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영웅 길드 (82/125)

82화. 영웅 길드

칼로스이 직속 부하인 스켈레톤들은 성 내에서만 지낸 지도 수십 년째.

밖으로 나가봤자 문 앞에 청소를 나가는 정도였으니 외출다운 외출도 아니었다.

그들은 지금의 안전한 생활에 만족했지만, 그래도 가끔 지루하기도 했다.

그러니 성에 누군가 찾아오는 것은 스켈레톤들에게 즐거운 일 중 하나였다.

직접 밖으로 나갈 기회가 거의 없으니 반대로 성안에서 다양한 일이 일어나는 게 좋은 것이다.

그런 이유로 스켈레톤들은 베로와 슬라임이 성을 찾아오는 걸 싫어하지도 않았다.

종종 말썽을 부려서 주인의 심기가 불편해지긴 하지만 비위 맞추는 거야 항상 해왔던 일이라 어려울 것도 없었다.

“에잇!”

칼로스는 얼음여우가 보기도 싫은지 곧장 뒤돌아 밖으로 나가버렸다.

베로는 뒤늦게 화내는 칼로스가 신경 쓰여 눈을 깜빡였다.

“끼이이잉…!”

그러나 작게 우는 얼음여우에게 금방 시선이 팔려버렸다.

칼로스가 지명한 두 스켈레톤 또한 여우를 보살피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

꼬물꼬물.

딱 이런 표현만이 떠오르는 작은 흰 털 뭉치가 내 앞의 푹신한 방석 위에 놓여 있다.

이 방석은 보통 크기의 두 배가량 되는 커다란 방석이었는데, 크기가 한없이 부족함에도 베로는 이곳을 지정석으로 여기는 듯 종종 방석에 누워 휴식을 취하곤 했다.

슬라임들도 그걸 알아서 베로의 자리는 침범하지 않았다.

얼마 전부터 던전 안에 방석이 보이지 않아서 어디 갔나 했는데, 베로가 칼로스의 성에 옮겨놨던 것이다.

심지어 그 방석을 지금 다른 생명체가 차지하고 있다.

“끼이잉…. 끼이잉….”

털 뭉치가 입을 동그랗게 벌리며 가냘픈 소리를 냈다.

이렇게 작은 새끼는 처음 보지만, 이건 분명 마계의 몬스터 중 하나인 얼음여우였다.

이름 그대로 얼음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갖춘, 여우의 형상을 한 몬스터.

“그러니까 일주일 전에 베로가 얘를 어디서 데려왔다는 말이지?”

내 말에 칼로스가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몇 분 전, 별생각 없이 칼로스의 성에 들렀다가 빨빨거리며 기어 나오는 털 뭉치를 발견했다.

보자마자 느낌이 왔다.

칼로스는 이런 어린 몬스터를 키우는 취미가 전혀 없고, 오히려 성을 더럽힌다고 질색할 놈이다.

그렇다면 이런 일을 할 범인은 베로밖에 없었다.

그렇게 답을 알고서 칼로스를 추궁했더니 예상했던 대답이 나왔던 것이다.

“베로!”

엄하게 이름을 부르자 멀찍이 서서 상황을 지켜보던 베로가 아주 천천히 나에게로 다가왔다.

도망가고 싶은지 힐끔힐끔 뒤를 보는데, 실천에 옮기지는 않는다.

내 바로 앞에 도착한 베로는 꼬리를 아래로 완전히 말아 내렸다.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얼굴을 가까이하자 베로가 딴청 피우듯이 고개를 옆으로 슬쩍 돌린다.

두 손으로 볼을 붙잡고 정면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게 만들자 이제는 흰자가 보이도록 눈동자를 필사적으로 옆으로 굴린다.

어떻게든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것이다.

잘못을 저질렀을 때 베로는 꼭 이렇게 자기가 한 일이 아닌 척, 모르는 척을 했다.

하지만 이런 태도가 오히려 자기가 사고를 쳤다는 것을 자백하는 꼴이었다.

“끼잉. 끼이이잉.”

얼음여우는 혼자 꼬물거리며 방석 밖으로 벗어나려다가 발라당 뒤집혔다.

“어이쿠!”

칼로스가 깜짝 놀라면서 허리를 숙여 얼음여우를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그리고 다시 방석 위에 살짝 올려준다.

나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베로는 마계에 나가서 종종 수상한 것들을 물고 들어오곤 했다.

좋은 습관이 아니라서 따끔하게 혼냈더니 최근에는 이런 일이 없었다.

이제는 안 그럴 줄 알았는데 오랜만에 대형 사고를 친 거다.

살아있는 몬스터를 가져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 새끼 얼음여우는 생존 능력이 거의 0에 수렴했다.

가만히 두면 죽을 게 분명한 약한 개체였다.

