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설마
황진성은 게이트 너머의 공간에 발을 디뎠다.
놀랍지는 않았다.
헌터로서 던전을 넘나드는 건 이제 그에게 늘 있는 일이었고, 눈앞의 남자가 던전 식당의 사장이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다.
그가 스스로 자기 던전으로 넘어가는 게이트를 만들 수 있는 것도 당연한 거였다.
하지만 이곳에는 부엌도 식탁도 없었고, 한성 휴게소도 아니었으며, 늘 지나다니던 통로도 아니었다.
익숙한 느낌의 동굴형 던전이었지만 분명히 처음 와본 곳이었다.
황진성이 드나들었던 한성 휴게소와 던전 식당이 아닌 또 다른 공간인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황진성은 표정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이에요, 삼촌!”
“잘 지냈어?”
“당연하죠! 엘시스가 있어서 맨날 안 심심해요.”
“너희 덕분에 큰일 생기기 전에 찾아냈네. 다행이다.”
정다은과 최현호가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에 황진성은 두 눈만 깜빡였다.
전혀 접점이 없을 것 같은 두 사람은 서로 잘 아는 사이로 보였다.
“문제는… 이 녀석이군.”
갑자기 자신에게 향하는 시선에 황진성이 움찔 몸을 떨었다.
그러고 보면 이거 진짜 위험한 상황일지도 모른다.
몬스터에게 찢길 상황을 벗어났다고 지금 안전해진 게 아니었다.
한껏 쫄아 버린 황진성을 앞에 두고 최현호는 잠시 고민했다.
귀찮은 일이 생기지 않게 할 수 있는 가장 깔끔한 방법은 기억을 지우는 것이다.
베로를 만난 것도, 자신이 베로를 다룰 수 있는 주인이라는 것도 기억하지 못하면 본인도 편할 테고 어디 말이 퍼질 수도 없다.
이 방법을 두고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이유는 이미 수개월 전에 황진성의 정신을 크게 건드린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미 예전에 황진성의 일주일 치 기억을 통째로 날려버렸고, 동시에 정신 좀 차리라고 세뇌 작업까지 함께 했었다.
사람의 정신은 어떤 면에서 연약하고 복잡하다.
몇 년도 아니고 몇 개월은 그리 긴 기간이 아니다.
짧은 기간 사이에 정신을 여러 번 건드리다 보면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
별문제 없을 수도 있지만, 부작용이 있을 가능성이 전보다는 확실히 높아졌다.
만에 하나의 경우를 생각했을 때, 섣불리 손을 대는 건 자중하는 게 맞을 것이다.
고민하는 최현호의 눈치를 살피던 황진성이 침을 꼴깍 삼키며 용기 내 입을 열었다.
“당신… 정체가 뭡니까? 여기는 어디고요? 식당이 아니잖아요!”
“식당 안쪽 공간이지. 내 던전에 내 개인 공간이 있는 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황당한 질문을 들었다는 듯 최현호가 웃으며 반문했다.
황진성은 휴게소와 식당을 오가며 던전이 어떻게 생겼는지 다 살펴봤었다.
던전은 그렇게 크지 않았기 때문에 냉장실과 창고 같은 공간이 있는 것도 언뜻 볼 수 있었다.
그밖에 다른 공간이나 통로는 더 보이지 않았다.
초반에 길드원들에게 이것저것 궁금한 걸 물어봤을 때도 이 던전의 존재 자체는 특별하지만, 그 외에 다른 특이사항은 없다고 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아무도 모르는 넓은 공간이 숨겨져 있었다니 수상한 거 아닌가?
“아니, 당연히….”
반박하려던 황진성의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어차피 이 남자의 능력은 던전을 다루는 것.
자기 소유의 던전이니 약간의 조작을 더 할 수 있다는 게 생각해보면 그렇게 충격적인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건 그렇다 치고, 이 몬스터는 뭐죠?
황진성의 손가락이 아래를 가리켰다.
시민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엄청난 덩치의 몬스터는 최현호의 앞에 납작 엎드려 있었다.
처분을 기다리는 듯이 순종적인 태도.
상식을 완전히 벗어나는 상황인 것이다.
“이 몬스터의 주인인 겁니까? 아니, 잠깐… 그럼 설마 몬스터를 부린다는….”
