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네 맘대로 해라
‘헌터에 대한 관심인가?’
각성은 했다지만 황진성이 실제 헌터를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인 것 같다.
물론 나도 헌터였지만 지금은 현역에서 일하지 않으니 큰 의미 없고.
유희진은 두어 번 사양하다가 못 이긴 듯 가까이 와서 앉았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하하.”
나는 가운데에서 서로를 짧게 소개하고 인사시켜 주었다.
유희진이나 황진규나 외향적인 성격이라 분위기가 어색하진 않았다.
한성 길드 헌터라는 말에 황진성이 자기도 모르게 몸을 앞으로 내미는 게 보였다.
“어서 드세요. 고기는 많이 있으니까.”
황진규가 고기를 새 접시에 담아 유희진에게 주었다.
“와, 잘 먹겠습니다.”
배가 많이 고팠던지 젓가락 들자마자 김이 나는 꽃등심 한 점을 집어 입에 넣었다.
“으음!”
양 눈썹을 위로 추어올리며 감정을 표현한다.
말하지 않아도 맛있어하는 걸 알 수 있다.
아직 식사 중이었던 나와 황씨 형제들도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고기로 배를 좀 채운 유희진이 우물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갑자기 웬 고기 파티예요?”
“이 친구가 시험에 붙어서요. 축하하는 의미에서 모인 거예요.”
“오오! 잘됐다! 축하해!”
무슨 시험인지는 모르지만 일단 축하부터 하는 유희진이었다.
황진성이 답지 않게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기….”
“응? 뭐 궁금한 거 있어?”
“헌터시면, 몬스터랑은 많이 싸워보셨어요?”
“아, 그게 궁금했구나. 그거야 당연하지. 내가 헌터 생활을 몇 년 했는데.”
“오오…!”
그 대답에 황진성뿐만 아니라 황진규도 눈을 빛냈다.
유희진은 헌터 생활에 관한 이야기를 술술 풀어냈다.
어떤 게 좋고 어떤 게 싫은지, 던전에서 어떤 신비한 일을 겪었는지 등, 헌터 쪽으로 진로 고민을 하는 황진성이 귀 기울여 들을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원래도 말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 별거 아닌 내용도 재미있게 해서 나도 같이 빠져들었다.
“…위험한 일도 있었는데 요즘은 많이 좋아졌어요. 특히 이 던전이랑 계약하고 나서는 사망자는 전혀 없고 크게 다친 사람도 없었어요. 도망쳐서 치료받고, 지원받을 수 있는 장소가 있으니까 돌발 상황에도 쉽게 대처할 수 있고요. 만약 헌터가 될 생각 있으면 우리 길드를 강력 추천하고 싶네요.”
황진성이 각성했다는 얘기를 듣고 유희진이 한 말이었다.
구체적인 숫자로 말한 건 아니지만, 황진성 정도의 등급이면 어느 정도 벌 수 있을지까지도 알려주었다.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황진성의 눈빛이 또렷해졌다.
“한성 길드…. 어떻게 들어갈 수 있어요?”
“지금 공식적으로 신입 헌터를 받는 기간은 아닌데, 등급이 높으면 상시로 받기도 하거든. B급이면 충분히 높은 등급이니까 우리 길드 입장에서야 좋지. 그래도 거쳐야 할 테스트가 있긴 하지만. 관심 있어?”
황진성이 고개를 끄덕였고, 황진규는 그걸 저지하지 않았다.
함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도 헌터라는 직업이 생각보다 안전한 것 같다고 여긴 것 같다.
물론 그 안전성은 내 던전을 이용하는 한성 길드에 한한 것이었다.
그러니 정말 헌터로 살아가려면 지금 한성 길드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잡는 게 좋을 것이다.
“그럼 남는 지원서 가지고 올까? 여기서 바로 작성하면 편하니까.”
“…네!”
이미 고기는 거의 바닥났고, 다들 배도 부른 상태였다.
유희진은 정말로 지원서를 가져왔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황진성은 펜을 들고 인적 사항을 써 내려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진로 고민 중이라고 했는데 순식간에 일이 진행되고 있다.
‘오히려 잘된 걸지도.’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황진성의 능력은 쓰지 않고 그냥 썩히기엔 아까웠다.
아마 정육점에서 일한다고 해도 여러 길드에서 자주 연락을 받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뒤늦게 헌터로 전향하게 될 가능성이 컸다.
차라리 일찍이 이쪽 일에 익숙해지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긴 하다.
