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민 (89/125)

89화. 고민

대격변 이후 15년.

그동안 수많은 사람이 각성하고 성장했다.

처음 각성하는 순간의 능력은 제각각이지만 경험과 깨달음에 의해 등급을 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과정이 쉬운 건 아니었다.

한계 없이 무한히 성장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으므로, 최초 각성 능력에서 두 단계 이상 승급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게다가 등급이 높을수록 더더욱 승급하기가 어려웠으므로, 최초 각성 등급이 B급 이상인 경우, 십 년도 더 전에 각성했음에도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특히 S급과 A급 사이의 격차는 아래 등급 간의 차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기 때문에, A급에서 S급으로 승급하는 경우는 현재까지 공식적으로 확인된 적이 없었다.

등급 간의 차이는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가며 도달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어떤 경계를 넘어서면서 순식간에 힘이 증폭되는 것이었으므로, A급 중에서 강하다고 자부하는 유희진도 S급에 비하면 어린아이나 다름없었다.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고, 될 것 같은데 안되고….’

A급으로 각성했던 유희진은 벌써 몇 년째 한계에 부딪힌 상태였다.

A급으로서도 이제 최고점에 이른 것인지 더 이상의 발전은 없다.

뭔가 답답하게 막힌 것 같은 무언가를 한 번만 뚫어주면 될 것 같다는 감이 있지만, 정확히 어떻게 해야 할지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유희진의 가까운 곳에는 S급 헌터가 있다.

한성길드 성민혁.

그에게 몇 번 조언을 구해보았으나 실질적인 도움은 되지 않았다.

“모르겠는데. 난 그냥 각성할 때부터 이랬어. 뭐가 막히는 느낌이 무슨 말이지?”

…같은 속 터지는 대답만 돌아올 뿐.

처음부터 공부를 잘했던 사람이 가르치는 것도 잘하는 건 아니다.

자신은 당연하게 깨우친 것을 왜 다른 사람들은 못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공부를 못하다가 노력으로 성적을 올린 사람이 어떤 부분이 어려운지 알고 더 잘 가르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성민혁은 좋은 조언자가 아니었다.

‘정말 나는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인 걸까.’

다들 S급으로 올라가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S급은 그냥 타고나는 거라고 말하지만 미련을 떨치기 어려웠다.

“주변에서는 배부른 욕심이라고들 해요. 너 정도면 충분히 강하고 처음부터 A급으로 각성한 것부터 운 좋은 건데 굳이 S급을 부러워할 거 있냐고. 가진 것에 만족하라고.”

유희진이 투덜거리며 말했다.

그녀는 주방 앞에 앉아있었고, 던전 식당의 사장과 마주 보고 있었다.

간단하게 아침을 먹으러 왔는데, 어쩌다 이런 얘기까지 꺼내게 된 건지 모르겠다.

요즘의 가장 큰 고민이긴 했지만 누군가에게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이상하게도 이 남자 앞에서는 속 얘기가 쉽게 튀어나오는 느낌이었다.

“A급도 충분히 강한 건 맞죠.”

최현호의 대답에 유희진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이 사람이 듣기에도 배부른 소리였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전투 능력이 F급 수준이라는 사람 앞에서 할 얘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충분히 강하다고 그 자리에서 만족하고 안주하는 건 너무 안일한 것 같네요.”

“아….”

“대격변이 일어나고 이제 겨우 십 년이 좀 넘었어요. 안정기에 들어섰다고 하지만 앞으로 또 무슨 일이 터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죠. 어떻게든 더 강해질 생각을 하는 게 정상으로 보이는군요, 제 눈에는.”

정작 본인은 몬스터와 싸우지도 않고 음식 장사를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최전선에서 싸우는 사람에게 더 강해지라고 말하고 있으니 다른 헌터들이 들었다면 상당히 기분 나빠했을 법한 발언이었다.

하지만 유희진은 불쾌하지 않았다.

최현호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굳이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더 발전하고 더 강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당연한 거죠. 그건 이미 정점에 이른 것으로 평가받는 S급 헌터라고 해도 마찬가지일걸요.”

