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낮잠
현재 지구와 마계, 그리고 이스키나 대륙과 마계는 일부 간섭된 상태로 연결되어 있다.
수십 년 전, 마계에 가해진 일차적인 외부 충격 때문에 마계와 아스키나 대륙 사이에 균열이 일어났다.
그리고 15년 전, 2차 충격으로 인해 마계와 지구 사이의 균열이 생겼다.
이로 인해 안정적이던 세계의 균형이 깨진 것이다.
아스키나 대륙과 지구에서, 이 불균형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해결되었다.
한때 아스키나 대륙은 마계에서 넘어간 수많은 몬스터들과 마족들로 인해 점령당하며 마계와 거의 동일한 환경으로 변화했었다.
균열이 생길 정도의 충격과 지나치게 큰 힘이 마계에서 대륙으로 흘러 들어간 결과, 대륙은 시간의 흐름조차 비틀릴 정도로 불안정해지고 말았다.
그 불균형은 내가 대륙으로 넘어가 마계의 몬스터와 마족, 마왕까지 처치함으로써 해결되었다.
차원 간의 균열 또한 거의 아물어 일반적인 마족이나 몬스터들이 쉽게 넘나들지 못하게 되었다.
반면 지구는, 균형을 유지하려는 방안으로 게이트와 던전 등의 새로운 시스템을 자발적으로 생성했다.
지구의 인간들은 그 시스템에 빠르게 적응하여 십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 마계의 몬스터들을 잘 막아내고 있다.
차원이 분리되어 있던 옛날만큼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균형은 유지하는 중인 것이다.
만일 내가 여기에 지나치게 간섭하여 끼어들게 되면 어떤 부작용이 생길지 모른다.
그러니 가능한 헌터들의 일에 관여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들이 다치고 위험해지는 건 안타깝지만 세계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물론 눈앞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거나 헌터들이 해결하지 못하는 일에는 나서야겠지.
‘이대로 괜찮은 걸까.’
마계와 지구의 접점에서는 매일 싸움이 벌어지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자면 상당히 안정적인 상황이다.
그러나 이런 상태가 계속 유지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
무엇보다도 아직 해소되지 않은 불안감이 있었다.
외부의 힘.
칼로스가 얘기했었던, 마계를 공격했던 강한 힘의 정체.
그것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분명한 건 바깥에 내가 인식하지 못한 또 다른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의 상황을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지, 뭘 해야 하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지금으로서는 이 걱정이 그저 기우이길 바랄 뿐이다.
***
한가로운 어느 오후.
베로는 정원의 잔디 위에 편히 엎드려 단잠을 즐기고 있었다.
따사로운 햇볕이 부드럽게 윤기 나는 검은 털에 닿았다.
마계나 던전 내부에서는 이런 햇빛을 받을 수 없기에 베로는 때때로 현호의 집 앞마당에 누워 자면서 일광욕을 즐겼다.
그곳에서 베로는 짖지도 않고, 쿵쿵 달리지도 않았다.
담을 넘어가지 않고, 밖을 내다보지도 않았다.
마당 안쪽에서만 아주 조심스럽고 은밀하게 움직였다.
이웃들이 베로의 존재를 눈치채면 안 된다는 현호의 말을 깊게 새겨들었기 때문이다,
베로는 자신 때문에 현호가 곤란해지는 걸 절대로 원하지 않았다.
코오오옹…. 코오오옹….
그러나 깊이 잠들었을 때의 코골이 소리만큼은 조절할 수 없었다.
그 소리가 담장을 넘어갈 정도로 크지 않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날이 하도 좋아 베로는 깊은 단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한참 후,
코오오, 컹!
자기가 코 고는 소리에 베로가 잠에서 깨어났다.
현호가 보고 갔는지 배에 얇은 담요가 하나 올려져 있었다.
가물가물 눈을 뜨던 베로의 눈에 수상한 것이 보였다.
회색빛 무언가가 입에 흰 털 뭉치를 물고 담장 위를 걸어가고 있었다.
순간 베로의 머릿속에 저 털 뭉치가 자신이 구해온 새끼 얼음여우 구름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어떤 못된 놈이 구름이를 납치하고 있는 것이다!
비상사태였다.
어떻게 해야 하지?
베로는 순간 크게 당황했다.
당장 던전으로 돌아가 현호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하나?
아니면 저게 멀리 도망치기 전에 직접 나서서 잡는 게 맞을까?
어려운 선택지에 갈등하는 사이, 구름이를 입에 문 나쁜 놈이 담장 너머로 사라졌다.
“웡!”
베로는 크게 소리치며 일어섰다.
