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효능
맛을 감상하듯 입을 달싹거리던 남자는 살짝 찌푸려져 있던 미간의 주름을 펴며 감탄했다.
“오오, 향기는 직접 꽃향기를 맡는 것처럼 진한데 맛은 은은하고 구수하네요.”
“꽃차에는 세 가지 맛이 있다고 하지요. 눈으로 색을 즐기고 코로 향기를 즐기고 입으로 맛을 즐길 수 있으니까요.”
“확실히 찻잎으로 만든 것보다 시각적, 후각적인 부분은 훨씬 뛰어난 것 같군요. 이건 무슨 꽃차인가요?”
남자의 질문에 나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게… 사실 저도 선물 받은 건데 이름은 완전히 잊어버렸습니다. 처음 들어본 꽃 이름이라서요.”
“그렇군요. 뭐 어떻습니까. 이름이 뭐든 어쨌든 향이 굉장히 좋습니다.”
그는 평온한 미소를 지으며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사실 이 꽃의 이름을 잊은 건 아니다.
그저 아스키나 대륙에서 얻은 것이라, 지구에서는 구할 수 없는 꽃이기에 알려주지 않은 것이었다.
혹시나 이름을 기억하고 더 알아보려 하다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르니 미연에 그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차가 마음에 드십니까?”
내 질문에 남자가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너무 마음에 듭니다. 술이나 커피 같은 거나 마셔봤지, 살면서 차를 오늘처럼 제대로 마셔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이렇게 좋을 줄은 몰랐습니다. 향과 맛도 좋고, 무엇보다도 뭔가 마음이 차분하고 편해지는 것 같아서 좋네요.”
“저도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차를 우려내고 마시는 과정이 수양을 쌓아가는 것과 같다더군요. 이 차가 잘 맞으시는 것 같으니까 좀 챙겨드릴게요.”
“아,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남자는 거절하지 않고 넙죽 대답했다.
그 모습이 뻔뻔스럽다기보다 가식 없고 솔직하게 느껴져서 오히려 호감이 갔다.
나는 꽃차가 담긴 봉투 여러 개를 챙겨 나와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
“스트레스에도 좋고 통증 완화에도 좋다고 하니까 잘 챙겨 드세요. 너무 많이는 말고 하루에 한두 잔 정도만요.”
“그럴게요. 저, 그럼 이제 계산을….”
“안 하셔도 됩니다. 길드장님이 미리 계산하셨어요.”
“정말요? 이거, 참… 안 그래도 되는데 또 신세를 졌네….”
남자는 머쓱하게 턱을 매만지다 목발을 짚고 일어섰다.
나는 한성 길드의 길드원에게 안전하게 배웅해달라고 얘기했다.
그는 다시 한번 즐거웠다는 말을 남기고 던전을 떠났다.
***
사고로 다리를 잃은 남자, 조민우는 조심스럽게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디뎠다.
목발에는 이미 익숙해져서 넘어지진 않을 것 같지만, 언제 갑자기 통증이 찾아올지 모르기에 걸을 때마다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아까 밥을 먹기 전에 한번 심하게 아팠기 때문에 당분간 괜찮을 것 같지만 그것도 확신하기는 어려웠다.
어떨 때는 서너 시간 내내 멀쩡한데 어떨 때는 몇 분 사이에 또 통증이 오기도 해서 종잡을 수 없었다.
몇 초 정도의 짧은 순간이지만 아픈 건 아픈 거라 은근히 신경 쓰였다.
그렇다고 이걸로 매일 진통제를 먹기에도 애매하고….
지금까지의 모든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 애쓰는 그였지만 이 통증만큼은 좋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계속 이 상태가 지속되면 의족 착용이 힘들어질 수도 있었다.
‘나아지긴 하려나….’
자신도 모르게 비관적인 생각을 하던 조민우가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떨쳤다.
굳이 불행한 미래를 미리 상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조민우는 오후 내내 바쁜 시간을 보냈다.
병원도 다녀오고 던전 사고 관련하여 처리할 것이 있어 협회에 들르기도 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늦은 밤이 되었다.
잘 준비를 마치고 나서야 조민우는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오후 내내 다리가 안 아팠던 것 같은데?’
텀이 길 때도 있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멀쩡했던 날은 없었다.
‘마지막 통증이 언제였지?’
