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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음식 (79/125)

79화. 인간의 음식

‘그런 건 또 몰랐네.’

막연히 마왕이 죽었는데 왜 그 자리를 차지하려는 다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인지 의아함은 가지고 있었지만, 솔직히 그 이상의 관심은 없었다.

마족들 간의 전쟁 같은 것까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어차피 틈만 나면 싸우는 곳이 마계 아닌가.

그래도 마계에서 엄청 중요한 일인 것 같은데, 칼로스가 지금껏 말하지 않은 건 고의로 숨기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치자 칼로스가 멈칫하며 동작을 멈추었다.

“왜 얘기 안 했냐?”

“그게, 안 물어본 적이 없어서….”

“새 마왕이 나타나면 뒤통수치려고 했던 건 아니고?

“아, 아, 아닙니다. 그건 절대 아닙니다!”

칼로스가 털이 북슬북슬한 손을 마구 휘저으며 부정했다.

그러나 말없이 바라만 보고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개를 떨구며 입을 열었다.

“그게… 아주 약간의 가능성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그것도 몇 달 전의 생각입니다. 지금은 그냥 딱히 관심이 없어 보이셔서 말을 꺼내지 않은 것뿐입니다. 진짜로요! 그리고… 어차피 새로운 마왕이 나타나더라도 현호 님을 이기지 못할 거로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진짜 당당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칼로스가 가슴 탕탕 치며 말했다.

마왕이 나타나건 말건 나에게는 별문제 될 게 없다는 건 맞는 말이었다.

그리고 지금 한 말은 진심인 것 같다.

그간 지켜봐 왔던 모습을 보면 이미 나에게 거의 복종하고 있고, 이번에도 잘 보이려고 노력하는 게 보였다.

이 정도는 넘어가 줘야지.

“끄응….”

칼로스가 설명을 마쳤을 즈음에 바닥에 쓰러져있던 붉은 머리 마족이 게슴츠레 눈을 떴다.

눈꺼풀이 부어서 제대로 뜰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칼로스 님…. 어떻게 저에게 이런…. 이제 저를 죽이실 겁니까. 고작 인간 하나를 지키기 위해….”

타론은 일어나지도 않고 자조적으로 웃었다.

이미 삶을 포기한 듯한 자세였다.

자기 머리를 가지고 놀고 있는 슬라임들도 인지하지 못한 듯한 모습이었다.

“…일어나라. 타론.”

“…….”

위엄있는 칼로스의 목소리에 타론이 몸을 일으켰다.

다시 한번 힘의 차이를 실감한 그는 칼로스의 말을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삐이이!”

“삐이이잇!”

슬라임들이 멀어지는 붉은 머리카락에 손을 뻗으며 아쉬워했다.

그제야 녀석들의 존재를 알아챈 타론은 잠깐 당황해하다가 곧 평정을 되찾았다.

“이제 머리가 좀 식었나?”

“…네?”

“대화할 준비가 되었냐는 말이다.”

“이미 상대가 안 된다는 걸 알았는데 제가 어떻게 다시 덤비겠습니까. 할 말을 하시든, 죽이시든,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나는 널 죽이지 않을 거다. 그리고, 아까도 말했지만, 인간을 지키기 위해 너를 공격한 게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지.”

“…….”

타론의 눈동자가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나를 향했다.

칼로스에게는 완전히 굴복했으나, 그 말만큼은 받아들이기 힘들어 보였다.

그걸 알아챈 칼로스가 나를 보며 말했다.

“잠깐 따로 이야기를 나누고 와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해.”

타론의 관자놀이에 혈관이 불거졌다.

마족이 인간에게 존대하고 굽신거리는 모습을 참을 수가 없는 듯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두 마족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몇 분 후, 칼로스가 난감한 얼굴로 나에게 다가왔다.

“말로만 알겠다고 하지 머리로는 이해를 못 한 것 같습니다.”

“그래?”

“사실 초월자를 직접 마주해보지 않은 마족은 그 강함을 실감할 수 없는 게 당연합니다. 아무래도 인간은… 그냥 인간일 뿐이라는 인식이 워낙 강해서요. 죄송하지만, 현호 님이 조금만 힘을 보여주시는 게…….”

“알겠어. 백 마디 말보다 실제로 한번 경험해보는 게 훨씬 낫긴 하지.”

