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요리해줄게
가방을 기점으로 강물이 회오리 모양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저게 뭐지?”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황진성이 한 발짝 뒷걸음질 쳤다.
회오리치던 물은 기둥처럼 위로 조금씩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아이의 분홍색 가방이 있었다.
수직으로 솟아나던 물기둥이 기우뚱 기울어졌다.
그리고 여자아이와 황진성이 있는 방향을 향해 빠르게 분출되었다.
푸아아아악!
“으아아악!”
깜짝 놀란 황진성이 두 팔을 들어 앞을 막았다.
전투 경험이 거의 없는 황진성에게는 갑작스러운 상황을 각성 능력으로 대처할 만한 순발력이 아직 없었다.
그러나 황진성의 예상과 달리 물기둥은 그에게 쏟아지지 않고, 속도를 늦추어 안정적으로 아이의 앞에 멈췄다.
“고마워, 엘시스.”
아이는 해맑게 웃으며 자신의 바로 앞에 멈춘 물기둥 속의 분홍 가방을 꺼냈다.
그러자 물기둥은 스르륵 한강으로 내려앉아,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고요해졌다.
“뭐, 뭐야. 너 설마… 각성자였어?”
“내가 할 수 있다고 했잖아요.”
아이는 가방을 열고 뒤집어서 물을 탈탈 털어냈다.
황진성은 멍하니 자신의 허리까지밖에 오지 않는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알고 있던 수(水)마법과는 차원이 달랐다.
대체 물을 어떻게 저런 식으로 다루는 건지, 어느 정도 능력을 갖춘 건지 감도 오지 않았다.
‘나랑은 스케일이 다르잖아.’
지나가다 만난 꼬마가 이런 어마무시한 각성자였다니, 황진성은 황당해서 할 말을 잃어버렸다.
“아저씨, 괜찮아요?”
가방을 탈탈 털어낸 여자아이가 어이가 없어서 눈만 깜빡거리는 황진성에게 다가왔다.
멍하니 아이를 쳐다보던 황진성은 갑자기 기겁하며 뒷걸음질 쳤다.
“히익…!”
아이의 옆에 이상한 형체가 보였던 것이다.
푸른빛의 커다란 덩어리 같은 게 여자아이에게 딱 달라붙어 있었는데, 그 기운이 어마어마했다.
“왜 그래요?”
“가, 가까이 오지 마! 그건 또 뭐야!”
아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더 다가오는 바람에 황진성은 볼썽사납게 엉덩방아까지 찧었다.
“그거요?”
“네 옆에 있는 시퍼런 여자!”
“어어? 엘시스가 보여요? 아저씨 눈에?”
아이의 표정이 크게 밝아졌다.
정다은의 옆에는 정령체로 모습을 드러낸 물의 정령왕 엘시스가 있었다.
식물 또한 자연의 일부, 그렇기에 식물을 다루는 능력이 있는 황진성은 정령에 대한 감각도 상당히 뛰어났다.
그래서 일반인은 볼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는 엘시스의 존재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친구…. 익숙한 느낌이 드는데?]
엘시스는 혼잣말을 하며 황진성에게 스르륵 다가갔다.
압박감이 더해지자, 황진성은 거의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흐음, 나중에 물어보지 뭐. 다은아, 나는 이만 가볼게.]
“응! 가방 주워줘서 고마워, 엘시스!”
[아, 맞다. 너 또 가방 휘두르면서 다니다 그랬지? 내가 그러다 다른 사람한테 맞을 수도 있고, 이렇게 날아갈 수도 있다고 했잖아. 앞으로는 그러지 마.]
“사람은 없는 거 보고 그랬어. 아무튼 알았어. 이제 안 그럴게.”
엘시스가 짐짓 엄하게 훈계했으나, 정다은은 무서워하지 않고 헤헤 웃으며 대답했다.
애정 어린 잔소리라는 걸 알아서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잠시 후, 엘시스는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고, 황진성은 그제야 크게 숨을 내쉴 수 있었다.
“후우우우….”
자신을 공격하려는 게 아닌 건 알았지만, 갑작스럽게 접한 거대한 힘에 덜컥 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눈에는 엘시스는 흐릿하게 보였고, 목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눈앞의 작은 여자아이가 저 놀라운 존재와 이야기를 나눴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황진성과 정다은은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쥔 채 나란히 앉았다.
정령왕이 사라지고, 혼란스러워하는 황진성에게 아이가 계속 흥미를 보였던 것이다.
