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럭무럭 (88/125)

88화. 무럭무럭

그녀의 앞에 밥과 가지각색의 반찬, 그리고 미역국이 놓여 있었다.

우연일 뿐이지만 꼭 생일상 같은 기분에 윤설아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그려졌다.

윤설아는 자기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저 오늘 생일이에요.”

“아, 그래요?”

말을 꺼내놓고, 윤설아가 당황하여 다시 입을 다물었다.

‘내 생일인데 뭘 어쩌라고 이런 말을 한 건지….’

오랜만에 찾아와서 생일 타령이라니, 생뚱맞게 헛소리를 한 것 같아서 얼굴이 달아오르려 했다.

그러나 이미 꺼낸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는 법.

윤설아는 그저 속으로 조금 전 자신을 탓할 뿐이었다.

그런 생각이 겉으로는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마침 미역국이 나왔는데 딱 맞춰 오셨네요. 생일이시니까, 뭘 좀 더 해드려야겠는데요?”

“아뇨! 그런 의미로 한 말은 아니고 신기해서…!”

“알아요. 그냥 제가 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니까 부담 갖지 마세요.”

“그래도….”

“어차피 만들 생각이니까 그냥 마음 편하게 있으세요. 아, 대신 조금만 천천히 드시고요.”

“…….”

윤설아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보일 듯 말 듯 끄덕였다.

더 거절하는 게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남자는 씩 웃으며 부엌으로 가버렸다.

***

‘표정이 많이 좋아졌네.’

처음 만났을 때 윤설아는 스치기만 해도 베일 것처럼 날카롭게 날을 세우고 있었다.

그런데도 왠지 모르게 안쓰러운 느낌이 있었다.

약한 고슴도치가 가시를 세워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물론 S급 각성자에게 약하다는 표현만큼 안 어울리는 것도 없겠지만….

별생각 없이 내놓은 미역국인데 마침 생일이라니 꽤 신기한 우연이었다.

갑작스러워서 손이 많이 가는 걸 만들기는 어렵겠지만, 맛있는 반찬 하나쯤은 추가할 수 있었다.

‘어제 재워둔 소불고기가 있었지.’

오늘 저녁에 집에서 먹을 생각이었는데 지금 만들면 딱 될 것 같다.

어차피 집에서 먹을 건 많으니까.

잠깐 게이트를 통해 집으로 건너가서 간장 양념에 숙성된 불고기 거리를 가지고 왔다.

양념이 잘 배어들어 고기 색이 조금 어둡게 변해 있었다.

탁탁탁탁!

양파와 당근, 파, 그리고 버섯을 빠르게 손질하여 고기와 함께 섞어주었다.

그리고 통째로 달군 팬 위에 부어주었다.

치이이익!

달짝지근한 간장 양념 속에서 불고기와 채소들이 함께 익어간다.

몇 분도 걸리지 않아 뚝딱 완성된 소불고기를 윤설아의 앞에 가지고 갔다.

보니까 아직 밥에 거의 손을 대지 않은 것 같다.

“별건 아니지만 이것도 같이 드세요. 그리고 생일 축하해요.”

“…감사합니다.”

윤설아가 조그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얼핏 딱딱한 말투지만 쑥스러움을 감추기 위한 거라는 게 눈에 보였다.

윤설아는 금방 나온 소불고기에 가장 먼저 젓가락을 댔다.

뜨끈한 김이 나는 고기는 밥과 함께 그녀의 입으로 들어갔다.

찝찔하면서도 달달한 간장 양념 맛이 흰 쌀밥과 어우러지면 몇 번 씹기도 전에 녹듯이 사라져버릴 것이다.

옅은 초록빛이 도는 미역국 또한 그 담백한 맛으로 입맛을 돋워줄 것이고.

거기에 무말랭이, 김치 등의 밑반찬들을 중간중간 번갈아 곁들이면 질릴 것도 한없이 먹을 수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윤설아의 앞에는 깨끗한 빈 그릇만 남았다.

잠깐 의자에 기대어 앉아 있던 그녀는 곧 일어나 나에게 다가와서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잘 먹었습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혹시라도 너무 부담 느끼시진 않으셨으면 해요.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 전 제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는 게 제일 기분 좋거든요.”

“그거라면 완전히 성공이네요. 제가 먹어본 불고기 중에 제일 맛있었습니다.”

윤설아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일 것이다.

그냥 봐도 빈말은 절대 못 하는 성격의 사람이니까.

“또 오겠습니다.”

윤설아는 깔끔하게 계산을 마치고 떠났다.

