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합격 (80/125)

80화. 합격

슬라임들을 내려다보며 타론은 감동한 듯 입을 가리고 중얼거렸다.

“…제가 떠나는 게 서운한가 봅니다.”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겨우 며칠 보는 동안 슬라임들은 내내 타론의 머리를 가지고 놀았다.

그리고 오늘도 잘 살펴보면 슬라임들의 손끝이 향하는 곳은 탐스럽게 윤기 나는 붉은 머리카락이었다.

“삐이이!”

찐빵이를 안아 들었더니 손이 머리카락에 닿을 거리가 되었다.

당연히 자비 없이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찐빵이 때문에 타론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아, 아야야….”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타론은 머리를 털거나 손을 떼어내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기울인 상태로 조금 실망하는 표정을 지었다.

“인제 보니 머리카락 때문이었군요….”

“당연하지. 뭐, 얼마나 봤다고 너 가는 걸 섭섭해하겠어.”

“그건 그렇지만…….”

타론이 계속 미적거리면서 내 눈치를 보았다.

이러다가 하루 더 있다 가겠다 싶어서 나는 나한테 안겨있는 찐빵이를 내밀었다.

“자, 한번 안아보든가.”

“…! 정말 그래도 됩니까?”

“그래. 팔 아프다. 빨리.”

타론이 조심스럽게 찐빵이를 받아들었다.

이미 그에게 익숙해진 찐빵이는 놀라지 않고, 오히려 까르르 웃었다.

“이런 귀여운 생명체가 있다니….”

감격해 하는 타론에게서 나는 다시 찐빵이를 뺏어 들었다.

“이제 좀 가라. 언제까지 여기에 서 있을 거냐.”

“…알겠습니다. 이제 진짜 가보겠습니다, 초월자님, 그리고 칼로스님.”

칼로스가 근엄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타론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챙겨준 짐은 야무지게 손에 들고 있다.

날아오른 타론은 날갯짓 두어 번 만에 꽤 멀어졌다.

볼일도 끝났겠다, 나는 다시 식당으로 돌아가려고 몸을 돌렸다.

그런데 칼로스가 눈치를 살피며 입을 우물거리는 게,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였다.

“안 들어가고 뭐 해? 할 얘기라도 있어?”

“저, 저도….”

“너도 뭐?”

“아까 먹었던 그걸 좀 주실 수 없습니까? 타론은 받아 갔는데, 혹시 저는 안 되는 건지….”

작은 목소리로 말을 꺼낸 칼로스에게도 잼과 빵을 주었다.

그러자 칼로스의 우락부락한 얼굴이 드물게 밝은 미소를 지었다.

며칠 후, 나는 칼로스가 사과잼 바른 식빵을 썩어빠진 블랙티와 함께 먹는 것을 보았다.

눈살 찌푸려지는 조합이지만, 그래도 조금은 발전이 있는 거로 생각하기로 했다.

***

대광 정육점의 두 형제가 나란히 앉아 한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형 황진규가 투덜대며 입을 열었다.

“너는 네가 뭘 찍었는지도 헷갈리면 어떻게 해? 심장 쫄려 죽겠네, 진짜.”

“마지막까지 헷갈렸던 문제라서 어쩔 수 없었어. 그만큼 대충 안 찍고 끝까지 고민했던 거야.”

“그건 잘했지만… 아무튼 긴장돼서 일이 손에 안 잡힌다.”

약 2주 전, 황진성은 고졸 검정고시를 쳤다.

나름 열심히 공부했지만 워낙 바닥에서부터 시작해서 합격을 확신할 정도로 안정적인 성적은 아니었다.

시험을 치고 돌아온 첫날, 바로 가채점을 했는데 하필이면 딱 합격선에 걸려버렸다.

게다가 마지막까지 고민하다 찍었던 한 문제의 답을 뭐로 찍었는지도 까먹는 바람에 가채점으로도 붙었는지, 떨어졌는지 확인할 수 없는 상황.

두 사람은 2주 내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시간을 보냈다.

이제 곧 결과가 발표된다.

“아니, 내가 왜 이렇게 떨리지.”

“오버하지 마. 그냥 붙으면 붙는 거고 떨어지면 떨어지는 거지.”

시크하게 대답했으나 황진성 또한 심장이 쿵쾅거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형제는 동시에 침을 꼴깍 삼켰다.

시간을 확인한 황진성이 화면을 새로고침 했다.

접속자가 많은지 잠깐 흰 화면에서 머물렀다가 글자가 나타났다.

“……떴다!”

“합격! 합격이야! 합격!”

“와아아아아!”

“우오오오!”

형제는 양팔을 위로 뻗으며 소리쳤다.