순간 유희진은 최현호의 눈빛이 잠깐 변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항상 평온하고 잔잔한 그의 얼굴에 순간 열망 같은 것이 보였던 것 같다.

너무 순식간이라 잘못 본 건지도 모르겠지만….

‘하긴, 성민혁도 표현하지는 않지만 훈련은 계속하고 있지.’

S급도 아니면서 지금에 만족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고민은 한참 이른 것이었다.

어차피 싸움은 계속해나가야 한다.

주변에서 하는 말에 휘둘릴 것 없이, 가능성이 있든 없든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이 갈 길을 걸어가면 되는 것이다.

달칵.

“다 됐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유희진의 앞에 넓고 납작한 접시가 놓였다.

프렌치토스트와 소시지, 베이컨, 샐러드, 그리고 통통한 노른자가 하늘을 바라보는 써니사이드업이 먹음직스럽다.

최근 유희진은 던전 식당에서 매일 이 브런치를 먹고 있었다.

벌써 일주일째 같은 음식을 먹는데도 질리지 않았다.

쓱쓱.

나이프로 음식들을 한입에 들어갈 크기로 잘랐다.

그리고 노릇노릇하게 익은 프렌치토스트를 메이플 시럽에 찍어 입에 넣었다.

“음, 역시 제 입맛에 딱 맞아요.”

겉면은 설탕을 뿌려 달콤하고 쫄깃하고, 안쪽은 달걀 물에 적셔져 촉촉하고 부드럽다.

발사믹 소스를 뿌린 어린잎 샐러드는 산뜻하게 맛있었다.

유희진은 익숙한 맛을 음미하며 눈앞의 남자를 보았다.

알게 된 지 꽤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신기한 느낌이 있었다.

특별한 거라고는 이 던전을 가졌다는 것뿐인데 주변의 헌터들과 아니, 그냥 다른 사람들과는 뭔가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어떤 점에서 그런지 묻는다면 콕 집어 대답할 수는 없는 미묘한 느낌이지만….

‘능력 자체가 너무 달라서 그런 걸까?’

그것도 아닌 것 같은 게, 그간 만나본 독특한 능력을 갖춘 헌터들에게서는 딱히 특별한 느낌을 받은 적이 없었다.

“뭐 하실 말 있으세요?”

“아, 아뇨. 그냥 맛있어서요.”

눈이 마주치자 남자는 왜 그러냐는 듯 물었다.

유희진은 황급히 눈을 피하며 고개를 저었다.

자기도 모르게 너무 빤히 쳐다봤던 것 같다.

어쨌든 마음은 확실히 가벼워졌다.

그냥 듣기 좋은 말을 해주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아서 더 와닿았다.

유희진은 한층 더 편하게 앉아 앞에 놓인 맛있는 브런치를 해치우는 데 집중했다.

***

‘한계를 규정해놓고 안주해서는 안 되는 거지.’

오늘 유희진에게 했던 말은 스스로에게 한 말이기도 했다.

나는 인간을 초월했고, 내가 속한 이 세계의 누구와 붙어도 이길 자신이 있다.

지금의 평온한 일상이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

하지만 이대로 안주해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몸을 좀 움직여볼까?”

“웍!”

옆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던 베로가 벌떡 따라 일어나며 짖었다.

“베로. 오늘은 혼자 나갈게. 옆에 있으면 좀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우우우웅….”

시무룩해 하는 베로의 머리를 꾹 눌러 쓰다듬어주었다.

계속 나를 따라오고 싶어 하는 것 같지만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마계로 향하는 게이트 중 하나로 나갔다.

칼로스의 영역이 아닌 마계의 다른 장소로 통하도록 지정해둔 것이었다.

그냥 가볍게 검을 휘두르는 거면 몰라도, 힘을 분출하기에는 지구나 아스키나 대륙보다 넓고 광활한 마계가 가장 적합했다.

발을 내디딘 곳은 가뭄이 든 듯 흙바닥이 갈라진 드넓고 황량한 땅이었다.

스릉.

검집에서 검을 꺼냈다.

사실 내 것은 아니고 칼로스 소유의 검이었는데, 마계에서 생산된 검이 어떤지 궁금해서 잠시 빌렸다.

‘많이 썼던 모양이네.’

