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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켜봐 (85/125)

85화. 비켜봐

구름이가 품에 파고들자 칼로스는 자기도 모르게 광대가 위로 치솟는 걸 느꼈다.

‘새끼라는 것은 참으로 신비하구나.’

오랜 세월을 마계에서 살았지만, 칼로스는 몬스터의 새끼와 이렇게 직접 접촉해본 적이 없었다.

거칠고 사납고 서로 물고 뜯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놈들의 어린 시절이 이렇게나 귀여울 수 있다니.

칼로스는 내심 이 얼음여우가 성장하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크륵, 크르르륵!”

그때 스켈레톤 두 마리가 다급하게 달려오며 소리쳤다.

“뭐? 지금?”

칼로스는 덩치에 맞지 않는 엄청난 순발력으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는 바닥에 닿아 흐트러진 털을 빠르게 정리하고, 얼음여우를 보느라 히죽히죽 올라갔던 광대를 문질러 자연스러운 무표정을 만들었다.

저벅저벅.

이제 너무 익숙해진 발걸음 소리와 함께 등장한 남자.

초월자의 등장에 칼로스는 목소리를 깔고 입을 열었다.

“…왔는가.”

“뭐 하고 있었냐?”

칼로스가 허리를 숙여 구름이의 뒷덜미를 집어 들었다.

구름이는 순하게 움직이지 않고 대롱대롱 흔들리기만 했다.

칼로스는 짐짓 화가 난 척 목소리를 높였다.

“이 지저분한 얼음여우를 혼내고 있었다. 바닥에 밥을 다 흘리면서 먹는 바람에 괜히 청소를 한 번 더 해야 했단 말이다!”

“직접 청소하는 것도 아니면서 왜 이렇게 열을 내?”

“그래도 내 성이 더럽혀지는데 기분이 좋을 리가 없지 않나. 에잇, 이 꼬질꼬질한 놈. 며칠 전에 씻겼는데 왜 또 털이 회색빛이 되어가는 건지.”

그러면서 구름이를 자연스럽게 안아 들었다.

새끼 얼음여우는 칼로스의 몸에 비해 너무 작아서 두 손으로 소중하게 쥐고 있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워 보일 정도였다.

“구름이 상태는 어때?”

“…아주 많이 먹고 많이 자고 많이 싼다. 온종일 하는 거라곤 그거밖에 없으니, 쯧쯧.”

“새끼가 그것만 잘하면 최고지. 근데 넌 아직 구름이가 마음에 안 드나 보네?”

“내 성을 더럽히는 이 몬스터를 내가 왜 마음에 들어 해야 하는 건가.”

최현호는 속으로 몰래 웃었다.

처음에는 진심으로 구름이를 싫어했던 칼로스였지만, 요즘에는 그 귀여움에 푹 빠져 있다는 걸 다 알고 있었다.

자기는 잘 숨긴 줄 아는 모양이지만, 구름이에게 혀짧은 소리를 내는 걸 이미 몇 번이나 들었다.

“흐음, 그렇게 싫은 건가? 구름아, 이리 와!”

“끼잉! 끼잉!”

얌전히 칼로스의 품속에 있던 구름이가 갑자기 바둥거리다가 뒷발로 칼로스의 가슴을 박차며 뛰어내렸다.

탓!

조그만 얼음여우는 제 다리를 굽히며 안정적으로 땅에 착지했다.

도도도도도!

그리고 짧은 다리를 앙증맞게 움직이며 현호에게로 달려갔다.

현호는 허리를 숙여 구름이를 안아 들었다.

‘조금 묵직해졌는데?’

두 손안에 딱 들어왔던 몸도 이제 손바닥 바깥까지 튀어 나갔다.

고작 며칠 지났을 뿐인데 성장했다는 게 실감되는 걸 보면, 역시 어린 몬스터는 성장이 빠른 듯했다.

“낑, 끼잉.”

구름이가 현호의 가슴팍에 머리를 비볐다.

자기 딴에 좋다는 표현을 하고 싶은 거였다.

“어, 어째서…!”

그 모습을 보던 칼로스가 허망하게 소리쳤다.

“싫다면서 뭘 그렇게 서운해해?”

“서운한 게 아니라, 이건 너무하지 않나! 종일 밥 주고 털 빗겨주고 놀아준 건 난데, 나한테는 저렇게 비비적거린 적이 없단 말이다! 게다가 뒤도 안 돌아보고 그렇게 도망쳐버리다니!”

사실 칼로스는 구름이를 위해 꽤 많은 일을 직접 처리했다.