조민우는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아까 던전 식당에서 잠깐 아팠었고… 그 이후로 아팠던 기억이 없는 걸 보면 거의 아홉 시간, 열 시간가량 통증이 생기지 않았던 것 같다.
“어떻게 된 일이지? 이제 괜찮아진 건가?”
갑자기 깨달은 사실에 놀라 조민우는 홀로 중얼거렸다.
착각일 수는 없다.
다리의 찌르는 듯한 통증은 모르고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가볍지 않았으니까.
조민우의 눈길이 식탁 위에 올려둔 유리병으로 향했다.
병 안에는 알록달록한 말린 꽃이 들어있었다.
‘통증에도 좋다고 했던 것 같은데… 설마 저것 때문인가?’
의사도 별다른 처방 없이 상처만 확인했고, 특별한 일이라고는 한번 꼭 가고 싶었던 던전 식당에 들렀던 일 뿐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통증 완화 효능이 있다고 해도 그냥 차일 뿐인데 이렇게 즉각적으로 몸에 영향을 줄 수는 없지 않나?
조민우는 잠깐 말린 꽃이 든 병을 보며 상황을 파악해보려 애썼다.
그러나 별다른 결론은 내지 못했다.
어쩌면 오늘 컨디션이 특히나 좋았던 걸 수도 있고, 내일은 또 평소와 같이 통증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렇게 오랫동안 아프지 않았다는 건 분명 좋은 현상이었다.
매일 오늘만 같으면 정말 좋을 것이다.
조민우는 내일 아침은 아까 받아온 차를 마시면서 시작해보겠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
따뜻한 찻잔에서 향기로운 냄새가 퍼진다.
어제 손님에게 주고 조금 남은 꽃차를 우려 마시는 중이었다.
아스키나 대륙에서 선물 받은 이 꽃차가 신경을 안정시키고 통증에도 효과가 좋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 효능이 어느 정도인지는 정확히 모른다.
딱히 아픈 데가 없으니 내 몸으로 효능을 파악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효과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어쨌든 대륙에서 가져온 것이니 다른 과일이나 허브가 그렇듯 이것도 재료 자체의 효과는 지구보다 뛰어날 것이다.
약과 달리 부작용도 없고 내성이 생길 일 없는 자연적인 것이니 꾸준히 마셔서 나쁠 게 없겠지.
과거 게이트가 열리고 혼란스러웠던 몇 년에 비하면 현재의 지구는 많이 안정된 상태이다.
각성자도 많아졌고, 던전과 몬스터, 아티팩트에 대한 연구도 나날이 발전하고 있어 다치고 죽는 사람의 수도 계속 줄어드는 추세이다.
하지만 여전히 던전은 위험하고 갑작스럽게 발생하는 돌발상황 때문에 사고도 자주 일어나고 있다.
어제 만난 그 손님처럼 심한 부상을 입고 은퇴하는 헌터도 있고, 사망사고도 가끔 일어난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가 나서서 모든 걸 해결해주는 건 별 의미가 없으니.
예전에 칼로스의 성에 들락거리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놈이 나에게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저기…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여쭤봐도… 음… 아, 아닙니다.”
“뭔데 그렇게 머뭇거려? 얘기해 봐.”
“…그럼 오해하지 말고 들어주십시오. 현호 님. 현호 님에게 저희는 적이 아닙니까?”
고심 끝에 꺼낸 말인지 결의에 찬 듯한 표정으로 질문하던 칼로스의 얼굴이 생각난다.
당장에라도 그 말을 듣고 내가 해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붉은 눈동자에 담겨있었다.
“저희라면, 마족들 얘기하는 거냐?”
“그렇습니다. 마족들도 그렇고 몬스터들도 그렇고요. 현재에도 마계의 몬스터들과 현호 님이 살던 세계의 인간들은 계속해서 서로 충돌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마족들이 사는 영역은 거의 연결되지 않고 있지만…. 그래도 아스키나 대륙에서 전대 마왕님을 비롯해 수많은 마족과 혈투를 벌이기도 했으니 아무래도 저희에 대해 안 좋은 감정을 가지셨을 텐데….”
“흠, 그랬지.”
충분히 그런 걱정할 만하다 싶었다.
마족들이야 그다지 끈끈한 동족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 칼로스에게도 그들을 위해 복수하겠다는 생각이 없다는 건 알고 있다.