이대로 놓치면 영영 구름이를 찾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이 생겼다.
휘익!
베로는 더 망설이지 않고 크게 발돋움하여 자신의 키보다 훨씬 높은 담장을 훌쩍 뛰어넘었다.
안정적으로 땅 위에 착지한 베로가 좌우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저 멀리 골목으로 사라지는 회색 꼬리를 발견했다.
베로는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살벌한 기척을 느낀 납치범도 속도를 높여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일직선으로 달렸다면 곧바로 잡을 수 있었겠지만, 놈이 좌우로 방향을 틀며 달렸기에 생각만큼 빠르게 잡을 수가 없었다.
몇 분을 그렇게 달리다 보니 어느 순간 골목길에서 벗어나 대로변에 들어서게 되었다.
“꺄아아아악!”
베로를 발견한 누군가가 경악하며 비명을 질렀다.
목표물에 집중하고 있던 베로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주변을 보았다.
빠아아아앙!
빠아아앙!
끼이이이익!
도로 한복판에 우뚝 선 거대한 몬스터 때문에 달려오던 차량이 급하게 핸들을 꺾었다.
“도, 도망쳐!”
“신고해요! 아무나 빨리!”
“그러다 죽어요! 일단 뛰어요!”
길을 걷다 놀라 달아나는 사람들, 도로에 차를 버리고 헐레벌떡 도망치는 사람들 사이에서 베로는 당황하여 그 자리에 멈춰버렸다.
냐아앙.
들릴 듯 말 듯 작은 소리가 나는 곳에는 베로가 쫓던 녀석이 방향을 잃고 주춤거리고 있었다.
베로는 그제야 깨달았다.
저건 구름이가 아니다.
어미 고양이가 흰 새끼 고양이를 물어 옮기던 중일 뿐이었다.
생각해보면 구름이를 처음 봤을 때나 저렇게 작았지, 지금은 꽤 자라서 저 새끼 고양이보다 훨씬 컸다.
“우우우우….”
베로는 혼란에 빠졌다.
이곳은 마계도, 던전도, 아스키나 대륙도 아닌 지구였다.
지구에는 자주 오지도 않았고 와봤자 현호의 집에서 돌아다녔던 게 다였다.
검고 딱딱한, 처음 느끼는 질감의 바닥에 네모난 회색 건물로 가득 찬 완전히 낯선 세계.
고작 몇 분 사이에 현호가 나와서는 절대 안 된다고 경고했던 세계의 한복판에 서게 되었다.
구름이가 위기에 빠진 것도 아니고, 비몽사몽한 정신에 혼자 착각한 거였다.
베로가 그렇게 열심히 쫓았던 고양이는 어느새 풀숲으로 사라져버렸다.
익숙지 않은 환경. 낯선 소음과 생소한 냄새.
모든 것이 너무 새로워서 정신 사나웠다.
베로의 뛰어난 후각과 청각이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조금 전 어느 길에서 나왔는지, 어떻게 돌아가야 할지 막막해서 베로는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저벅. 저벅.
그때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조심스럽게 걷고 있지만 베로의 예민한 귀가 잡아내지 못할 리 없었다.
“방금 연락받았는데 이 근방에 던전 브레이크가 터졌다는 소식은 없다고 합니다.”
“어디서 놓친 거 아니야?”
“모르겠습니다. 그럴 확률은 희박한데 좀 더 알아보겠다고 합니다.”
“던전 브레이크 아니면 몬스터가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오겠어. 분명 누가 실수했거나 다른 문제가 있었겠지.”
“활성화된 던전을 놓치다니 보통 실수가 아닌데요. 까딱 잘못하면 엄청난 규모의 인명 사고로 이어질 텐데.”
“다행히 아직 신고 들어온 건은 저놈에 대한 것뿐이야.”
신고받은 순찰대원들이 빠르게 출동한 것이었다.
이들은 각성자들이었으나 등급이 낮고, 실제로 강한 몬스터와 싸운 경험도 별로 없었다.
고블린이나 오크 수준의 몬스터라면 처리할 수 있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현황을 확인하고 보고하며 지원군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원래 던전 브레이크는 일어나기 전에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
등급이 높은 던전이나, 액티브 타임이 끝나가는데도 클리어되지 않은 던전이 있을 경우 미리 협회와 관리국, 그리고 근방의 몇몇 길드들이 협업하여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곤 했다.
그런데 이번 일은 그런 낌새가 전혀 없이 갑자기 발생했다.
때문에 이 사람들은 그저 긴급 사태에 가장 가까이에 있는 몇 없는 각성자 순찰대원이라는 이유로 우선적으로 투입된 것뿐이었다.