스켈레톤에게 모두 맡겨도 되는 거였으나, 자꾸 보려고 주변을 얼쩡거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것저것 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구름이가 극진히 보살펴준 칼로스보다 현호에게 더 애정을 표하는 것은 그렇게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이 조그만 얼음여우도 마계의 일원.

아직 새끼임에도 강한 자를 따르고, 힘에 이끌리는 본능이 있었다.

또한 스스로의 힘이 온전하지 않은, 아직 완전히 자라지 않은 새끼였기에 오히려 더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는 강자를 따르게 되는 것이었다.

칼로스도 그 사실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섭섭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최현호가 칼로스에게 선심 쓰듯 말했다.

“정 싫으면 말해. 내가 던전으로 데리고 가서 키울 테니까.”

“…뭐 그렇게 엄청 불편한 건 아니고… 어차피 익숙해져서 그렇게 신경 쓰이지 않는다. 그냥 둬도 돼.”

툴툴거리면서 말하지만, 들어보면 아까 귀찮아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내용이었다.

어린 새끼를 키우는 건 손이 많이 가고 성가신 게 당연할 텐데, 그보다 좋은 마음이 큰 것 같았다.

현호는 칼로스가 저 덩치로 혀짧은 소리 내는 게 꼴 보기 싫었지만, 그래도 구름이를 아끼는 게 기특해서 내버려 두기로 했다.

쌔근쌔근.

규칙적인 숨소리에 아래를 보았다.

아직 잠이 많은 어린 얼음여우는 현호의 품에서 곤히 잠들어 버렸다.

***

올해로 19살이 된 소년 황진성.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홀로 길을 걸고 있었다.

“흠~ 흠~ 흠~”

그냥 아무렇게나 느낌대로 흥얼거리던 그는 갑자기 히죽 입꼬리를 올렸다.

혼자 뭔가 생각하는 듯 입을 씰룩거리다가 결국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소리 내 웃었다.

“크크크크! 키키키키킥!”

그 모습에 마주 오던 사람 몇 명이 슬금슬금 방향을 틀며 멀어졌으나, 황진성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누가 어떻게 보든 그게 뭐가 중요한가.

지금 그에게 가장 중요한 건 이 순간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었다.

‘이제 나는 한성 길드 헌터다!’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크게 소리치고 싶었지만 인내심을 발휘하여 그것만큼은 참아냈다.

그는 어제 한성 길드 신입 헌터가 된 것을 환영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합격 소식이 너무나 기쁘고 즐거웠는데, 사실 어제는 그런 감정을 느끼는 자신이 당황스럽기도 했다.

황진성이 몇 주 전 던전 식당에서 지원서를 쓸 당시만 해도 한성 길드에 반드시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건 아니었다.

유희진의 이야기를 듣다가 혹해서, 지금이 좋은 기회인 것 같아서 어쩌다가 지원서까지 작성하게 된 것이었다.

심지어 그 직전에는 헌터 생활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중이었으니, 당연히 한성 길드에 들어가는 게 절실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한성 길드에 들어가기 위해 협회에서 받지 않았던 다른 검사도 시행했고, 각종 테스트에 면접까지 거쳐야 했다.

생각보다 까다로운 과정이었다.

한 단계, 한 단계 노력하며 통과하다 보니 점점 더 욕심이 생겼다.

나중에는 합격하지 못할까 봐 불안하기까지 했다.

또한, 반강제로 친 거나 마찬가지였던 검정고시와 달리, 한성 길드 신입 헌터가 되겠다는 결정은 그 스스로 한 것이었다.

그 과정과 노력을 생각하면 뿌듯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열심히 해봐야지.’

황진성은 드물게 진지한 태도로 다짐했다.

학교조차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자퇴했던 그에게 온전히 자신을 인정해주는 곳이 생겼다.

거의 처음으로 느끼는 소속감에 아직 일을 시작하지도 않은 한성 길드에 대한 애정이 솟아났다.

또한 4대 길드이자 요즘 최고의 성장세를 보이는 한성 길드의 일원이 되었다는 게 너무 자랑스러웠다.

황진성은 머릿속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초반부터 엄청난 성과로 인정받고 승승장구하는 자신의 모습은 점점 더 나아가 길드장의 자리에 앉는 모습으로까지 발전했다.

“흐흐흐흐.”

그는 김칫국을 마음껏 들이켜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렇게 즐거운 마음으로 길을 걷고 있을 때였다.

황진성의 눈에 이상한 광경이 보였다.

‘쟨 뭐 하는 거지?’

강가의 난간에 붙어 선 여자아이가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꽤 아슬아슬해 보이는 모습에 황진성이 다가갔다.