무슨 일이든 자신이 경험해야만 받아들이는 분류도 있는 법이다.

사실 애초에 내가 나섰으면 굳이 둘이 피 터지게 싸울 것도 없이 해결되었을 일이었다.

그러나 칼로스가 어떻게 행동할지, 그리고 어떻게 싸우는지 한 번쯤 보고 싶기도 했다.

어느 정도 기운으로 힘을 파악할 수는 있지만 그래도 실전에서 싸우는 건 또 다른 영역이었다.

그리고 지켜본 결과, 칼로스는 생각보다 더 잘 싸웠다.

그동안 막 대하면서 수족으로 부리긴 했으나, 확실히 강하긴 했다.

물론 나와 비교하는 건 무리지만, 그래도 마계 제1군단장인가 하는 자리에 앉을 자격은 충분히 되는 것 같다.

타론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여전히 불신을 가득 담은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당신이 정말로 초월자… 입니까?”

“그래.”

타론은 아까처럼 예의 없이 굴지는 않았다.

그래도 얻어맞은 효과가 있긴 한 것 같다.

“저는 아직 믿기 어렵습니다. 힘을 보여주십시오.”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진심 어린 경고에 잠시 머뭇거리던 타론이 이내 눈을 부릅뜨며 대답했다.

“…상관없습니다.”

“알았다.”

옆쪽으로 눈짓하자 칼로스가 눈치 빠르게 베로와 슬라임들을 데리고 멀어졌다.

완전히 성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크게 문제 있을 거리는 아니다.

나는 타론의 붉은 눈을 마주 보았다.

***

타론은 침을 꼴깍 삼켰다.

눈앞에 선 검은 머리의 인간은 겉보기에 평범할 뿐이었다.

‘못 믿겠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인간이 아닌 것 같은 묘한 느낌이 들었으나, 그게 다였다.

타론이 상대의 힘을 확인하는 여러 방법으로는 이 인간을 그렇게까지 높게 평가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타론은 남자의 검은 동공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깊은 심연 속에 감당할 수 없는 힘이 담겨있었다.

몇 초도 채 지나지 않아, 타론의 몸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물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흠뻑 젖어있었다.

주체할 수 없이 부들부들 떨리던 몸이 털썩 무릎을 꿇었다.

이성으로 하는 행동이 아니라 무의식에서부터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칼로스가 어째서 그렇게 필사적으로 막아섰는지 이제야 알겠다.

그리고 그가 했던 말들이 진심이었다는 것도.

“…그, 그… 만….”

타론은 억눌린 목소리로 겨우 말을 꺼내다가 울컥 피를 토해냈다.

순식간에 압박감이 사라졌지만, 그는 여전히 숨을 헐떡였다.

“속이 꽤 많이 상했을 거다. 후유증이 생길지도 모르니 당분간 푹 쉬는 게 좋을 거야.”

타론은 겨우 고개만 끄덕이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한참 동안 꿇어앉은 채 떨리는 몸이 진정되기를 기다려야 했다.

***

타론은 인간인 내가 그 자신뿐 아니라 칼로스조차 훨씬 뛰어넘는, 그의 능력으로 가늠하기 어려운 방대한 힘을 가졌다는 것을 인정했다.

동시에 나에게 굴복했다.

내가 뭔가를 요구한 것은 아니나, 마계의 마족에게는 그게 당연한 것인 듯하다.

그렇다고 해서 내 곁에 계속 머물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자신의 땅과 휘하의 부하들이 있었고, 칼로스의 땅에 찾아왔던 용건은 진작에 얘기가 끝난 상황이었다.

몸 상태 때문에 타론은 이틀간 칼로스의 성에 머물렀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예정보다 이곳에서 너무 오랜 시간을 보낸 터라 부하들이 저에게 큰일이 난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일정이 지연될 것 같다고 미리 알리긴 했지만, 워낙 의심이 많은 놈들이라… ”

타론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사실 누구도 더 머무르라는 말을 한 적은 없었고, 더 있으라고 잡을 사람도 없었으므로 이유를 댈 것도 없이 떠나면 되는 일이었다.

“지금 꼴을 보면 더 오해하지 않을까?”

나는 타론의 얼굴을 관찰하며 말했다.

나에 의해 받은 충격은 외적으로 확인되는 것이 아니지만, 타론과의 싸움으로 인한 외상은 눈에 훤히 들어오는 것이었다.