자기 친구가 보이냐며 졸졸 따라오려는 아이를 떼어내려다가 마음을 바꿔 그냥 몇 마디 얘기나 나눠보기로 했다.
황진성은 힐끗 옆을 보았다.
쭈쭈바를 쪽쪽 빨아먹고 있는 아이는 전혀 특별할 거 없어 보이는 평범한 여자아이일 뿐이었다.
‘이 쪼그만 애한테 그런 힘이 있다니….’
빠르게 쭈쭈바 하나를 해치운 아이가 황진성에게 물었다.
“아저씨, 어떻게 엘시스를 본 거예요? 아무도 눈치 못 채던데.”
“나도 몰라. 그냥 눈에 보였을 뿐이야. 그보다 넌 정체가 뭐냐?”
“정다은인데요.”
“이름을 물은 게 아니라 아까 네가 했던 일이랑 네 옆에 있던 이상한 것에 관해 물은 거야. 대체 뭐 하는 애냐, 넌?”
“이상한 게 아니라 정령이에요. 그리고 저는 각성자 학교에 다니고 있어요.”
“그래…. 벌써 각성자 학교에 다니고 있다고….”
놀랍지는 않았다.
충격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이렇게 어린 애가 각성자면 각성자 학교의 학생일 것이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들이 인류의 미래를 책임질 엘리트들이라는 것은 각성 여부를 떠나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저는 너무 어리고 강해서 특별히 관리해야 한대요.”
정다은은 특별히 자랑하려고 하는 말은 아니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했다.
황진성도 그걸 알 수 있었지만, 그래도 부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대단하네….”
“어제는 시뮬레이션 훈련을 했는데요. 지난번에는 3등이었는데 이번엔 1등 했어요! 엘시스가 도와주면 무조건 내가 1등인데, 엘시스는 학교에서 나서지 않거든요. 계약하지 않아서 힘을 드러내면 상황이 복잡해질 수도 있대요. 그래서 학교에서는 운다인이랑 같이 훈련해요.”
정다은이 재잘재잘 떠들었다.
같은 각성자 학교 아이들이나, 정다은을 은근히 멀리하는 보육원 아이들에게는 이런 자랑을 할 수 없었다.
엘시스가 언제나 잘 들어주었지만, 그녀는 종종 옆에서 정다은의 모습을 지켜보았기 때문에 특별히 얘기하지 않아도 상황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같은 각성자를 만난 김에 하고 싶은 얘기를 마음껏 하는 것이었다.
아까 도와주려 했던 모습 때문에 정다은에게 황진성은 이미 좋은 사람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사실 황진성은 앞뒤 설명 없이 내뱉는 정다은의 말을 다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이 꼬마가 자신보다 훨씬 뛰어나고 대단하다는 건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세상은 넓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길 가다 우연히 마주친 꼬마마저 이렇게 괴물 같은 능력을 가졌는데, 진짜 강한 사람들은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한성 길드 합격 소식으로 아까까지만 해도 자신감에 차 있던 그는 빠르게 풀이 죽어버렸다.
“아저씨, 저 이제 가야겠어요. 만나서 재밌었어요. 안녕!”
“아, 그, 그래….”
자기 할 말을 다 끝낸 정다은은 해맑게 인사하고 가방을 챙긴 후 달려갔다.
그 뒷모습을 씁쓸하게 쳐다보던 황진성도 자리를 털고 일어나 터덜터덜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푸른 머리의 아름다운 여성이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엘시스였다.
“…그러니까 그 노랑머리 남자, 현호 님이 아는 사람이 맞는 겁니까?”
“알지. 삐쩍 마른 남자애. 직접적인 친분은 아니지만 아는 사람 동생이거든. 곧 이 던전에도 자주 찾아오게 될 거야.”
유희진을 통해 황진성이 곧 한성 길드에 들어올 거라는 얘기를 며칠 전 들었던 참이었다.
“역시…. 갑자기 마주친 사람에게서 현호 님의 기운이 느껴져서 깜짝 놀랐습니다. 혹시 특별한 관계가 있는 겁니까?”
“그건 아니고 전에 좀 사고를 쳐서 내가 손을 댔던 적이 있는데 그걸 네가 느낀 모양이야. 네가 정령왕 정도나 되니까 알아챈 거지 크게 영향을 준 것도 아니었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엘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냥 지구에서 우연히 현호 님과 관계있는 사람을 만난 것이 신기했습니다.”
“그래. 그건 그렇고…. 요즘은 음식 먹는 데 관심 없어?”