슬그머니 고개를 들던 황진성과 눈이 마주쳤다.
황진성은 흠칫 몸을 떨고, 이유를 알 수 없는지 고개를 한번 갸웃한다.
머릿속에는 남지 않았지만 황진성의 무의식 속에는 나에 대한 두려움이 깊이 자리하고 있다.
한성 길드에 들어오면 나와 마주칠 일이 더 많아질 텐데, 그때마다 저런 두려움을 느껴야 할 것이다.
‘뭐 알아서 견디겠지.’
본인이 좀 불편할 뿐이지 나는 별 상관없다.
오히려 자주 얼굴을 보면서 반항적인 성격을 자연스럽게 억누를 수 있으니 더 좋을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애써 눈을 피하는 황진성을 보며 싱긋 미소 지었다.
***
베로는 마계의 검은 땅을 터벅터벅 걸었다.
오늘은 슬라임들 없이 혼자였다.
산책하거나 놀러 나온 것이 아니라 몬스터를 잡아먹을 생각이었다.
맛 때문은 아니고, 몸에 몬스터 고기가 필요한 것 같은 느낌이 있었기 때문이다.
안 먹어도 크게 문제 될 건 없지만 누가 막는 것도 아닌데 참을 필요는 없었다.
한 번씩 다른 몬스터를 쫓고 이로 물어뜯고 싶기도 했으니 본능이 이런 걸 원하는 것인 듯했다.
물론 베로가 거기까지 생각하고 행동에 옮긴 건 아니었다.
“키리리릭!”
“키에에에에!”
지나가던 리자드맨 무리가 베로를 발견하고 경계의 소리를 내었다.
그러나 곧 베로의 정체를 확인하고, 조용해지더니 보이지 않는 곳으로 사라졌다.
베로는 다시 길을 걸었다.
이번에는 맞은 편에서 걸어오던 리치 한 마리와 마주쳤다.
음침한 색의 로브 아래 흰 두개골이 어렴풋이 보였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비어 있었지만, 베로는 리치와 눈이 마주쳤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리치는 베로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고 베로가 편히 길을 갈 수 있게 옆으로 물러났다.
베로는 저 리치를 알고 있었다.
처음 이 땅을 밟았을 때, 슬라임들을 공격하려 했던 놈이었다.
하지만 이제 저 리치는 슬라임을 봐도 공격하지 않았고, 베로를 만나면 고개 숙여 인사했다.
조금 반가워하는 것 같기도 해서 베로도 항상 인사를 받아주었다.
이곳은 칼로스의 땅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마계에 올 때면 항상 이곳으로 왔고, 제집처럼 돌아다닌 지도 몇 달째였다.
이곳에 사는 웬만한 몬스터들과는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과 싸우거나 먹이로 삼을 수는 없다.
타앗!
뒷발로 바닥을 강하게 박찬 베로는 속도를 내어 달렸다.
칼로스의 영역을 벗어나자 주변의 풍경이 다채롭게 바뀌었다.
한참 뒤에 베로는 달리기를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서부터는 칼로스의 땅처럼 안전하지 않다.
마계의 몬스터 케르베로스로서의 본능을 따르고 주변을 경계하며 필요할 경우 힘을 써야만 한다.
물론 웬만한 몬스터들에게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크르르릉….”
콧잔등에 주름을 잡으며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몬스터로서의 본능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주변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킁킁.
고블린의 것으로 짐작되는 몬스터의 체취, 조금 전 흘린 것 같은 피 냄새, 썩어가는 고기 냄새 등.
여러 냄새 중 딱히 흥미로운 것은 발견하지 못했다.
베로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왕이면 너무 약하지 않아서 치고받으며 싸울 수 있는, 또는 빨리 도망쳐서 쫓는 재미가 있는 몬스터가 나타나면 좋겠다.
그런데 그때, 베로의 귀에 아주 작은 소리가 포착되었다.
쌔액쌔액.
무언가가 작게 숨 쉬는 소리였다.
기척이 잘 느껴지지 않아서 베로는 청각에 집중했다.
이렇게 기척을 잘 숨기는 몬스터라면 꽤 강할지도 모른다.
숨소리가 들리는 게 좀 이상하긴 하지만 경계해서 나쁠 건 없었다.
베로는 무성하게 우거진 수풀 쪽으로 발소리를 내지 않고 이동했다.
쌔액쌔액.
바로 앞의 수풀 속에서 미약한 숨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앞발을 들어 수풀을 꺾고 그 안쪽을 보았다.