생각이 흘러가는 대로 말을 내뱉던 황진성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눈앞의 상대가 평범한 인간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간 느껴왔던 위화감이 이걸로 설명되는 것 같기도 하고….
“설마 나를 마족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최현호의 말에 황진성이 침을 꼴깍 삼켰다.
표정만으로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보였기에 슬쩍 넘겨짚어 본 것이었다.
마족에 관해서는 정확하지 않은 소문만 무성했다.
던전에서 실제로 만나봤다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지만 그런 존재가 없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사람과 유사하지만 사람이 아닌 존재.
마냥 난폭한 몬스터보다 마족이 무의식중에 더 두렵게 느껴졌다.
“……아, 아닙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심각하게 되묻는 황진성이 최현호에게는 어이없을 뿐이었다.
진짜 마족을 잘 아는 그의 입장에서는 자신을 마족으로 착각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럼 이 몬스터는 왜 이러고 있는 건데요? 누가 길들이지 않고서야 이렇게 고분고분하게 있을 리가 없잖아요. 몬스터가!”
“뭐, 이놈을 내가 길들인 건 맞지만 그게 꼭 내가 마족이라는 의미는 아니지. 이 녀석이 아주 어릴 때, 죽어가던 걸 내가 주워 살렸더니 곧잘 따르더라고.”
“몬스터를 주워 살렸다고요?!”
황진성이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땐 그냥 작고 귀여운 새끼였거든.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렇게 자라난 것뿐이야. 어릴 때부터 키웠는데 좀 커졌다고 죽일 수는 없잖아.”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하자, 황진성은 황당해하며 중얼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니 그럼 이렇게 몬스터를 길들일 수 있다는 걸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왜 이렇게 숨겨놓은 거죠?”
“괜한 오해를 사기 싫어서 그랬지. 너처럼 수상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한둘일 것 같아? 어차피 새끼 몬스터를 발견하는 것 자체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별다르게 도움 될 리도 없는데 괜히 일을 크게 벌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지.”
“…….”
황진성이 입을 다물었다.
의문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지만 두 개의 질문에 어느 정도 수긍 가는 대답을 듣자 더 할 말이 없어진 것이다.
어느 정도 상황을 납득하는 황진성의 모습에 최현호가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오늘 있었던 일은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마. 알겠지?”
이상한 압박감에 황진성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입을 잘못 놀리면 가만두지 않을 것 같은 느낌에 등골이 오싹했다.
지금까지의 말이 맞으면 이 남자는 마족도 아니고 다른 숨겨진 힘을 가진 것도 아니겠지만… 그래도 왠지 만만하게 볼 수가 없다.
“…얘기하면 어떻게 되는데요?”
두려움을 억누르고 황진성이 묻자, 최현호는 그저 어깨를 으쓱했다.
“뭐 어떻게 될 건 아니지. 그런 조건이 없어도 비밀은 지켜줄 거로 생각해.”
의외의 대답이었다.
당연히 협박이 튀어나올 줄 알았는데.
자신의 어떤 면을 보고 저렇게 말하는 건지 황진성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꼭 비밀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모를 일이죠.”
속을 들킨 기분에 괜히 한마디 덧붙였으나 최현호는 다 알고 있다는 듯 태연하기만 했다.
실제로 최현호는 황진성이 그의 말을 듣지 않을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과거 황진성에게 걸어두었던 암시의 효과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 영향으로 지금의 간단한 말 한마디 또한 자기 의지대로 거스를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그것조차 스스로의 생각이라 여기겠지만.
“얘기 끝났으니까 이제 돌려보내 줄게. 둘 다 사람들이 찾고 있을 테니까.”
“네, 아마도….”
“저는 선생님이 부르는데 그냥 뛰어왔어요.”
황진성은 자신을 찾고 있을 길드원들을 생각하고 표정을 굳혔다.
정다은은 그저 해맑기만 했다.
“하늘공원에는 분명 사람들이 몰려있을 테니까 다른 장소로 나가야겠지. 자, 이만 돌아가 봐.”
중얼거린 최현호가 게이트를 열었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삼촌!”
정다은은 손을 흔들면서, 그리고 황진성은 그저 얼떨떨해하면서 게이트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
바뀐 풍경을 본 둘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게이트 바깥은 하늘공원이 아니라, 옆 동네의 인적 드문 골목길이었다.
