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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여기 있는 거냐 (94/125)

94화. 왜 여기 있는 거냐

[이쪽으로 쭉 달려!]

“응!”

정다은은 엘시스가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뛰었다.

길을 알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기운의 방향을 향해 가는 것이기에 온갖 장애물을 마주쳤다.

오른쪽 왼쪽 길을 꺾어가며 달리던 정다은은 더는 참지 못하고 담 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그리고 담장을 따라서 달리고 점프하기를 반복했다.

정령들의 도움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덕분에 속도가 훨씬 더 빨라졌다.

엘시스는 달리는 정다은의 옆에서 속으로 생각했다.

‘아까부터 이상하다 싶었는데….’

엘시스는 물의 정령왕이었다.

지구의 존재와는 비슷하면서도 조금 달랐지만, 순수한 자연의 존재로서 감각만큼은 다른 누구보다 뛰어났다.

그녀는 아까부터 주변 어딘가에서 지구에 맞지 않은 이질적인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학교에서 선생들이 하는 대화를 듣고 확신했다.

직감이 가리키는 곳에 그들이 말하는 몬스터가 있다고.

몬스터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건 아니었다.

그건 지구의 인간들이 알아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일 테니까.

문제는 그 느낌이 그리 낯설지 않다는 것이었다.

엘시스가 아는 몬스터는 몇 마리 없었기에 금방 추측할 수 있었다.

‘베로.’

듣자 하니 아직 사고가 벌어지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비상이 걸렸다면 발견된 게 작은 슬라임 정도는 아니라는 의미.

인간들이 존재만으로도 위협을 느낄 만한 몬스터라면 당연히 케르베로스인 베로일 것이다.

위험한 상황이었다.

인간들이 아닌, 그들이 잡으려고 혈안이 된 베로가 위험했다.

베로에 대해 알지 못하는 인간들은 발견하는 즉시 온 힘을 다해 죽이려 할 것이다.

피투성이로 죽어가는 베로의 모습은 상상하기도 싫었다.

과거, 몬스터에 대한 증오심에 직접 죽이고 싶었던 적도 있었으나, 지금은 그런 감정이 전혀 없었다.

직접적인 교류는 별로 없었지만 던전을 오가면서 숱하게 마주쳤고, 눈이 마주치면 인사 정도는 하는 사이였다.

베로는 마계에 사는, 그리고 아스키나 대륙을 침범했던 그런 몬스터와 다르다는 걸 지금은 엘시스도 잘 알고 있었다.

정다은은 하늘공원이라는 간판을 지나쳐 안쪽으로 더 들어갔다.

“엘시스, 여기야?”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저쪽으로 가보자!]

엘시스의 말에 따라 정다은이 잰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곳에서 목격한 것은, 베로와 그 아래에 깔린 한 사람이었다.

뭐가 그리 좋은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다.

[베로!]

엘시스가 소리쳐 불렀다.

베로가 귀를 쫑긋하며 고개를 들었다.

이곳은 던전이 아닌 지구였고, 정다은을 통해 나타난 것이었기에 엘시스의 존재감이 크지 않았다.

그래서 모습이 완전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목소리는 또렷하게 들려서 베로는 엘시스의 존재를 알아챘다.

“웡!”

꽤 오랜만에, 낯선 곳에서 마주친 익숙한 존재에 베로가 반갑게 짖으며 몇 걸음 다가갔다.

“허, 허억….”

몸 위에 있던 베로가 옆으로 비켜나자 황진성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숨을 가쁘게 내쉬었다.

베로가 무게를 다 싣진 않았는데도 무거워서 압박이 상당했다.

거기에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극한의 공포가 더해져 숨이 가빠오던 참이었다.

[이럴 때가 아닙니다. 베로, 지금 여기에 있어도 되는 것입니까? 현호 님께서 지시하거나 허락하신 일입니까?]

심각하게 묻는 엘시스에 베로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자신이 원해서 이런 상황이 된 게 아니었다.

물론 제 발로 담장을 뛰어넘었고, 여기까지 뛰어온 건 맞지만 진짜 현호의 말을 무시하고 날뛰려던 게 아니라 구름이가 잡혀가는 줄 알고 그랬던 거였다.

“워우우우우!”

생각할수록 억울하고 슬퍼져서 베로가 서럽게 울부짖었다.

[쉿!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내면 어쩌려고 그렇게 소리를 칩니까! 지금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 모릅니까!]

엄하게 다그치는 엘시스의 말에 베로가 입을 다물었다.

반가운 얼굴들을 연이어 만나 마음이 크게 놓였지만, 그렇다고 어리광부릴 때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것이었다.

한편 황진성은 울부짖는 베로의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새롭게 등장한 정다은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지난번, 가방을 강에 빠뜨렸던, 각성자 학교에 다닌다던 여자아이.