또 오겠다는 말을 남겼으니, 아마 오래지 않아 또 방문할 것 같다.

‘처음 왔을 때도 그랬었지.’

그때도 국수가 마음에 들었는지 또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었다.

한성 길드와 계약도 하기 전이었고, 별다르게 들어올 수 있는 통로도 없었으니 속으로 그건 안 될 거로 생각했었는데 정말로 다시 찾아왔었다.

지금 생각해도 놀라운 일이다.

S급 헌터면서 저렇게 혼자 다니는 것부터가 범상치 않긴 하지만, 만날수록 또 새로운 면이 보여서 알아가는 재미가 있다.

왠지 윤설아와의 다음 만남이 기대되었다.

***

구름이는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다.

처음에는 두 손안에 꽉 차는 흰 털 뭉치 같았던 녀석이 지금은 두 배, 아니 거의 세 배가량 커졌다.

처음 발견했을 때 워낙 작았기 때문에 지금도 여전히 크진 않지만, 그래도 한 달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 정도면 성장 속도가 아주 빠른 것 같다.

오늘은 던전 안의 내 방에 구름이를 데리고 왔다.

종일 돌보는 건 손이 너무 많이 가서 내가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다 자랄 때까지 칼로스의 성에서만 키우게 할 건 아니었다.

미리부터 던전을 들락거리면서 익숙해지게 해서, 나중에 자신이 머물고 싶은 곳을 스스로 선택하게 해줄 생각이었다.

호빵이와 찐빵이, 만두가 무릎을 꿇고 동그랗게 둘러앉아 가운데를 바라보고 있다.

그곳에는 이제 슬라임들의 절반 정도 크기가 된 구름이가 편안하게 옆으로 누워있었다.

“삐이이?”

“삐잇!”

“삐이이익!”

서로 대화하고 고개를 갸우뚱하기도 하면서 젤리 같은 손으로 구름이의 흰 털을 만지작거린다.

이 작은 몬스터가 아직 어리고 보살펴줘야 하는 새끼라는 사실은 처음부터 주지시켜 두었다.

그렇기에 구름이의 살을 꽉 쥐거나 털을 뜯는 행동 같은 것은 전혀 하지 않았다.

구름이는 가만히 누워 눈을 가물거리고 있다.

살짝 차가우면서도 몰랑몰랑한 슬라임의 손바닥이 쓰다듬어주는 손길이 좋은 모양이었다.

슬라임들은 그게 또 신기한지 눈을 떼지 못했다.

코로로롱….

코로롱….

얼마 지나지 않아서 구름이가 눈을 감고 작게 코를 골며 잠들었다.

저렇게 여섯 개의 눈이 뚫어지게 자기만을 바라보고 있는 데다가 조몰락거려지는 중에 잠들 수 있다니.

아무리 해를 입을 상황은 아니라지만 지나치게 무던하다고 해야 하나 태평하다고 해야 하나.

저런 성격의 몬스터는 처음 보았다.

하물며 베로도 처음 만났을 땐 사납게 이를 드러냈었는데.

칼로스의 말에 따르면 처음 베로가 물고 왔을 때부터 공격적인 면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어쩌면 저렇게 순한 성격의 몬스터가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사납게 변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르겠다.

그게 아니면 얼마 버티지 못하고 다른 몬스터에게 죽어버릴 테니, 사납고 공격적인 몬스터들만 남게 되는 거겠지.

‘구름이를 마계로 다시 내보내는 건 안 될 것 같네.’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져야 할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혹시나 야생성이 있고, 자라면서 강해진다면 마계로 돌려보낼 생각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상태를 보니 그건 영 무리인 것 같다.

능력적인 부분은 점점 괜찮아질 것 같다.

종종 미간을 찌푸리고 끙끙 소리를 내며 집중할 때면 얼음여우 특유의 냉기가 느껴진다.

이대로 계속 성장하면 얼음을 만들어낼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질 것이다.

하지만 성격이 너무 순하고 무던하다.

이 녀석을 마계에 혼자 떨궈버리면 자신을 죽이려 다가오는 골렘에게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반가워하다가 곧바로 작살 나고 말 것이다.

게다가, 이미 모두가 구름이에게 너무 많은 애정을 쏟고 있었다.

직접 데려온 베로와 슬라임뿐만 아니라 칼로스와 스켈레톤 부하들까지.

그리고 나 또한 이 작은 얼음여우에게 정이 들어버렸다.

한참 동안 잠든 구름이를 둘러싸고 놀던 슬라임들이 흥밋거리를 찾았는지 다른 곳으로 떠났다.