‘이게 된다고?’
다양한 던전으로 게이트를 연결할 수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게 지구에까지 적용되는 줄은 몰랐다.
이 능력을 자유자재로 쓰면 순간이동처럼 쓸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역시…. 평범한 사람은 절대 아니야.’
특수 능력을 갖춘 각성자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능력이 그저 헌터들에게 쉴 공간을 제공해주는 정도로 그칠 정도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여유로워 보이는 모습 뒤에 엄청난 것이 감춰져 있는 듯한 느낌….
그러나 여전히 뭐가 뭔지 자세히는 모르겠다.
황진성은 미심쩍은 눈빛으로 정다은을 내려다보았다.
“와, 신기해! 역시 삼촌은 대단한 사람인 것 같아.”
아이도 바뀐 주변 풍경에 놀라워하고 있다.
수상한 식당 사장과 아는 사이인 듯하지만, 이 아이에게 뭔가 더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꿍꿍이를 감추고 있기에는 너무 어린아이다.
“너….”
“아저씨, 오늘 재밌었어요, 안녕!”
혹시나 해서 한마디 물어보려는데, 정다은은 제 할 말만 하고 후다닥 달려 떠나버렸다.
“아니, 근데 왜 나한테만 아저씨래?”
황진성은 그 뒷모습을 보며 잠깐 툴툴거리다가 지금 상황을 깨닫고 한숨을 내쉬었다.
하늘공원에 먼저 가 있기로 해놓고, 얘기도 없이 갑자기 사라진 꼴이 되었다.
지금 바로 그곳으로 돌아가야 했다.
황진성은 헉헉거리며 달려가던 중에 길드원 한 명을 마주쳤다.
그는 황진성을 발견하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크게 소리쳤다.
“어, 야! 너 어디 있었어!”
“그게… 잠깐… 어….”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변명을 아직 생각하던 중에 딱 만난 터라 뭐라 둘러대지 못하고 어물쩍거렸다.
길드원은 다시 한번 큰소리를 쳤다.
“갑자기 통화도 안 되고, 무슨 일 있는 줄 알고 다들 걱정하고 있다고!”
“죄송합니다…. 핸드폰을 잃어버려서….”
“왜 하필 지금… 어쩌다 그런 거야? 그리고 연락을 못 하는 상황이 됐으면 만나기로 한 장소에 가만히 있어야지, 사고라도 생긴 줄 알았어.”
“죄송합니다….”
그 말밖에 할 말이 없어서 황진성은 고개를 푹 숙였다.
잘못한 게 없긴 하지만 설명하려면 비밀로 하기로 한 이야기를 모두 꺼내야 했기에 하는 수 없었다.
지원하러 나온 한성 길드원들에게 잡혀간 황진성은 유희진을 비롯한 길드원들에게 한참이나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
모두를 보내고 나서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일은 그냥 넘길 수 없을 정도로 큰 사고였다.
만약 엘시스의 지시로 물의 정령이 찾아와 알려주지 않았다면, 진짜 큰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베로가 자기를 공격하는 헌터들에게 반격해 다치게, 혹은 죽게 하거나, 반대로 그들에게 죽임당했을 수도 있었다.
다행히 큰 문제 없이 넘어가긴 했지만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기에 제대로 경각심을 가져야 했다.
그래서 혼을 내야 하긴 하는데….
‘베로만 잘못한 것도 아니긴 하지.’
솔직히 내가 너무 안일했다는 것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런저런 일을 저지르긴 해도 진짜 하지 말라고 한 건 칼같이 지키는 녀석들이었다.
그래서 이런 일이 생길 줄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사실 대비했어야 하는 게 맞다.
세상 모든 일이 생각한 대로만 흘러가지는 않는 법이니 애초에 내가 컨트롤 할 수 없는 영역까지 자유롭게 풀어줘서는 안 되는 거였다.
이대로 내버려 뒀으면 오늘과 같은 사고는 언젠가 한 번은 벌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오늘 이렇게 아무 일 없이 끝난 게 차라리 다행이었다.
베로는 내 앞에 엎드려서 흰자가 보일 정도로 나를 올려다보며 눈만 끔뻑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