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은퇴
“이곳은 몬스터로부터 안전한 던전이니까요. 살기가 있을 리가 없죠.”
“그게 참 신기하네요.”
남자는 기웃거리며 여기저기 살펴보았다.
사실 이 공간의 모양 자체가 엄청 특이한 건 아니었다.
동굴형 던전에도 익숙할 거고, 식당에도 수없이 많이 가봤을 텐데, 이곳은 그 두 가지가 합쳐진 것뿐이니까.
그런데도 남자는 굉장히 신기해하고 놀라워했다.
이곳에 정말 와보고 싶었다는 말이 사실인 것 같다.
그때, 남자가 미간을 크게 찌푸리며 낮은 신음을 흘렸다.
걸음도 잠깐 멈춘 상태였다.
덜그럭!
어디가 안 좋은 건지 한쪽 목발까지 땅에 떨구고 말았다.
“괜찮으십니까? 어디 안 좋으세요?”
“아, 그게….”
그는 뭔가를 참는 듯 숨을 내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절단된 부위에 통증이 있어서요. 지속적인 건 아닌데 갑자기 한 번씩 이렇게 아픕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어깨를 내주었다.
“잡으세요. 자리에 앉으시는 게 좋겠네요.”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남자는 비틀거리며 기대어 식탁 앞의 의자에 앉았다.
“아직 치료가 끝나지 않은 건가요?”
“그런 건 아니고… 검사해봐도 특별한 이상은 없다고, 이건 병원에서 어떻게 해줄 수 없는 부분이라더군요. 아직 다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일단 좀 기다려보자고는 하던데.”
남자는 잠깐 씁쓸한 미소를 지었으나 금세 표정을 풀고 이번에는 메뉴를 확인했다.
“묵은지 등갈비찜! 너무 맛있겠는데요?”
“따로 원하시는 게 따로 있으면 말씀하셔도 됩니다. 재료가 있고 제가 할 수 있는 거면 그걸로 해드릴 테니까.”
“아닙니다. 이거보다 더 좋은 메뉴가 생각이 안 나네요. 하하.”
남자는 꽤 호탕하게 웃었다.
다리를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거로 아는데 생각보다 밝아 보였다.
“그럼 잠시만 기다리세요.”
아주 푹 익은 묵은지가 있어서 생각난 요리였다.
묵은지는 쪄먹는 게 제맛 아니겠는가.
만들기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줄줄이 이어진 등갈비의 뼈와 뼈 사이에 칼날을 집어넣고 쭉 썰어서 뼈대를 모두 분리해준다.
이걸 모두 물에 담가 핏물을 빼주고, 통후추, 월계수 잎, 청주 등의 향신료와 함께 1차로 한번 데쳐준다.
누린내를 한번 제거해주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냄비에 한 번 데친 갈비와 양파, 대파, 청양고추, 그리고 고춧가루, 설탕, 간장 등의 양념과 묵은지 한 포기를 넣는다.
이 새콤하게 익은 묵은지가 맛을 결정할 가장 중요한 재료가 될 것이다.
이제 물을 붓고, 국물이 자작하게 졸아들면서 푹 쪄질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이미 오늘의 메뉴로 정해둔 요리.
만드는 데 오래 걸리는 음식이라 아까 미리 익혀두었다.
나는 손님의 앞에 가스레인지를 두고 그 위에 묵은지 등갈비찜을 양껏 담은 냄비를 올려 불을 켰다.
“오오….”
“조금 끓으면 바로 드세요. 다 익은 거라 괜찮아요.”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는 기대감을 감추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서는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 하는 법이다.
잠깐의 정적이 오고, 나는 남자에게 물었다.
“이제 은퇴하신다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너무 가볍게 들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말했다.
남자는 조금 씁쓸하게 웃으며 목발을 들어 보였다.”
“네. 다리가 이렇게 되었으니, 이제 활동은 하고 싶어도 못 하게 됐네요. 속상하긴 하지만, 약간 후련한 마음도 있고 심경이 복잡합니다.”
“어쩌다 다치신 건지….”
“뭐, 특별할 것도 없어요. 던전에서 이런 사고가 일어나는 건 놀라울 일도 아니니까요. 그놈이 내 다리를 그대로 소화시키지만 않았어도 어떻게 수습은 할 수 있었을 텐데…. 동료들이 당장 배를 갈랐지만 이미 제 다리는 소화액에 의해 녹아내려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어요. 하는 수 없이 절단면에 바로 포션을 부어야 했죠.”