구름이가 잘 떠지지 않는 눈을 희미하게 떴다.

어정쩡하게 고개를 들고 두리번거리다가 슬라임들이 사라졌다는 걸 알아챘다.

“끼이잉….”

불쌍한 소리를 내던 구름이는 곧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나를 발견하고 꼬물꼬물 기어와 내 다리에 달라붙었다.

여전히 몽롱하게 잠에서 덜 깬 얼굴의 구름이는 몇 초 지나지 않아 다시 고롱고롱 코를 골며 잠들었다.

새끼 얼음여우의 민들레 씨 같은 흰 털은 베로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보들보들했다.

그때 던전으로 들어오는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베로가 돌아왔구나.’

홀로 마계로 외출했던 녀석이 반나절 만에 돌아온 것이었다.

처벅처벅처벅.

잠시 후 발소리와 함께 베로가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녀석의 입에는 기괴한 느낌의, 눈이 대략 10개는 달린 문어 비슷한 몬스터가 물려 있었다.

크기도 커다란 바윗덩어리 정도 되어서 덩치 큰 베로가 물었음에도 다리가 바닥에 질질 끌리고 있었다.

나도 처음 보는 희한한 몬스터였다.

드넓은 마계에는 이름조차 붙지 않은 이상한 놈들도 많으니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웡웡웡.”

문어 닮은 몬스터를 툭 내려놓은 베로가 나와 눈을 마주치고 아주 작은 소리로 짖었다.

잘 자고 있는 구름이가 깨지 않도록 평소보다도 더 작은 소리였다.

“그건 왜 가지고 들어온 거야? 밖에서 먹고 오지.”

“웡웡!”

한 번 더 작게 짖으며 베로가 구름이 쪽으로 문어 몬스터를 끌어당겼다.

빈사 상태의 몬스터는 전혀 반항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거린다..

“구름이한테 먹이려고?”

“웡!”

아무래도 베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구름이를 위해주고 싶었나 보다.

“흠, 잘 먹으려나.”

얼음여우도 잡식성인 것 같지만 아직 몬스터 고기는 한 번도 먹여본 적 없었다.

잠시 후, 눈을 뜬 구름이는 생각보다 맛있게 문어 몬스터의 다리 하나를 물어뜯어서 베로를 기쁘게 했다.

솔직히 몬스터 자체가 워낙 맛없는 놈들이라 구름이가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역시 둘은 뭔가 잘 통하는 것 같네.’

베로를 아끼고 예뻐하지만, 사실 인간인 내가 채워줄 수 없는 부분이 분명히 있었다.

슬라임 또한 베로와 사이좋게 지냈으나, 놈들은 태생적으로 워낙 다른 존재였다.

게다가 호빵이와 찐빵이, 만두는 나로 인해 함께 태어난 거나 다름없다.

때문에 슬라임들은 서로를 완벽히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었고, 베로가 거기에 끼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어쩌면 베로와 구름이는 그렇게 부족한 면을 서로 채워줄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문어 몬스터를 함께 뜯어먹는 케르베로스와 얼음여우를 보며 생각했다.

***

유희진은 요즘 꽤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는 몇 달 전부터 오랜 친구였던 고영한과 진지한 만남을 가지기 시작했다.

지난번 길드원들과의 회식 후, 고영한의 제안으로 두 사람은 잠시 둘이서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술을 조금 마신 상태였으나 정신은 아주 멀쩡했다.

고영한은 사실 오래전부터 유희진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고 말했다.

자신을 이성으로 보지도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걸 알고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모른다.

원래라면 자존심 때문에, 혹시나 진심이 아닐까 봐 방어적으로 대꾸했을 유희진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날따라 유희진의 입에서도 솔직한 마음이 술술 튀어나왔다.

오랜 대화 끝에 유희진과 고영한은 친구가 아닌 연인으로 지내기로 했고, 지금까지 탈 없이 그 만남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길드원들에게는 아직 알릴 생각이 없었다.

주변에서 알게 되면 난리가 날 것이고 그리고 만에 하나 헤어질 경우 더 상황이 복잡해질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사실 대부분이 이미 알아챈 상태였지만 유희진은 아무도 모르고 있을 거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하지만 행복한 나날을 보내는 중에도 마음 한구석에는 깊은 고민이 하나 있었다.

이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몇 년째 그녀를 괴롭히는 문제였다.

어떻게 해야 더 성장할 수 있을까.

앞을 가로막은 높이를 알 수 없는 벽을 넘어서야 할 텐데, 그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

이렇게 정체된 상태로 계속 살아가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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