몬스터들은 어미에게서 태어나는 종도 있고, 마계 그 자체에서 생성되는 종도 있었다.

얼음여우는 그중에서 어미가 있는 종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새끼 때부터 보살핌을 받는 건 아니었다.

어미는 그저 낳기만 할 뿐, 살아남는 것은 스스로 할 일이다.

새끼 몬스터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인간 아기와 달리 날 때부터 어느 정도의 능력을 갖춘 채 태어난다.

그런데 이 얼음여우는 그 최소한의 생존 능력을 갖추지 못한 채로 태어난 모양이다.

아마 얼음여우의 형제들은 살아남기 위해 제 갈 길 갔을 거고, 혼자 남은 녀석을 베로가 발견한 거겠지.

어쩔 수 없다.

애초에 데리고 오지 않았으면 몰라도, 이미 데려오고 일주일이나 지났다는데 다시 밖에 내다 버릴 수도 없는 일이다.

이 새끼 얼음여우는 아직 너무 약해서 바깥세상에서 몇 분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아래로 말려있던 베로의 꼬리가 위로 조금씩 올라간다.

이 눈치 빠른 놈이 내 표정이 풀리는 걸 알아챈 모양이었다.

약해서 죽는 몬스터는 셀 수도 없이 많다.

이런 식으로 하나둘 주워오기 시작하면 몇 달 만에 군식구가 수십, 수백 마리로 늘어나게 될 것이다.

“이 애는… 적어도 혼자 살아남을 수 있을 정도로 힘을 기를 때까지 책임져야겠지…. 베로, 딱 이번만 받아주는 거야. 앞으로는 절대 이러지 마. 알겠지?”

“웡! 웡!”

긍정의 대답에 베로가 크게 기뻐하며 풀쩍풀쩍 뛰었다.

뒤쪽에 서 있던 칼로스도 표정도 크게 밝아졌다.

“…너는 왜 좋아하냐?”

“내가? 안 좋아했는데?”

곧바로 표정을 굳히며 시치미를 떼지만, 이미 다 봤다.

내가 고민하고 있을 때는 근심, 걱정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책임지자는 말에 표정이 풀리면서 입꼬리가 위로 솟아오르는 것을.

“이런 지저분한 털 뭉치를 데리고 있겠다는 말에 내가 좋아했을 리가 있겠나.”

“그래? 그럼 내가 던전에 데리고 가도 되겠지?”

“…그러면 좋겠군. 이놈의 털 뭉치 때문에 바닥을 쓸어도 쓸어도 흰 털이 생기거든. 지저분하기 짝이 없어.”

칼로스는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얘기하다가 은근히 덧붙여 말했다.

“그런데 내 부하들이 일주일간 그 녀석을 돌보면서 노하우가 좀 생긴 것 같던데, 그걸 활용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 뭐, 필요 없으면 됐고.”

칼로스는 아무래도 얼음여우를 자기 성에 두고 싶은 것 같다.

나는 웃음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할지는 천천히 생각해보고, 일단 이름부터 지어줘야겠어. 계속 털 뭉치라고 부를 수는 없으니까.”

“이름은… 귀염둥이가 어떤가?”

“뭐?”

“아니 아니, 그냥 해본 말이었다. 못 들은 거로 해.”

“…….”

귀를 의심하게 하는 발언이었다.

아무래도 이 거대한 마족은 일주일 사이에 새끼 얼음여우의 귀여움에 푹 빠져버린 것 같다.

체면상 필사적으로 아닌 척하려는데 그게 자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귀엽긴 해.’

나는 허리를 숙여 새끼 얼음여우를 두 손바닥 위에 들어 올렸다.

딱 두 손안에 들어오는 조그마한 얼음여우는 솜사탕 같기도 하고 흰 구름 같기도 했다.

“구름이로 하자.”

“구름이?”

칼로스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표정을 굳혔다.

생각해보니 그럴 만도 하다.

마계 중에서도 이곳 칼로스의 땅은 구름조차 항상 칙칙한 회색이었다.

그러니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구름의 이미지는 이 얼음여우와 잘 맞아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무를 생각은 들지 않았다.

못마땅해하는 칼로스를 보면 오히려 더 놀리고 싶어진다.

“그래, 구름이. 괜찮지?”

“…뭐…. 괜찮지….”

대답과 다르게 칼로스의 눈썹 끝이 미세하게 쳐졌다.

“이제 네 이름은 구름이다. 알겠지, 구름아?”

“끼이잉….”

얼음여우가 우는 소리를 내며 내 손바닥 위에 편안하게 자리 잡았다.

머리에서부터 꼬리 끝까지 동그랗게 몸을 말면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금방 고르게 숨을 쉬며 잠에 빠져들었다.