베로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주 작은, 베로의 큼직한 앞발 정도로 작은 털 뭉치가 가만히 누워있었다.
눈 같기도 하고 솜뭉치 같기도 한 그 생물은 자신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사실도 알아채지 못하고 눈을 감은 채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끄응….
베로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마계는 잔혹할 정도로 철저한 약육강식의 세계.
이 작은 새끼 몬스터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반드시 죽임당하고 말 것이다.
물론 이것은 베로의 먹잇감이 될 수도 있었으나, 딱히 내키지 않았다.
이런 거로는 사냥 본능을 충족할 수도 없었고, 배를 채울 수도 없다.
게다가 이렇게 작고 허약한 걸 보면 옛날 기억이 떠올랐다.
형제들이 죽고 홀로 남았던 그때, 죽어가던 베로는 1분 1초도 편히 쉬지 못하고 도망치고 숨어다니며 목숨을 연명해야 했다.
이 작은 몬스터는 그때의 베로보다도 훨씬 더 약해 보인다.
마음 같아서는 집에 데려가고 싶은데 쉽게 결정할 수가 없었다.
마계에서 흥미로운 것들을 물고 돌아갔다가 현호에게 혼난 적이 이미 여러 번 있었다.
앞으로는 이러지 말라고 단호하게 얘기하는 현호의 모습에 베로는 크게 주눅 들었었다.
베로는 한참 동안 흰 털 뭉치를 내려다보다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기 시작했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베로는 이빨로 연약한 살을 뚫지 않도록 조심해서 털 뭉치를 입에 물고, 뒤를 돌아 신나게 달렸다.
몬스터 고기에 대한 생각은 이제 까맣게 잊었다.
지금은 그런 것보다 이 작은 털 뭉치가 훨씬 더 중요했다.
***
“이, 이게… 뭐지?”
매일 하던 대로 오늘도 자신의 영역을 한 바퀴 둘러보고 성으로 돌아온 칼로스는 이상한 광경에 당황하며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끼잉, 끼이잉….”
손바닥만 한 흰 털 뭉치가 광이 날 정도로 깨끗한 성의 바닥 위를 꼬물거리며 기어 다니고 있다.
언제나 자신의 통제하에 있던 성에 돌발 상황이 발생하는 건 초월자를 만난 후로 종종 있는 일이다.
이제는 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일은 또 상상을 뛰어넘었다.
이제는 물건도 아니고 또 다른 생명체란 말인가!
가까이에 있던 스켈레톤 부하가 칼로스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크르륵. 크륵.”
“지금 그걸 물어본 게 아니잖아! 이게 얼음여우의 새끼라는 걸 내가 몰라서 물어보겠냐고! 어째서 이게 여기에 있냐는 질문이잖아!”
“크르르륵….”
오랜만의 불호령에 스켈레톤들이 달달 떨며 뒤로 물러섰다.
칼로스는 작은 얼음여우에게로 터벅터벅 다가가서 목덜미를 잡아 들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그때 검은 짐승이 빠르게 달려와 그와 얼음여우 사이에서 브레이크를 잡았다.
“웍! 웍! 웍!”
사나운 눈으로 칼로스를 올려다보며 짖는 베로.
칼로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원래라면 케르베로스 따위가 고위 마족, 그것도 마왕 바로 아래인 그를 감히 이렇게 올려다보는 것도 말이 안 될 일이었다.
뭐, 이미 그런 서열 같은 것은 초월자가 나타난 후에 다 깨지고 말았지만, 이렇게 당당하게 자신이 했다고 소리치는 베로를 보고 있자니 열통이 터질 수밖에 없었다.
“이 자식은 뭐가 이렇게 당당한 건지…!”
“웡웡!”
칼로스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으나 차마 베로에게 꿀밤 한 대 때리지도 못했다.
그저 몸을 홱 돌리며 오만상을 찌푸린 채 소리쳤다.
“에잇…! 나도 모르겠다! 네 맘대로 해라!”
“웡!”
잘 됐다는 듯 곧바로 대답하는 베로가 얄미웠지만 뭘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칼로스는 눈에 띄는 스켈레톤 중 둘을 콕콕 짚으며 말했다.
“너랑 너. 너희 둘이 저 털 뭉치를 잘 지켜봐라.”
“크르륵!”
“크륵크륵크륵!”
선택받은 스켈레톤들은 매일 같은 일을 하는 게 은근히 지루했기 때문에 새로운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에 내심 기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