세 사람의 목소리가 가까워지면서 발소리는 더 작게 줄어들었다.
“아직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지금부터는 천천히 더 조심스럽게 걸어. 그런데 저거, 무슨 몬스터인지 알겠어?”
“조금 더 가까이 가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여기서 보기에는 늑대 같기도 한데… 저렇게 새까맣고 저 정도로 큰 늑대형 몬스터는 처음 봐서 아직 확신은 못 하겠습니다. 저거, 저희가 처리할 수 있는 놈이 아닌 것 같은데요…?”
“그냥 봐도 절대 만만한 놈은 아니야. 일단 지켜보자. 다들 정신 바짝 차리고 조심해.”
베로는 바짝 긴장했다.
공격당할까 봐, 다칠까 봐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의 이유 때문이었다.
잘못해서 사람을 해치게 될까 봐, 현호가 절대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던 일을 저지르게 될까 봐 두려웠다.
현호의 집에서 뛰쳐나온 것부터가 엄청난 실수였다.
그런데 여기서 또 잘못을 저지르면….
베로의 눈동자가 불안감에 빠르게 진동했다.
현호가 진짜로 자신을 싫어하게 되는 건 상상도 하기 싫었다.
“움직임이 전혀 없는데 뭘 하는 걸까요?”
“글쎄. 잠깐 쉬고 있는 건가?”
“이 틈에 기습 공격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경거망동하지 마. 지금은 주변에 사람도 없고 난동을 부리는 것도 아니니까 지원군이 올 때까지 기다려볼 만해. 아무래도 우리 셋으로는 감당 못 할 것 같다.”
“알겠습니다.”
“네. 팀장님.”
지금이라도 현호의 집으로 빨리 돌아가야 한다.
여전히 혼란스럽지만 그래도 이대로 가만히 서 있는 것보다 최대한 감각을 살려 방향이라도 대충 찾아야 할 것이다.
침착함을 되찾은 베로의 검은 코가 허공을 향해 씰룩거렸다.
킁킁킁킁.
베로는 필사적으로 냄새를 맡았다.
하지만 너무 많은 냄새가 한꺼번에 코로 밀려들어 와서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자신의 냄새를 되짚어 돌아가야 하는데 흔적을 남기지 않고 빠르게 달리기만 해서 그게 쉽지 않았다.
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진짜 꽃보다 짙은 인공적인 향기, 매캐하게 코를 자극하는 배기가스 냄새, 수많은 사람들의 체취….
“……!”
그때 씰룩거리던 베로의 코가 친숙한 냄새를 한 가닥 잡아냈다.
아주 미약하고 희미하지만 분명히 맡아본 적 있는 체취였다.
거리도 그리 멀지 않은 것 같다.
타앗!
베로는 망설임 없이 강인한 뒷다리로 바닥을 박차며 달리기 시작했다.
“어어!”
“자, 잠깐! 이쪽으로 오는 것 같은데요?”
“공격을… 아니, 바, 방어를 해야 하나?”
갑자기 돌변하여 달려드는 몬스터에 세 사람 모두 당황했다.
무서운 기세로 돌진하는 검은 몬스터의 모습에 순찰대원들은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검은 몬스터가 콘크리트 바닥이 파일 정도로 강하게 발돋움하며 날아올랐다.
“숙여!”
“아악!”
“으아아아!”
세 사람의 머리 위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거의 날다시피 점프한 몬스터는 그들이 숨어있던 트럭, 그리고 그 뒤의 승용차 두 대를 한꺼번에 뛰어넘어 착지했다.
덩치에 맞지 않게 사뿐히 착지한 몬스터는 속도를 내어 빠르게 달렸다.
조심스럽게 실눈을 뜬 순찰대원 한 명이 팔을 뻗으며 소리쳤다.
“어엇! 도망칩니다!”
“이런! 당장 쫓아가자! 놓치면 안 돼!”
“어차피 저희가 쫓아가 봐야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큰 의미가 있을까요?”
“그래도 우리가 위치 확인해서 알려줘야 지원군이 안 헤매고 찾아올 거 아냐, 인마!”
“아, 네!”
순찰대원들은 허겁지겁 멀리 세워둔 오토바이로 달려갔다.
“그놈 엄청 빠르네.”
“일단 저쪽으로 달리는 거 확인했습니다.”
“제가 본부에 방향 계속 전달할게요.”
“그래. 그럼 빨리 쫓아가자.”
“네!”
“알겠습니다!”
부아아아앙-
오토바이 세 대가 어느새 사라진 몬스터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