이렇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군식구가 갑자기 하나 더 늘게 되었다.

***

달그락. 달그락.

적막 속에서 간간이 식기가 그릇을 스치는 소리만 들려온다.

던전 식당 내부는 전에 없이 싸늘한 분위기였다.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평소보다 많은 편이다.

그런데 분위기가 이런 이유는, 이곳에 바로 영웅 길드 사람들이 방문했기 때문이었다.

영웅 길드는 4대 길드 중 하나였으나, 규모와 사업적 수익은 나머지 세 개의 길드보다 훨씬 더 뛰어났다.

사실상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하고 큰 길드였고, 누구도 그 사실에는 반박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 입지가 몇 달 전부터 크게 흔들리고 있다.

한성 길드가 던전 식당과 계약 직후부터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이는 것이다.

고작 몇 개월 사이에 모두가 놀랄 정도로 두 길드 간의 격차가 좁혀졌다.

최근에는 앞으로의 성장 가능성을 차치하고서도 한성 길드를 최고 길드로 꼽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영웅 길드의 단단했던 입지가 조금씩 흔들리는 실정이었다.

영웅 길드에서 한성 길드가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를 모를 리가 없었다.

내 신상이 알려진 후부터 지금까지 그들은 꾸준히 나에게 접촉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할지 뻔해서 제대로 받아준 적은 없었지.’

그렇다고 영웅 길드에서 몰상식하게 집으로 직접 찾아오거나 귀찮을 정도로 전화를 걸진 않았다.

만나기도 전에 비호감이 되는 건 그쪽에서 가장 원치 않는 결과였을 것이다.

그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연락이 오는 정도였다.

그런데 오늘, 무작위로 연 게이트를 통해 사냥 중이던 영웅 길드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온 것이다.

그중에는 S급 헌터 이우석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나에게 악수를 건네며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직접 만나 뵙게 되어 정말 기쁘다면서.

그 모습을 그 자리에 있던 한성 길드원들이 못 봤을 리가 없었다.

이우석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S급 헌터 중 하나였으니까.

이우석과 영웅 길드원들은 우선 자리에 앉아 음식을 주문했고, 그때부터 분위기가 이렇게 싸늘해진 것이다.

헌터들은 평범하게 식사를 하면서 직접적으로 부딪치지는 않고 눈빛으로 서로를 견제하고 있었다.

나는 방관자로서 그저 내 할 일을 하면서 한 발짝 뒤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

‘저러다 체할 것 같은데.’

계속 식사를 하긴 하는데, 온 신경이 서로에게 쏠려있는 게 내 눈에도 보일 정도였다.

금방이라도 일이 터질 듯한,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

영웅 길드 소속 S급 헌터 이우석.

그는 자신을 주시하는 한성 길드원들의 시선을 느끼며 태연하게 밥을 떠넣었다.

물론 겉보기에 태연했던 것이지, 실제로는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 밥맛이 제대로 느껴지지도 않았다.

이 순간은 수 개월간 그렇게나 애타게 기다려왔던 기회였다.

던전 식당의 존재를 알게 되고, 그 가치를 깨닫고 애타게 찾아다녔을 때는 이미 한발 늦었을 때였다.

일찌감치 한성 길드에서 잡아챘고, 그 효과를 지금 기대 이상으로 톡톡히 보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로 한성 길드가 영웅 길드를 완전히 뛰어넘게 될 것이다.

‘늦었지만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지.’

던전 식당이 한성 길드와의 계약을 파기하고 영웅 길드와 계약하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안 된다면, 다음 계약이라도 영웅 길드에서 미리 선점해놔야 한다.

어려운 일이겠지만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때문에 지속해서 최현호와 접촉하고자 했으나, 그 또한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다른 몇몇 길드에서 그의 집을 직접 찾아갔다가 아주 많이 불쾌해했다는 정보를 들어서 직접 방문은 할 수 없었고, 우연을 가장해 식당을 방문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러나 던전 식당으로 들어가는 게이트를 찾는 것은 노력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많은 인력과 시간을 들였음에도 영웅 길드는 던전 식당으로 들어가는 게이트를 찾지 못했다.

운이 따라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오늘, 던전 식당을 찾으려는 목적이 아닌, 평범한 사냥 중에 우연히 식당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이우석은 식사하는 척 자연스럽게 대화를 시작할 타이밍을 노리고 있었다.

따갑게 노려보는 한성 길드원들은 이우석이 입을 여는 순간 앞을 막아설 태세였다.

그들도 이 던전의 중요성은 잘 알고 있으니, 만일을 위해 사장과 이우석의 접촉을 막고 싶은 것이다.

이우석은 만일 이들이 정말로 방해한다면 무력이라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 통로 쪽에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성 길드의 S급 헌터 성민혁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