“그렇다기보다 다은이에게 온 신경을 쏟느라 미처 생각을 못 했던 것 같습니다. 말씀하시니까 오랜만에 뭘 먹어보고 싶습니다.”
정령은 식사하지 않아도 아무 문제가 없다.
뭘 안 먹는다고 배가 고픈 것도 아니니 다른 데로 넘어간 관심이 빠르게 돌아오지 않았던 것 같다.
전에 엘시스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올 땐 좀 귀찮았는데 또 이렇게 오랜만에 오니까 뭔가 먹여주고 싶었다.
“그럼 오랜만에 요리해줄게. 뭐 먹고 싶어? 라면?”
엘시스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오늘은 다른 걸 한번 먹어보고 싶습니다. 그동안 다은이 옆에서 한국의 많은 음식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정령체의 모습이라 직접 섭취할 수가 없어 사람들이 먹는 것을 구경만 했습니다. 지구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변하는 건 너무 큰 힘이 들어서 시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할 수 있어도 안 그러는 게 낫겠다. 네 인간 모습은 너무 이질적이라 눈에 띄거든.”
“알겠습니다!”
“흠, 라면 말고 다른 거 뭐가 좋을까. 지금 당장 생각나는 거 있어?”
잠깐 턱을 만지며 고민하던 엘시스가 뭔가 생각난 듯 눈을 빛내며 외쳤다.
“햄버거… 햄버거가 먹어보고 싶습니다. 가끔 다은이가 먹는 모습을 보았는데 너무 행복해했습니다. 저는 먹는 모습만 봐도 좋았지만 맛이 궁금하기도 합니다.”
햄버거라면 그냥 햄버거 가게에서 사다 줄까 하다가, 수제로 직접 만들어주기로 했다.
그래도 오랜만에 찾아온 만큼 더 맛있게 먹이고 싶었다.
“그럼 20분 정도만 기다려.”
“알겠습니다. 현호 님.”
나는 집으로 넘어가 빈둥빈둥 놀고 있는 최지수를 불렀다.
재료 좀 사 오라고 하자 지수는 벌떡 일어서며 대답했다.
“요 앞 마트로 가면 되지? 다른 거 더 필요한 건 없고?”
“내가 써준 것만 사 오면 돼.”
“알았어. 금방 갔다 올게!”
최지수는 후다닥 외출 준비를 마치고 집 앞 마트로 출동했다.
옛날 같았으면 투덜거리면서 귀찮은 티를 냈을 텐데 요즘은 전혀 그런 기색 없이 싹싹하게 말을 잘 듣는다.
‘이게 다 용돈의 힘이지.’
지수는 정말로 금방 재료를 사 들고 돌아왔고, 나는 식당으로 가서 팔을 걷어붙였다.
주방 앞자리에 앉아 푸른 눈을 빛내는 관객을 앞에 두고 나는 수제 버거를 만들기 시작했다.
‘자, 그럼 패티부터 만들어볼까.’
패티는 수제 버거의 맛을 좌우하는 핵심이다.
빵과 다른 재료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패티가 맛있어야 한다.
제일 먼저 다진 쇠고기와 다진 돼지고기를 섞어주었다.
지방은 약간 포함되어 있어야 너무 퍽퍽하지 않고 부드럽게 먹을 수 있다.
후추와 소금으로 간을 하고, 계란 노른자를 함께 섞어 고소함을 더해주었다.
적당히 섞인 패티를 한 손에 들어오도록 떼어내어 모양을 잡아주었다.
‘이건 잠깐 두고….’
햄버거에 감자튀김이 빠질 순 없다.
깨끗하게 껍질을 깎은 감자를 도마 위에 두고 식칼을 휘둘렀다.
탁탁탁탁탁!
“오오…!”
현란한 손놀림에 엘시스가 눈을 떼지 못하는 게 느껴졌다.
동그랗던 감자는 순식간에 균일한 두께로 길쭉하게 썰려 나갔다.
감자를 튀길 기름을 준비하고, 또다시 햄버거로 돌아왔다.
버거와 감자튀김 두 가지 요리를 멀티로 함께 해야 하니 동시에 끝낼 수 있게 효율적으로 움직여야 했다.
달궈진 팬 위에 버터를 녹이고 지수가 사 온 브리오슈번, 일명 햄버거빵을 올렸다.
빵의 안쪽 부분만 버터 향이 나도록 약하게 익혀주었다.
향긋하고 고소한 냄새가 주방을 가득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