“거기서 뭐 하는 거냐, 꼬마야. 그러다 떨어진다.”

“저는 안 떨어져요. 그냥 가방을 빠뜨려서 주우려는 거예요.”

“가방을 빠뜨렸다고? 강물에? 어떻게 그게 되냐? 집어 던지기라도 한 거야?”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빙글빙글 돌리다가…. 그런데 어디 갔는지 안 보여요.”

황진성은 아이의 옆에 서서 강물을 내려다보았다.

“어, 저기 있다.”

“어디요?”

“저쪽에 떠내려가고 있네! 벌써 멀어졌는데?”

황진성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에 정말로 분홍색 작은 가방이 동동 떠내려가고 있었다.

“우와! 찾았다!”

아이는 기뻐하며 활짝 웃었다.

그 모습을 보고 황진성은 혀를 찼다.

주울 수도 없는데 눈에 보인다고 좋아하는 게 아무리 어린 애라도 좀 모자라 보였다.

“쯧쯧. 비켜 봐. 내가 주워줄게.”

“아저씨가요?”

“아, 아저씨라니….”

아직 20살도 안 된 황진성은 처음 들어보는 호칭에 약간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이제 초등학교에 들어갔을까 말까 한 아이의 말이라 뭐라고 하는 것도 이상했다.

황진성은 애써 아저씨라는 말에 신경 쓰지 않으려 하면서 말했다.

“그래. 네가 저걸 어떻게 줍겠어? 설마 물에 직접 들어가서 가져오려고 했던 거면 그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거야. 그러다 진짜 죽어.”

“나도 주울 수 있는데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일단 옆으로 나와 봐.”

황진성의 손에 아이가 옆으로 밀려났다.

그는 빠르게 좌우를 살피며 쓸 만한 식물을 찾아보았다.

‘보자, 꽃줄기는 너무 연약하고, 저 나무는 너무 멀리 있고…. 오, 저거면 될 것 같은데?’

물 가까이에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작은 식물이 보였다.

저걸 이용하는 게 최선일 것 같았다.

저 가방을 건져내는 데 성공하면, 이 꼬마의 눈빛에 존경과 감사가 깃들 것이었다.

각성자를 만났다는 사실에 놀라워하고, 능력을 보고 감탄할 것이다.

영화에 나오는 히어로의 모습을 떠올리며 황진성이 신경 써서 멋있게 미소 지었다.

“놀라지 마라, 꼬마야.”

그리고 오른손을 앞으로 힘차게 뻗었다.

사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동작이었으나, 차려자세로 능력을 쓰는 건 밋밋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촤아아악!

의도한 대로 앞쪽에 있던 식물의 줄기가 쭈욱 길어지면서 강물 위로 뻗어나갔다.

“우와. 아저씨 각성자였어요?”

놀란듯한 아이의 반응에 황진성의 기분이 좋아졌다.

생각보다 반응이 격하지는 않지만, 원래 차분한 성격이면 그럴 수도 있을 거라 여겼다.

물 위를 가르는 녹색 줄기는 자신이 보기에도 상당히 멋있어 보였다.

그러나….

“엇.”

줄기의 성장 속도가 점차 느려지더니, 양쪽에서 끈을 당긴 것처럼 팽팽해졌다.

‘이런, 아까랑 위치가 달라졌잖아? 더는 못 키우는데….’

강물은 멈추지 않고 흘렀고, 그래서 가방도 그가 처음 발견한 위치보다 몇 미터 더 멀어져 버린 것이다.

황진성의 마나도 한계에 도달하여 기껏 자라난 줄기는 힘을 잃고 아래로 툭 떨어졌다.

비정상적으로 길어진 줄기는 물살에 휩쓸려 볼품없이 흐느적거렸다.

생각했던 것처럼 되지 않아 민망해진 황진성은 목소리를 깔고 입을 열었다.

“……이건 안 되겠다. 포기해라, 꼬마야. 인생을 살다 보면 포기해야 할 때도 있다. 모든 것을 다 이룰 수는 없는 법이니까.”

있어 보이는 그럴싸한 말로 마무리하며 떠나는 게 그나마 자존심을 지키는 길이었다.

“에이…. 그냥 내가 할게요.”

아이가 내뱉은 말에 황진성은 조금 당황했다.

“네가 한다고? 물에 들어가면 안 된다니까!”

“안 들어가니까 걱정 마요.”

덤덤하게 대답한 아이가 다시 난간을 붙잡고 아래를 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저 멀리 떠내려가는 분홍색 가방 주변으로 이상한 움직임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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