힐링 포션은 일반적인 약과 수준이 다른 회복력을 가진다.
자상이나 열상에는 아주 좋은 효과를 내지만 절단상에 잘못 쓰면 그대로 아물어버려 떨어진 신체를 붙이기가 어려워진다.
하지만 접합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될 때는 빠르게 포션을 쓰는 게 맞는 선택일 것이다.
출혈을 빨리 멈춰야 회복하는 데도 시간이 덜 걸릴 테니까.
“운이 안 좋았군요.”
“그렇다고 봐야겠죠. 사고를 당한 직후에는 진짜 아찔하더라고요. 다리를 잃다니,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싶을 정도로 힘들었습니다. 당연히 이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도 말이에요. 아마 무의식중에 그게 나는 아닐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제 안에 있었나 봅니다.”
보글보글보글.
냄비가 끓기 시작했다.
동시에 맛있는 찌개 냄새가 식당 안을 채웠다.
남자는 코를 킁킁거리면서 이어 말했다.
“사실 꼭 던전의 사고가 아니라도, 모두들 내 인생에 설마 이런 끔찍한 일이 생길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은 채 살아가죠. 불치병 환자들도, 사고로 몸을 다친 사람들도 그런 일이 생길 줄은 전혀 예상 못 했을 겁니다…. 제가 좀 단순한 편이라 이런 깊은 생각은 살면서 거의 하지도 않았는데, 병원에 누워있으니까 저절로 생각이 많아지더라고요. 하하. 뭐, 어쨌든 결론적으로 그냥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
“어떤 식으로요?”
“사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정말로 운이 좋았던 거거든요. 그놈에게 머리를 먹혔으면 저는 치료고 뭐고 할 것도 없이 즉사했을 테니까요. 아무리 힐러의 능력이 뛰어나고 포션의 효과가 좋다고 해도 목이 잘리면 그냥 끽 가는 거 아니겠습니까. 머리보다는 다리 없는 게 낫죠. 죽지 않은 게 어딥니까. 활동하면서 식물인간이 된 사람, 죽은 사람도 봤는데 어쨌든 전 목숨은 건졌잖아요.”
남자는 씩 미소 지었다.
그 미소에 그늘이 보이지 않는 걸 보니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헌터로서의 능력은 별로지만 정신력만은 강한 사람인 것 같다.
“그래도 요즘에는 의족이 잘 나온다고 들었습니다. 싸우지는 못해도 일상생활을 하는 데는 크게 무리 없다고 하더라고요.”
“맞아요. 저도 찾아보고 있는데, 가격대가 제가 생각한 것 이상이더라고요. 다행히 이번 사고로 보상을 어느 정도 받게 돼서 돈 문제는 괜찮은데, 이놈의 통증이 문제라…. 이게 세월이 흐르면 좋아질 수도 있다고 하는데 혹시나 만성 통증이 될까 봐 걱정입니다.”
지금까지 초연하게 얘기하던 남자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아무리 긍정적이라 해도 몸이 아픈 중에 웃을 수는 없는 일이다.
현실적으로 걱정이 되긴 하겠지.
나는 뜨끈뜨끈한 공깃밥과 밑반찬을 남자의 앞에 놓아주었다.
공깃밥 뚜껑을 열자 김이 펄펄 나는 흰 쌀밥이 드러났다.
밥알 하나하나에 윤기가 좔좔 흐른다.
“지금 먹으면 되는 겁니까?”
“아, 잠깐만요.”
깜빡할 뻔했다.
갈비를 젓가락으로만 뜯어 먹는 것만큼 감질나는 게 없다.
나는 서둘러 비닐장갑을 가져와 남자에게 주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잘 먹겠습니다.”
한 손에 장갑을 낀 남자가 김치를 집어 들었다.
큼지막한 이파리를 젓가락과 손으로 쭈욱 찢었다.
그리고 김치를 갈빗살 위에 돌돌 말아 올린 후, 뼈를 집어 들고 한입에 넣었다.
먹는 모양만 봐도 맛있게 먹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으음, 음.”
고개를 끄덕이며 우물거리던 남자가 본격적으로 갈비를 뜯었다.
김치 양념이 배어들어 촉촉한 등갈비 살과 흐물거리는 묵은지를 뜨거운 밥과 함께 후후 불어 삼킨다.