“너…! 왜 여기 있는 거야! 혼자 왔어?”

뜬금없는 등장에 황진성이 고개를 좌우로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아뇨. 엘시스랑 같이 왔어요!”

“어디에? 안 보이는데?”

“제 바로 옆에 있어요. 보통 사람들은 볼 수 없어요.”

그제야 전에 아이와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아이는 다른 사람과 온 게 아니라 항상 함께 다니는 정령과 같이 왔다는 얘길 하는 거였다.

그러고 보니 아이의 옆에 시퍼런 덩어리 같은 것이 어른거리는 게 보였다.

“꼬마야, 네가 나보다 강한 건 아는데, 그렇다고 너 혼자 그놈이랑 싸우는 건 너무 위험해. 네 그 정령이랑 같이 일단 도망쳐. 나는 사람들한테 도움을 요청할 테니까.”

황진성이 목소리를 낮추며 정다은에게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일어서서 도망치고 싶지만, 한동안 짓눌렸던 온몸이 저리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서 제대로 뛰지도 못할 것 같았다.

다행스럽게도 아직 저 검은 몬스터가 여유를 부리고 있으니, 희망은 있었다.

그러나 황진성이 핸드폰을 꺼내 드는 순간, 총알처럼 빠르게 날아온 물공이 그의 손을 강하게 쳤다.

파앗!

“엇…!”

방심했던 황진성은 핸드폰을 놓쳤고, 그의 핸드폰은 몇 미터 밖의 풀숲으로 튕겨 날아가고 말았다.

아연실색하여 양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았다.

“야! 너 미쳤어?! 이게 무슨!”

“사람들을 부르면 안 된대요, 엘시스가. 지금 와야 할 사람을 부를 테니까 조금만 기다리래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너 때문에 마지막 남은 기회도 날아가 버렸다고!”

황진성은 몬스터의 관심을 끌까 봐 큰소리도 내지 못하면서 화를 냈으나 정다은은 아랑곳하지 않고 베로를 쳐다보았다.

시선을 느낀 베로가 고개를 갸웃하며 정다은에게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정다은은 자기 몸집보다도 큰 베로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에도 겁먹지 않았다.

자기 자신보다도 더 믿는 엘시스가 옆에 있었다.

또한 그 엘시스와 잘 아는 친구인 듯하니 자신에게도 친구나 마찬가지였다.

정다은은 오히려 신기해하며 베로의 얼굴을 유심히 관찰했다.

거대한 덩치를 빼고 생긴 것만 보면 멋있게 생긴 검은 강아지나 다름없었다.

“멍멍아…?”

정다은이 얼굴 근처로 손을 내밀자 베로가 킁킁 냄새를 맡았다.

이런 작은 인간을 본 건 처음이었다.

베로와 정다은은 서로를 신기해했다.

‘저 겁대가리 없는 꼬마가…!’

한 입 거리밖에 안 될 것 같은 게 겁도 없이 괴물에게 다 가는 모습에 황진성은 기겁했다.

“떨어져! 너 그러다 죽는다고!”

뭐라도 해야겠다는, 거의 본능적인 생각으로 달려 나가던 황진성이 몇 초 뒤 걸음을 멈췄다.

정다은이 몬스터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몬스터는 스스로 허락해주듯이 고개를 아래로 숙여 머리를 대주고 있다.

황진성은 멍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지금 도시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든 그 몬스터를 저 작은 여자애가 아무렇지 않게 만지고 있다.

몬스터는 으르렁거리지도, 이를 드러내지도 않고, 그저 기분 좋은 듯이 눈을 감은 채 머리를 들이밀고 있다.

‘이게 말이 되나? 내가 뭔가 착각한 건가?’

순간적으로 저게 몬스터가 아니라 그냥 엄청나게 큰 개가 아닌가 싶었으나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고 보면 벌써 저놈을 마주친 지 10분도 넘는 시간이 흘렀는데, 이때까지 피 한 방울 보지 않은 게 이상하긴 하다.

정신없던 와중이라 미친 몬스터의 변덕 정도로 여겼는데 그것도 영 말이 안 된다.

거기다 맛을 보기 위해 핥는 일 정도는 있을 수 있다 쳐도, 볼에 이마를 비비던 행동 같은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꼭 어리광이라도 부리는 것 같은….

그때 몬스터의 검은 두 눈이 다시 황진성에게로 향했다.

흠칫 몸을 떠는 그에게 놈이 또다시 풀쩍 뛰어와서 머리를 들이대며 치댔다.

혼란스러워하는 황진성에게 정다은이 말을 말했다.

“아저씨를 엄청 좋아하나 봐요.”

“얘가? 나를?”

