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햄버거 (87/125)

87화. 햄버거

엘시스가 코를 킁킁거리더니 말했다.

“벌써부터 맛있는 냄새가 납니다. 현호 님!”

“그건 그냥 버터 냄새야. 아직 진짜 고기는 굽지도 않았는데, 뭐.”

나는 피식 웃으며 팬 위에 베이컨을 올렸다.

얇고 길쭉한 베이컨이 지글지글 기름을 내며 오그라들었다.

분홍빛이던 베이컨의 색이 붉게 변하는 걸 보고 옆으로 건져냈다.

그리고 베이컨 향이 남은 팬 위에 아까 만들어 둔 동글납작한 고기 패티 4개를 올렸다.

가운데를 조금 눌러서 부풀었을 때 제 모양이 되도록 만져놓았다.

치이이이익!

뜨거운 기름 위에서 패티가 익어가기 시작했다.

아까 꼼꼼히 모양을 잡아줘서 익어가면서도 갈라지지 않았다.

휘익!

패티를 뒤집자 짙은 갈색이 된 아랫면이 위로 올라왔다.

그 위에 슬라이스 치즈를 얹어주었다.

뜨거운 열기에 노란 치즈가 고기 위로 찰싹 달라붙으며 녹아내리는 게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럽다.

“오오오….”

엘시스는 치즈를 얹은 고기 패티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감탄했다.

“이제 거의 다 됐으니까 좀만 더 기다려.”

내 말에 엘시스는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기는 다 구웠고, 감자도 조금 전 여유 있을 때 기름에 넣고 튀기는 중이다.

이제는 버거를 차곡차곡 쌓아주기만 하면 된다.

맨 아래 빵을 놓고 마요네즈와 케첩 약간, 그리고 다진 피클을 넣은 소스를 발라주었다.

그 위에 양상추, 토마토, 양파, 그리고 치즈가 녹은 패티를 쌓고, 또다시 빵과 양상추, 패티, 양파, 베이컨과 소스까지 한 번 더 쌓은 후 빵으로 머리를 덮었다.

패티가 두 개나 든, 큼지막한 수제 버거가 완성되었다.

“와아…!”

감탄하는 엘시스의 앞에 탑처럼 높은 버거와 갓 꺼낸 뜨거운 감자튀김, 그리고 콜라까지 놓아주었다.

완벽한 수제 버거 세트였다.

엘시스의 맞은 편에는 내 몫도 똑같이 세팅했다.

마침 출출하기도 하고, 또 이건 먹는 모습만 지켜보기엔 너무 아쉬울 것 같아서 내 것도 같이 만든 거였다.

“잘 먹겠습니다. 초월자님!”

“그래, 그래.”

“저, 그런데… 이거 어떻게 먹어야 합니까? 다은이는 한입씩 크게 베어 먹던데….”

“음, 아무래도 좀 크긴 하네.”

맛있게 만들려다 보니 크기가 많이 커졌다.

이게 수제 버거의 최대 단점이긴 하지.

먹기가 너무 힘들다는 것!

나이프로 썰어 먹다 보면 내용물이 산산이 흩어져 이게 햄버거를 먹는 건지, 샐러드와 함박 스테이크를 따로 먹는 건지 헷갈릴 지경이 된다.

“잠깐만 있어 봐.”

아무래도 햄버거는 손에 들고 한입에 먹는 게 제맛이다.

나는 빠르게 유산지를 챙겨와서 햄버거를 포장하듯 감쌌다.

그리고 버거의 위쪽을 손바닥으로 꾹 눌러 압축시켰다.

엘시스는 나를 보고 똑같이 따라 했다.

적당히 통통한 크기가 된 햄버거는 한입에 깔끔하게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럼, 진짜로 잘 먹겠습니다!”

와앙…!

엘시스가 입을 크게 벌리고서 햄버거를 베어 물었다.

나도 마찬가지로 햄버거를 입에 넣었다.

우물우물.

따뜻하고 고소한 패티에서 육즙이 터져 나온다.

양파와 양상추, 토마토가 아삭거리며 상큼한 식감을 더해준다.

부드러운 브리오슈번과 잘게 다진 피클 씹히는 마요네즈 소스까지.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지는 중에 콜라도 한 모금 마셔주었다.

달콤하게 톡톡 튀는 탄산이 햄버거와 함께 깔끔하게 목으로 넘어갔다.

내가 만들었지만, 파는 것보다도 훨씬 더 맛있다.

“이거… 이거 정말 대단합니다!”

꼴깍 햄버거를 삼킨 엘시스가 감격스러워하며 외쳤다.

“프렌치프라이도 먹어봐.”