어차피 나에게 덤벼서 이길 가능성도 없고.
하지만 나는 다르다.
마계를 넘나들게 수 있게 되고, 또 지구의 인간들에게 해를 끼치는 몬스터들을 해치울 힘을 가지고 있다.
칼로스는 내가 마음만 먹으면 마계를 초토화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모처럼 진지하게 칼로스에게 대답해주었다.
“마족들에게 안 좋은 감정이 있긴 했지.”
1 대 다수로 꽤 오랫동안 피 터지게 싸웠었다.
그놈들의 음흉하고 역겨운 모습들도 많이 보았고.
“과거의 나였다면 마계에서도 마족을 만나는 족족 자비 없이 죽였을지도 모르겠어. 마족은 나쁜 것이고 세상에서 사라지는 게 옳다는 생각으로. 하지만 지금은….”
칼로스가 꼴깍 침을 삼켰다.
동공이 불안하게 흔들리는 것이 괜히 말을 꺼낸 게 아닌지 조금 후회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인간이라는 종이 가지는 한계점을 뛰어넘은, 일명 초월자라는 존재가 되고 나서는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나는 분명히 인간이지만, 절반 정도는 인간이 아니기도 했다.
힘만 생긴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측면에서도 보통 인간과는 조금 다르다는 느낌이 어렴풋이 있었다.
감정이나 생각 자체는 인간과 별다를 것 없지만 세상을 보는 시각이 조금 바뀌었다고 해야 할까.
지구라는 우물에서 벗어나 한 차원 더 높은 곳에서 세상을 바라보니 마족이나 인간이나 크게 다를 것 없게 느껴졌다.
싫어하는 사람이 몇 명 있다고 인간이라는 종 전체를 싫어하는 게 아니듯이, 적대 관계였던 마족이 있었다고 다른 마족들 전체를 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마족들이 작정하고 지구에 쳐들어온다거나 나에게 덤비면 손을 쓸 수밖에 없겠지만, 그런 상황도 아닌데 굳이 싸울 생각은 없어. 좋은 인간도 있고 나쁜 인간도 있듯이, 종족별 특성이 있긴 하지만 마족에 따라 성격과 생각이 다를 테니까. 개개인으로 보면 어떤 사람보다 어떤 마족이 더 마음에 들 수도 있는 거잖아? 그럼 적이 아닌 아군이 될 수도 있는 거지, 뭐.”
“그럼 저는 현호 님에게 아군인 겁니까?”
조심스럽게 되묻는 칼로스의 눈빛에 어쩐지 기대감이 담겨있는 듯했다.
“그럼 내가 몇 달 동안 마음에 들지도 않는 마족의 성을 들락거렸겠어?”
“그거야 제가 쓸모 있으니까 이용하려고….”
“네가 뭘 그렇게 많이 했다고 자기 입으로 쓸모 있대?”
“아, 아닌가요?”
“그래. 쓸모고 뭐고 진짜 아니다 싶었으면 너는 지금 여기 없었어. 네가 뒤에서 쓸데없는 짓만 벌이지 않으면 아무 일도 없을 거야.”
피식 웃으며 대답하자 그제야 굳어있던 칼로스의 표정이 확 풀렸다.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내가 갑자기 변덕을 부려 자신을 죽일까 봐 마음 졸이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이런 말 했다고 갑자기 제멋대로 굴면 어떻게 될 건지는 알지?”
“아, 물론이지요….”
그날 이후로 칼로스는 내 앞에서 조금 덜 긴장하게 된 것 같다.
그렇다고 말을 안 듣는 건 아니니 경고도 잘 알아들은 것 같고.
그때 대답하지 않고 그냥 넘어갔는데, 사실 몬스터의 경우는 경우가 좀 다르다.
현재 인간들과 접점이 없는 마족과는 달리, 몬스터들은 현재 지구의 인류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고 있다.
내가 나서서 마계의 몬스터들을 왕창 처리하면 그 피해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마계가 워낙 넓고 몬스터의 수도 많다 보니, 금방 다시 번식하고 생성되겠지만, 한동안은 지구와 연결되는 마계 던전의 몬스터 수를 줄여 사건 사고를 줄이는 정도의 효과는 얻을 수 있을 거다.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귀찮거나 힘들어서가 아니다.
그런 행동이 길게 봤을 때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