어찌나 크게 기뻐했는지 정육점 밖을 지나치던 행인이 살짝 안을 쳐다볼 정도였다.

거의 포효하면서 좋아하는 형을 보던 황진성은 코끝이 찡해오는 걸 느꼈다.

본인의 의지가 아니라 형 때문에 강제적으로 해왔던 공부였다.

책상 앞에 앉아 글씨를 읽으면서도 너무 하기 싫다는 생각만 하느라 몇 시간 동안 문제집 한 장 넘기지 못한 날도 있었다.

그래도 하다 보니 처음엔 외계어 같기만 하던 글자들도 점점 이해가 됐다.

심지어 아주 가끔은 재미있게 느껴지기도 했다. 형에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떨어질 줄 알았는데.’

황진성은 스스로 머리가 나쁜 편이라고 여겼고, 평생 공부를 통해 뭔가 해낼 수 있을 거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사실 그래서 더 불합격해도 상관없는 척했던 것이었다.

괜히 기대했다가 떨어지면 타격이 몇 배는 더 클 테니까.

“봐라! 하면 된다고 했잖아!”

가까이 다가온 황진규가 동생의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너무 기뻐서 힘 조절 못 하는 형에 의해 황진성은 조금씩 땅에 박히는 것처럼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미소가 가득했다.

그때 황진규가 뭔가 생각난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잠깐, 내 핸드폰 어딨어?”

금방 핸드폰을 찾은 그는 화면을 켜고 연락처를 찾았다.

이 소식을 형님에게 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덕분에 밖으로만 나돌던 황진성이 이렇게 정신 차리고 성실하게 바뀐 것 아닌가.

황진규는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싱글벙글 웃으며 소식을 알렸다.

***

투플러스 한우를 달궈진 불판에 올렸다.

취이이이익!

붉은 고기의 겉면이 빠르게 곧바로 갈색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침샘을 자극하는 고소한 고기 냄새가 코를 찔렀다.

검정고시 합격이라는 기쁜 소식에 축하해주고 싶은 마음에 황진규, 황진성 형제를 식당으로 초대했다.

그랬더니 고기 구워 먹자면서 꽃등심, 안심, 살치살 등 여러 부위를 모둠으로 싸 들고 온 것이었다.

내가 요리해 주려고 불렀는데, 황진규는 절대 그러지 말라며 자기가 팔을 걷어붙였다.

몇 번 사양했지만, 의지가 워낙 확고해서 내가 물러났다.

우리는 평상에 편하게 앉았다.

아니, 사실 황진성은 조금 불편해 보였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익어가는 고기를 빠르게 뒤집으면서 황진규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제가 진짜 여기 와도 되는 겁니까?”

“당연하지.”

“그래도 던전 식당은 헌터들만 다니는 곳이라고 하던데…. 저는 비각성자고, 진성이는 아직 던전에 들어가 본 적도 없는데… 혹시 들키면 안 되고 그런 거 아니죠?”

“걱정하지 말라니까. 진성이는 협회에서 공식 인증받은 헌터고, 너는 내가 따로 허가받아놔서 괜찮아.”

“그런 거면 마음 편하게 있겠습니다. 하하.”

편하게 지켜보는 동안 황진규는 능숙하게 고기를 구웠다.

역시 정육점 주인이라 고기에는 일가견이 있어 보인다.

이렇게 오랜만에 누가 구워주는 고기 먹는 것도 꽤 좋은 것 같다.

“이제 드시면 됩니다.”

황진규가 살치살을 내 접시에 올려주었다.

겉은 바짝 익고, 속은 약간 붉은 기가 남아있다.

고기를 입 안에 넣고 한입 씹자마자 육즙과 함께 고소한 향이 확 퍼진다.

몇 번 씹지도 않았는데 고기가 녹은 듯이 사라졌다.

접시가 비자마자 황진규가 곧바로 다시 고기를 올려준다.

이번에는 고기에 고추냉이를 살짝 올리고 한입에 넣었다.

맛있지만 자칫 느끼할 수 있는 고기 맛에 알싸함이 더해져서 훨씬 잘 넘어간다.

“와, 이거 진짜 맛있네.”

혼자 중얼거린 말에 앞에 앉아있던 황진규가 대답했다.

“제가 계속 구울 테니까 많이 드십쇼. 형님. 이게 다 형님 덕분입니다.”

“이제 그 소리 안 해도 된다니까.”

“어떻게 안 하겠어요. 진성이가 뭐 잘할 때마다 자연스럽게 형님 생각이 나는데요. 그때 그대로 엇나갔으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도 하기 싫습니다.”

그 말을 듣던 황진성은 머쓱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본인을 앞에 두고 이런 얘길 나누니까 좀 민망하긴 하겠지.