“알겠습니다!”

나도 감자튀김 하나를 케첩에 푹 찍어 입에 넣었다.

노릇노릇 잘 튀겨진 감자 맛은 역시 예상했던 대로 맛있었다.

엘시스는 햄버거와 감자튀김, 그리고 콜라를 번갈아 먹었다.

분명 빠르게 먹고 있는데 허겁지겁 먹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게 참 신기하다.

뭘 해도 우아해 보이는 건 아마 정령왕이라서 그런 거겠지.

“역시 이렇게 맛있어서 다은이가 좋아했던 거였습니다. 라면도 맛있지만 햄버거도 정말 마음에 듭니다.”

“또 먹고 싶으면 식당으로 찾아와. 다음엔 내 수제 버거 말고 다은이가 먹는 햄버거를 사다 줄게.”

“그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나는 그 커다란 햄버거를 먹고도 여전히 더 먹을 배가 남아있는 엘시스에게 오랜만에 라면을 하나 끓여주었다.

별다른 재료 추가하지 않고 딱 봉지에 적힌 정량대로 만든 라면은 또 그것만의 고유한 맛이 있다.

뚝딱 라면 한 그릇을 비워낸 엘시스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띤 채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

칼로스의 성 바닥에 앉은 베로는 여느 때보다 초롱초롱한 눈을 하고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베로의 앞에는 흰털이 보송보송한 얼음여우 구름이가 같은 자세로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베로가 숨을 한껏 들이마시고 고개를 치켜들며 소리 냈다.

“어우우우우!”

그 모습을 보고 구름이가 똑같이 고개를 들며 따라 했다.

“아옹!”

“어우우우우!”

“아오올!”

구름이의 목소리는 낑낑거리는 거나 다름없이 가냘팠다.

아직 몸집이 작아서 소리를 길게 뽑아내는 게 어려운 듯했다.

베로는 고개를 좌우로 갸웃거렸다.

‘왜 이걸 잘 못 하지?’라고 생각하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그래도 노력에는 칭찬을 해주고 싶은지 두툼한 검은 발을 구름이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려고 했다.

아마 내가 하는 걸 보고 따라 하는 것 같은데….

“끼힝…!”

힘 조절이 잘 안 되어서 구름이는 베로의 손에 밀려 발랑 뒤집혀 버렸다.

바둥거리는 구름이를 내가 바로 세워주었다.

베로는 미안한 듯 구름이에게 다가가 희고 보송보송한 털을 핥아주었다.

너무 큰 베로와 너무 작은 구름이의 크기 차이 때문에 한입에 잡아먹힐 것 같은 모양이 되었으나 그냥 두었다.

‘사이가 좋네.’

베로와 구름이는 소통이 잘 되는 것 같았다.

여우도 개과 동물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베로를 보고 배운 것인지, 기분 좋을 때 꼬리를 흔드는 등의 의사 표현이 비슷했다.

구름이는 베로가 보일 때마다 졸졸 따라다녔다.

자신을 혼자 남은 자신을 베로가 데려왔다는 걸 아마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베로 또한 구름이의 그런 행동을 귀찮아하지 않고, 잘 놀아주었다.

평소 있는 힘껏 뛰어다니기를 좋아하는 녀석인데, 아직 아장아장 걷는 수준인 구름이와 놀 때는 참을성 있게 한자리에 앉아 있었다.

“웡웡!”

“아오올!”

케르베로스와 얼음여우는 또다시 마주 보고 알 수 없는 대화를 시작했다.

이런 상황이 종종 발생하는 바람에 구름이가 들어온 뒤로 칼로스의 성은 한층 더 소란스러워졌다.

스켈레톤들은 처음 봤을 때보다 지금이 더 활기차 보였다.

표정이랄 게 없는 뼈다귀들이지만 몸짓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내 성에서 이런 하찮은 몬스터들이 큰소리치고 다니는 날이 오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군.”

칼로스는 종종 내 눈치를 보며 이렇게 툴툴거렸으나, 사실 구름이가 귀여워 어쩔 줄 모른다는 걸 알고 있는 내 눈에는 그냥 재밌어 보일 뿐이었다.

***

띠리리링!

머리맡에서 울리는 알람 소리에 여자가 번쩍 눈을 뜨며 알람을 껐다.

여자는 이불 속에서 미적거리지도, 다시 눈을 붙이지도 않고 몸을 일으켰다.

눈가의 흉터, 일어난 직후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정돈된 얼굴의 그녀는 S급 헌터 윤설아였다.

윤설아는 오늘 날짜를 확인하고 바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평소와 다른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으나 이유는 알아채지 못했다.