손잡이를 잡기만 했는데 칼로스 특유의 거친 힘이 느껴진다.

무언가 싸울 대상을 찾아 이곳에 온 것은 아니었다.

특별히 적을 상대하지 않고 혼자서 훈련하는 것도 가능하다.

실전이 아니니 사실 무기의 종류는 큰 의미가 없었다.

눈을 감고 머릿속에 가상의 적을 떠올려보았다.

나와 대적할 힘을 가진 강한 상대.

이목구비가 없는 검은 그림자 같은 모양을 한 그것이 엄청난 속도로 나를 향해 다가온다.

나는 그것을 막아내고 처치하기 위해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

몇몇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마족들 사이에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어느 마족의 영역에서 멀지 않은 동쪽 황야에서 이상한 일이 생겼다는 이야기.

얼마 전 그곳에서 알 수 없는 기운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지성이 있는 몬스터들은 공포에 떨며 자신이 숨을 수 있는 가장 깊숙한 곳으로 파고들었으며 마족들 또한 섬뜩한 감각에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고 한다.

한참 후 호기심 많은 마족 몇몇이 조심스럽게 그 장소를 찾아갔다.

드넓었던 황야는 크기를 짐작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무언가가 헤집어놓은 것처럼 엉망이었다.

직접 보고 온 마족들은 어떤 부분은 깊이 패고 어떤 부분은 높이 솟아올라 이제는 평지가 아니라 굽이굽이 언덕이 생겨난 것처럼 보였다고 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누군가는 그들이 알지 못하는 어떤 거대하고 강력한 마물들간의 싸움이 있었을 거라고 예상했고, 누군가는 군단장급의 마족들이 비밀리에 결투를 벌인 것이라 주장했다.

그러나 대다수 마족은 두 개의 주장 모두 틀렸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아는 가장 강력한 몬스터도, 마왕을 제외한 마족 중 가장 강한 군단장도 짧은 시간 사이에 그 넓은 황야 전체를 헤집어놓을 정도로 강하지는 않다.

이건 마족들의 상식을 초월하는 일이었기에, 호전적인 성격의 마족들조차 강한 상대가 나타났다고 기뻐할 수 없었다.

근방의 마족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강자의 등장에 한동안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

한쪽 눈을 검은 안대로 가린 남자가 식당을 찾아왔다.

입구로 들어서는 그의 모습에서 안대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다리가 있어야 할 자리가 휑하니 비어있는 것이었다.

그는 목발을 짚고 있었고, 무릎 부근에서 바지가 펄럭이는 거로 보아 그 위쪽이 절단된 듯했다.

한성 길드의 길드장이 아는 오랜 지인이었는데 던전 식당에 꼭 한번 와보고 싶다는 말을 듣고 초대한 것이었다.

물론 그런 식으로 주변 사람을 데려오고 싶어 하는 길드원들은 꽤 많았고, 지금까지는 모두 거절해왔다.

하지만 이 사람은 사정이 좀 딱했다.

‘최근에 사고를 당했다고 했지.’

던전에서 일어난 사고로 눈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고, 다리는 아예 몬스터에게 먹혀 붙일 수조차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사냥을 마지막으로 헌터 자격증을 반납하고 은퇴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눈앞의 남자를 한번 훑어보았다.

‘별로 강하지는 않군.’

대략 D급 정도일 것으로 예상된다.

남자는 보이는 한쪽 눈을 휘며 미소 지었다.

“드디어 와보게 됐네요. 던전 식당에 관한 얘기를 들은 후로 한 번쯤은 우연히 게이트를 발견해보고 싶었는데 아무리 돌아다녀도 제 앞에는 나타나지 않더라고요.”

“아무래도 확률이 높지는 않죠. 그래도 결국 찾아오셨으니 한번 둘러보세요.”

“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예 안 될 줄 알았는데 역시 인맥이 좋긴 좋네요. 하하.”

가볍게 웃은 남자는 던전 식당을 신기한 듯 둘러보았다.

“이런 곳이었군요. 진짜 던전이긴 한데, 역시 분위기는 완전히 다르네요. 보통 던전은 들어가자마자 살기가 느껴지는 경우가 많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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