일반적인 상처가 아니라서 치료를 좀 받았음에도 아직 얼굴에는 얼룩덜룩한 멍과 혹이 남아있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결국 제 명령을 따라야 하는 놈들입니다. 일부 제 능력에 의심을 품는 자들이 생길 수도 있겠으나 그건 제가 알아서 해결해야 하는 부분이겠죠.”

칼로스가 고개를 끄덕이고 손가락을 튕겼다.

스켈레톤 한 마리가 상자 하나를 들고 와서 옆에 섰다.

“바이콘을 재료로 만든 블랙티다. 며칠 전에도 한 잔 먹어봤으니 뭔지는 알고 있겠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나 때문에 얼굴이 그렇게 되었으니… 받아주게.”

“이 귀한 것을…. 감사합니다. 칼로스 님.”

타론이 공손하게 상자를 받아 들며 꾸벅 허리를 숙였다.

그 모습을 옆에서 보던 나는 저절로 눈썹이 찌푸려졌다.

저놈의 썩은 물을 아직도 저렇게 신줏단지처럼 모시고 있다니.

워낙 마계에 먹을 것이 없으니 맛보다는 희귀성이나 효능으로 가치를 따지는 것인데, 아무리 그래도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안 되겠군.’

나는 잠시 그들을 두고 게이트를 넘어 식당에 갔다가 돌아왔다.

이 마족들은 인간의 음식을 맛본 적이 없다고 한다.

대륙의 음식을 접할 기회는 있었으나, 열등한 인간의 음식이라는 생각에 무조건 거부했던 것이다.

그놈의 마족으로서의 자긍심이 왜 그런 쪽으로 이어지는 건지는 모르겠다.

얼마 전 새로 만든 사과잼 세 통과 식빵 한 봉지를 챙겨 나왔다.

“이게 뭡니까?”

“인간들이 먹는 음식. 한 번만 먹어봐.”

“…….”

차마 싫다는 말은 못 하는데, 침묵으로 먹기 싫다는 티를 낸다.

“자, 받아.”

거부할 수 없는 타론은 결국 잼을 바른 빵 한 조각을 받아 들었다.

“먹어.”

“…….”

그리고 무슨 오물이라도 먹는 것처럼 싫은 표정으로 빵을 조금 베어 물었다.

“……!”

곧 그의 일그러진 얼굴에 의아함, 그리고 놀라움이 차올랐다.

“어때?”

혼란스러운 듯 눈동자가 자리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굴러다닌다.

그 반응에 은근히 호기심이 생긴 듯 칼로스도 옆에서 대답을 기다렸다.

타론은 마침내 꿀꺽 음식을 삼켰다.

그리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지 잠깐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지금껏 인간의 음식을 먹지 않았던 게 후회되는군요.”

“뭣?”

칼로스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예상했던 반응이 전혀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는 그에게도 식빵에 잼을 발라 주었고, 성질 급한 칼로스는 빵 하나를 통째로 입에 넣었다.

“아니, 이럴 수가!”

칼로스 또한 놀란 듯 눈이 휘둥그레졌다.

역시, 베로처럼 마족의 미각도 인간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던 것 같다.

두 마족은 한동안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살아오면서 미각으로 느낄 수 있는 여러 가지 맛 중 거의 쓴맛만을 느껴왔을 거다.

생각해본 적 없는 맛에 놀랄 만도 하다.

나는 타론에게 빵과 잼, 그리고 오래 보관할 수 있는 간식거리 몇 가지를 챙겨주었다.

영 몸이 좋지 않아 보여서 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병 주고 약 주는 거나 마찬가지지만….’

사실 스스로 자초해서 이 꼴이 된 거니까 조금 다른 상황이긴 하다.

그렇게 챙길 것까지 다 챙긴 타론이 검은 날개를 활짝 폈을 때였다.

“삐이이이!”

“삐이이이잇!”

“삐이이익!”

어떻게 알았는지 성문 안에서 세 슬라임이 짧은 다리로 달려 나왔다.

녀석들은 타론을 둘러싸고 팔을 위로 뻗으며 삑삑거리며 울었다.

타론이 베로뿐만 아니라 슬라임도 탐냈었다고 하던데, 이 녀석들은 잡혀갈 뻔했다는 것도 모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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