별일이 아닌 것 같아 무시하고, 평소와 같이 일상을 시작했다.

그녀는 여전히 어느 곳에도 소속되지 않고 홀로 활동해오고 있었다.

어느 길드든 들어가겠다고 하면 쌍수를 들고 환영하겠지만, 이미 혼자 사냥하는 것이 몸에 완전히 익어버렸다.

아무래도 거리낄 것 없이 단독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 자신에게는 가장 맞는 것 같았다.

대신 요즘에는 몬스터만 잡으러 다니지 않고, 시간을 내어 취미활동도 몇 가지 시작해보았다.

살아가는 낙을 찾아보기로 한 것이었다.

아직 푹 빠진 취미는 없지만, 몇 가지 끌리는 것들이 있어 이것저것 체험해보는 중이었다.

이 모든 것은 던전 식당에서 감정을 한껏 쏟아내고 나서 생긴 변화였다.

‘자주 찾아오라고 했었는데….’

던전 식당의 그 잘생긴 사장은 한성 길드를 통한 게이트까지 알려주었는데 막상 그 후로 찾아간 적이 없었다.

그때 펑펑 울었던 것이 민망하기도 했고 다른 여러 가지 일로 바쁘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 후로는 의식적으로 할머니 생각을 많이 했기 때문에 식당의 국수가 떠오르는 일이 줄었던 탓도 있었다.

그동안 윤설아는 서랍 깊숙한 곳에 묻어놓았던 할머니와 가물가물하던 부모님의 사진을 꺼내 보고 추억도 많이 떠올려보았다.

처음에는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눈물이 났는데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

가끔은 재밌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웃을 수도 있게 되었다.

여전히 슬픔은 남아있지만 이제는 혼자서도 잘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대문역이라고 했지?’

생각난 김에 윤설아는 오랜만에 던전 식당에 가보기로 했다.

***

동대문역 옆의 고정 게이트.

그곳은 한성 길드 소유의 던전으로, 직원이 앞을 지키고 있었다.

길드 소유의 던전에 외부인이 함부로 침입하는 것은 남의 집에 무단침입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혹시나 오해받을 수도 있을 것 같아 윤설아는 망설이며 직원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다행히 그는 윤설아의 얼굴을 알아보고 큰 설명 없이 안으로 들어가게 해주었다.

‘또 찾아오라는 말이 진심이었구나.’

이걸로 그때 했던 말이 그냥 빈말이 아니었다는 게 확인되었다.

윤설아는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던전 식당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오랜만에 오셨네요.”

남자는 전에 봤던 그 모습 그대로 윤설아를 반겨주었다.

“네. 좀 바빠서요.”

괜히 머쓱한 기분에 윤설아가 작게 대답했다.

“뭐, S급 헌터시니까 당연히 그렇겠죠. 앉으세요. 오늘도 국수 드릴까요? 아니면 다른 메뉴로 드릴까요?”

“다른 건 뭐가 있죠?”

“그냥 가정식 백반입니다. 반찬이 특별한 건 아닌데 다들 맛있게 드시더라고요.”

“그럼 저도 그걸로 주세요.”

요즘에는 그래도 잘 챙겨 먹으려고 하지만 밥과 반찬을 제대로 차려 먹는 일은 거의 없었다.

혼자 사는 사람들이 보통 그렇듯이 윤설아도 배달을 시켜 먹거나 한 그릇에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요리를 선호했던 것이다.

자리에 앉은 윤설아는 식당 내부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지난번보다 많은 사람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대부분이 한성 길드 전투복을 입고 있었는데, 사장과 친근한 사이인 듯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그중 몇몇이 힐끔힐끔 그녀를 보았다.

원치 않는 유명세로 인해 얼굴이 알려진 윤설아였다.

이 정도는 익숙했기 때문에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윤설아는 주방을 구경하며 식사가 나오길 기다렸다.

여유가 생기자 아침에 느꼈던 위화감이 다시 느껴졌다.

‘뭔가 잊은 것 같은데….’

곰곰이 생각하던 윤설아의 머릿속에 순간 오늘이 그녀의 생일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까맣게 잊고 있었네.’

오늘이 며칠인지는 확인해놓고, 그게 자신의 생일이라는 건 인식하지 못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로, 생일을 특별히 챙기지도, 신경 쓰지도 않았다.

별 의미 없는 날이라 생각했고, 어차피 이제는 자신 이외에 기억해주고 챙겨줄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될 일인데 괜히 열심히 생각했다.

윤설아는 씁쓸한 미소를 삼키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장을 보았다.

그는 음식이 한가득 담긴 트레이를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식사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윤설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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