나는 고기를 하나 더 집으며 황진성에게 물었다.

“너는 앞으로는 뭐 할 생각이야?”

“저요? 어… 글쎄요….”

황진성은 오늘 나와 처음 마주쳤을 때부터 지금까지 내 눈을 한 번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원래 쑥스러움을 타는 성격은 전혀 아니고, 아직도 마계를 달렸던 기억이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머뭇거리는 황진성을 대신해 황진규가 입을 열었다.

“왜 이렇게 대답을 똑바로 못해? 오늘 이상하네…. 진로는 아직 생각 중입니다. 검정고시를 친 건 그래도 무슨 일을 하면서 살아가든 고졸 학력은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시킨 거고….”

“본인 생각이 제일 중요하지.”

“맞아요. 진짜 이상한 거 아니면 저도 밀어줄 생각이에요. 어머니도 동의하셨고요.”

진짜 이상한 거라는 말에 황진성이 몸을 움찔했다.

지난번 흑룡파에 제 발로 찾아 들어간 일 때문에 찔려서 그러는 것 같다.

황진규가 동생의 접시에 고기를 덜어주며 말했다.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네 의견을 전적으로 존중할게. 나한테 계속 일 배우면서 정육점을 같이 키워나가도 되고, 각성했으니까 헌터 쪽으로 가도 되고. 다른 하고 싶은 게 생겼으면 공부를 더 해봐도 되고. 혹시 지금 뭐 생각 중인 건 있어?”

황진성이 우물우물 고기를 씹으며 대답했다.

“그냥… 돈 많이 벌 수 있는 거?”

“그거면 헌터 일이 맞긴 하겠는데…위험할까 봐봐 또 걱정되네.”

전적으로 존중한다고 해놓고, 속으로는 다른 생각이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동생과 같이 정육점을 일궈나가는 걸 최선으로 생각하는 거겠지.

그때, 뒤쪽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사장님?”

한성 길드의 유희진이 찾아온 것이었다.

요즘 유희진은 얼굴이 활짝 폈다.

원래도 잘 웃고 밝았지만, 요즘에는 느낌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사회생활을 위한 미소에 가까웠고, 지금은 행복해서 저절로 웃음이 나는 것 같았다.

최근 고영한과 유희진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는 이야기가 내 귀에까지 들어왔다.

겉으로 보기에는 두 사람 모두 전과 크게 다르지 않게 서로를 대했다.

막역한 동성 친구를 대하는 것처럼 툭 던지듯이 말하지만, 눈빛이 달라진 건 숨길 수가 없었다.

내 눈에도 그게 보이는데, 더 가까운 길드원들이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사내연애는 복사기도 안다고 하지 않는가.

기존에 두 사람을 놀리던 길드원들은, 진짜 둘이 만나는 것 같은 기류가 흐르자 오히려 함부로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 때문인지 고영한과 유희진은 자신들의 관계를 들킨 줄 전혀 모르는 것 같다.

비밀인 줄 알고 열심히 눈빛만 주고받는 두 사람과 그걸 보고도 모른 척 눈길을 돌리는 길드원들을 구경하는 게 요즘 또 하나의 재미였다.

두리번거리던 유희진이 평상에 앉은 나와 대광 정육점 형제를 발견했다.

“어, 식사 중이시네요? 그럼 나중에 다시 올게요.”

“무슨 일로 오신 거예요? 밥 사드시려고?”

“네. 도시락도 없어서….”

오늘은 공식적으로 한성 길드가 쉬는 날이 아닌데도 던전이 전체적으로 조용했다.

한성 길드의 일정이 꼬이는 바람에 하루 동안 휴게소를 사용하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유희진은 따로 뭔가 처리할 일이 있어서 혼자 휴게소에 들린 모양이었다.

“들어오세요. 요리는 금방 하니까.”

“아뇨, 그래도 식사하시는데 어떻게 그래요. 그냥 따로 나가서 먹든지 하죠.”

“진짜 괜찮으니까 앉으세요. 밥은 제때 먹어야죠.”

자리에서 일어서는 나를 보다가 황진규가 큰 소리로 끼어들었다.

“그러지 말고, 그냥 여기서 같이 드시는 게 어때요?”

“어…. 그래도 제가 끼어드는 건 좀….”

“에이, 괜찮아요. 고기도 셋이 다 못 먹을 정도로 많아요. 형님, 그래도 되죠?”

“나는 상관없지. 너희나 희진 씨나 다 내가 아는 사람들인데.”

“진성아, 너도 괜찮지?”

형의 말을 거스르지 못하는 황진성은 순순히 고개를 끄떡였다.

눈빛이 아까보다 또랑또랑해진 것이 형의 말이라 억지로 따르는 건 또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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