야들야들하고 감칠맛 나는 갈빗살과 부드러운 식감에 깊은 맛이 나는 묵은지, 갓 지은 흰 쌀밥의 조합이면 다른 산해진미가 부럽지 않다.
“성진이 형이 말했던 대로 정말 맛있네요.”
“길드장님이랑은 원래 잘 아는 사이신가 봐요?”
“학창 시절 선후배 사이였습니다. 연이 끊어졌다가 몇 년 전에 우연히 마주친 후로 종종 연락하면서 살고 있어요. 솔직히, 워낙 사는 세계가 달라져서 잠깐 아는 척하고 끝일 줄 알았는데 성진이 형이 먼저 잘 챙겨주시더라고요. 제가 아는 사람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좋은 사람입니다. 이번에 제가 사고당한 것도 전해 듣고 여러모로 챙겨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좋은 사람이죠.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는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사실 한성진 길드장의 첫인상은 그리 따뜻하지 않았다.
상황 판단이 빠르고 적당히 선을 지키는 면모 때문에 사업 파트너로서 마음에 들었던 거지 개인적으로는 좀 의뭉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그래도 보면 볼수록 인간적인 부분이 있다는 생각은 들었다.
워낙 바쁜 사람이라 자주 얼굴을 보지는 못하지만, 이 남자의 말을 들어보면 역시 꽤 따뜻한 사람이 맞는 것 같다.
남자가 능청스럽게 말하며 미소 지었다.
“덕분에 꼭 한번 오고 싶던 이 식당에도 오게 됐고. 아, 물론 허락해주신 사장님께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별말씀을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밥공기를 뚝딱 비워버렸고, 한 공기 더 주겠다는 내 말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는 남아있던 묵은지 찜과 함께 새로 받은 밥 한 공기도 깨끗하게 다 먹어 치웠다.
“와…. 최근 들어 제일 맛있게 먹었던 것 같습니다. 한동안 싱거운 병원 밥만 먹었거든요. 잘 먹었습니다.”
남자가 식탁에 기대어둔 목발을 쥐며 말했다.
“식사 다하셨으면 가볍게 차라도 한잔하고 가시죠.”
“후식도 있는 겁니까?”
“좋은 찻잎이 있어서요. 고기와 김치는 맛은 좋지만 그만큼 기름지고 자극적이니까 은은한 차로 속을 좀 달래주면 좋을 겁니다.
“그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내 말에 그는 손에 쥐었던 목발을 다시 냉큼 내려놓았다.
나는 주전자를 불에 올리고 식료품을 모아 둔 방으로 가서 한쪽 구석에 놓인 봉투를 챙겨 나왔다.
한두 번 맛은 봤지만 나에게 딱히 필요하지는 않아서 보관해둔 거였는데 이 남자라면 이것을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잠깐 다녀오는 사이에 물이 끓고 있어서 불을 껐다.
이 물을 찻잔과 찻주전자에 붓고 잠깐 기다려 예열해준 후, 물을 버렸다.
다구가 따뜻해야 차가 더 맛있게 우러나기 때문에 거치는 절차였다.
봉투에서 꺼낸 알록달록한 색의 말린 꽃 몇 송이를 찻잔에 담았다.
남자가 한쪽 눈을 휘둥그레 뜨며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이건 꽃 아닙니까?”
“네. 꽃을 우려내서 마시는 꽃차예요.”
“이런 건 처음 봅니다. 제가 차를 잘 몰라서 차라고 하면 다 잎을 우려서 마시는 건 줄 알았는데 신기하네요.”
“거부감들만큼 맛이 강하지는 않아서 마시기 힘들지는 않을 겁니다.”
주전자의 물을 다른 그릇에 옮겨 담아 조금 식힌 후 찻잔에 부어주었다.
쪼르르륵.
차의 종류마다 적당한 물의 온도가 다른데, 이 꽃차의 경우 팔팔 끓는 물보다는 조금 낮은 온도에서 차가 잘 우러났다.
찻잔 속 따뜻한 물 위에 노란색, 주황색 꽃이 올라가니, 마치 물 위에 꽃이 핀 것 같다.
향기도 좋지만 자연을 가까이 담은 것 같아서 보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투명했던 물색이 옅은 노란빛으로 바뀌었다.
신기해하며 꽃차를 내려다보고 향을 맡던 그는, 막상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기 직전에는 조금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처음 접하는 것이라 맛이 이상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인 것 같았다.
그러나 오래 망설이지는 않고 홀짝 꽃차를 한 모금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