이 상황에서조차 실소가 터질 정도로 어이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마냥 부정할 수는 없는 게, 황진성 자신도 이 몬스터의 행동이 꼭 자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마침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허공이 갈라지며 게이트가 열렸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생각하기를 포기한 황진성의 앞에 놀랍게도 또 한 번 익숙한 사람이 나타났다.

“…당신은!”

던전 식당의 사장.

대광 정육점의 단골.

왜인지 볼 때마다 소름이 돋는 남자. 최현호였다.

그는 굳은 표정으로 걸어 나오더니 감정을 참는 듯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검은 몬스터는 그 한숨에 반응하는 것처럼 황진성에게서 물러나며 살랑거리던 꼬리를 아래로 말았다.

심지어 복종하는 것처럼 머리를 아래로 내리며 엎드리기까지 했다.

최현호는 낮게 중얼거리며 이마를 짚었다.

“베로…. 분명히 절대 이런 일이 생기면 안 된다고 했을 텐데.”

“끼이이잉…. 끼잉….”

‘일이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눈앞에서 무슨 일어나고 있는 건지, 황진성의 머리로는 도저히 해석할 수 없었다.

얼빠진 얼굴을 한 그에게 최현호의 시선이 닿았다.

“…그런데 넌 또 왜 여기 있는 거냐?”

자신을 향한 황당한 눈빛에 황진성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왜 있냐니… 몬스터를 잡아야 한다는 지시에 따라 성실하게 움직였을 뿐인데 방해물 취급을 하는 듯한 그 말에 기분이 상했다.

욱해서 그건 내가 할 말이라고 대꾸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이상해, 진짜.’

황진성은 원래 누구 앞에서 움츠러드는 타입이 아니었다.

자기보다 덩치가 크거나 힘이 센 상대더라도 깡다구 있게 개겨보는 편이었다.

그러다 진짜 얻어맞고 입을 다물곤 했지만.

물론 각성하고 일주일간의 기억을 잃은 후로 성격이 많이 죽긴 했으나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주눅 드는 일은 거의 없었다.

자신이 유달리 저 남자 앞에서 기를 못 편다는 것을 자각하고는 있었다.

지금 이 순간뿐 아니라 저 사람을 볼 때마다 그랬다.

눈을 마주치면 흠칫흠칫 놀라게 되고, 별다른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괜히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이유를 알 수 없으니 두렵다는 감정을 인정하기보다는 그냥 왜인지 싫은 사람으로 규정해두고 있었다.

그래서 다른 길드원들은 식당을 자유롭게 들락거리는데, 황진성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잘 가지 않았다.

“아저씨. 사람들이 오고 있대요.”

“나도 알아. 이 녀석을 어떻게 할지 좀 고민이 돼서…. 흠….”

정다은과 대화를 나눈 최현호는 황진성을 골칫거리 보듯 바라보고 고개를 저었다.

“할 수 없지. 같이 들어가자.”

최현호의 손짓에 황진성은 얼떨결에 걸음을 옮겼다.

그뿐만 아니라 엎드려서 눈을 꼭 감고 있던 검은 몬스터와 정다은도 줄줄이 그의 뒤를 따랐다.

그들 모두가 안으로 들어서고 난 후, 게이트는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

몇 분 뒤, 근방을 수색하던 십수 명의 헌터들이 나타났다.

“흔적 찾았어?”

“네. 이쪽이 발자국이 많이 있어요. 발자국 말고 흙이 팬 자국도 있고. 여기서 한동안 머물다 이동한 것 같습니다.”

“어느 방향으로?”

“그게… 발자국이 여기서 끊긴 것 같아요. 가까운 곳에는 더는 흔적이 안 보여요.”

“그럴 리가. 흙바닥이고, 여기까지 흔적이 남았는데 갑자기 그게 끊긴다고? 말이 안 되잖아.”

“그렇긴 한데 샅샅이 봐도 뭐가 안 나와서…. 이 장소까지 온 발자국은 있는데 떠난 발자국은 아직 못 찾고 있습니다.”

“그럼… 설마 일부러 여기까지 흔적을 남기고 숨어버린 건가? 우리에게 혼선을 주려고?”

누군가의 추측에 주변의 헌터들이 침을 꼴깍 삼켰다.

“…목격자들 말로는 물리적으로 강한 짐승처럼 보였다는데, 그 정도로 지능이 높을 수 있을까요?”

“그건 모를 일이지. 그 어떤 것도 단정 지을 수 없다는 거 알잖아.”

“그렇긴 하죠…. 쫓으면 쫓을수록 보통이 아닌 것 같습니다.”

헌터는 솔직히 도망치고 싶다는 뒷말을 겨우 삼키고 다시 수색을 시작했다.

그들은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사라진 몬스터의 흔적을 찾아 헤맸다.

그러나 누군가의 부서진 핸드폰 하나만을 발견했을 뿐 이미 다른 차원으로 사라진 몬스터를 찾아낼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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