고 있다는 것.

아직은 나타날 가능성이 있기에 모두 기다리고 있지만, 만약 이 상태가 조금 더 지속된다면 왕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개싸움이 시작될 거라는 것.

그나마 타론은 칼로스와 가까운 마족이라고 볼 수 있었다.

가장 위에 있는 칼로스를 무작정 치고 들어올 다른 군단장들과 달리 말이 좀 통했다.

같은 편에 설 가능성이 가장 큰 인물이니 여기서 죽였다가는 후회할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또한, 여기서 타론이 죽음을 맞이하고, 그것이 칼로스와의 싸움 때문이라는 게 알려졌다면 예상보다 훨씬 더 빠르게 전쟁의 불씨가 당겨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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