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이 정도로만
베로의 눈빛에서 은근한 기대감이 느껴진다.
내가 고민하는 걸 보고 이대로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럴 수는 없지.’
내가 부주의했던 면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평소처럼 넘어가 버리면 베로가 경각심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의 안전을 위해 이번에는 따끔하게 혼낼 수밖에 없다.
“베로, 내 말 잘 들어봐. 오늘 네가 마음대로 바깥으로 나갔던 건…….”
베로는 정자세로 앉아 내 설교를 들었다.
처음에는 반성하는 듯 고개를 푹 숙이고 귀를 쫑긋거리며 내 말을 새겨듣는 것처럼 보였다.
“만약에 운 좋게 엘시스를 못 만나고, 헌터들에게 잡혔으면 어떻게 됐겠어? 그 사람들은 너를 그냥 난폭한 몬스터로만 생각한다고. 그러니까…….”
뭘 잘못했던 건지, 어떤 일이 벌어질 뻔했는지, 베로가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다 보니 말이 자꾸 길어졌다.
잠자코 듣고 있던 베로는 갑자기 서러운 듯 촉촉한 코를 씰룩거리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코를 훌쩍거리기도 했다.
이 와중에 슬라임들과 구름이는 통로 안쪽에서 머리만 빼꼼 내밀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꽤 심각한 분위기에 다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와 베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그동안 크고 작은 사건들은 종종 있었다.
베로와 슬라임 세 마리와 구름이까지, 총 다섯이 번갈아 가며 던전을 어지럽히기도 하고, 물건을 떨어뜨려 부수기도, 칼로스의 성에서 소란을 피우기도 했다.
모두 의도해서 생긴 일은 아니었기에 항상 그러면 안 된다는 언질만 주고 넘어가 주곤 했다.
성가시긴 해도 크게 위험한 일들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처럼 심각한 분위기는 처음이었으니, 다들 놀랄 만도 했다.
코를 훌쩍이다가 한숨을 푹 내쉬던 베로가 눈알을 굴리다가 저쪽에 머리만 나온 구름이를 발견했다.
베로는 앞발 하나를 들고 그쪽을 앞발로 가리키며 억울한 듯 소리 냈다.
“우우어어엉!”
“갑자기 왜 그래?”
이상한 행동에 질문하자 벌떡 일어서서 구름이에게 다가갔다.
살짝 물고 제자리에서 다리를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천장을 보며 우우우 짖었다.
구름이는 목덜미의 흰 털이 젖은 채 어리둥절하게 베로를 올려다보았다.
‘억울한 게 있다는 건가.’
그게 구름이와 관련된 것일 테고.
이렇게 어필하지 않아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거라는 생각은 이미 하고 있었다.
말썽을 부릴 작정으로 일을 저지를 녀석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
자기 마음을 알아달라는 듯한 애절한 눈빛에 마음이 좀 약해지려 했으나….
그렇다고 흐지부지 넘어가서는 안 되는 거 아닌가.
엄격하게 몇 마디 더 하자 베로는 금세 풀이 죽어버렸다.
“앞으로 내가 없을 때 지구에 있는 내 집으로 나가는 건 금지야. 베로뿐만 아니라 너희 모두.”
금지라고 해도 내가 있을 때 함께 가면 되는 것이니 사실상 별로 큰 억압은 아니다.
내 앞에 앉은 베로와 저쪽에 엿듣고 있는 슬라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 놀란 표정을 짓고 있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 결정이다.
‘이 정도로만 하고 끝내자.’
계속 언급거나 질질 끌면서 뭐라고 하지 말고, 엄격한 경고와 제어 장치를 추가하는 정도로 마무리하는 게 깔끔하겠지.
“베로, 앞으로는 그러지 말아야 해. 알겠지?”
목소리에 힘을 풀고 좀 따뜻하게 말하자 베로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어줬는데도 평소처럼 치대는 기색이 없다.
잘잘못을 떠나서 기분이 좋지 않은 건 어쩔 수 없겠지.
슬쩍 멀어지자 세 슬라임과 구름이가 짧은 다리로 열심히 달려 베로에게 다가왔다.
“삐이이!”
“삐이이익?”
“삐이잇!”
말랑말랑한 작은 손으로 베로의 검은 털을 쓰다듬어주고 토닥여준다.
“아오오오올!”
구름이는 베로의 앞에 앉아 제법 그럴싸해진 하울링을 보여준다.
각자의 방식으로 베로를 위로해주는 것 같다.
나는 굳이 끼어들지 않고 몬스터들끼리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었다.
***
며칠이 흘렀다.
한동안 사라진 검은 몬스터에 관한 뉴스로 세상이 떠들썩했다.
몬스터의 등장을 예측하지 못했고, 놈이 어디서 나온 건지 찾아내지 못했으며, 그리고 어디로 사라졌는지조차 모르고 있다.
하나만 벌어졌어도 심각한 세 가지 문제가 한 번에 터졌으니, 시스템의 빈틈이니 뭐니, 온갖 언론에서 난리가 났다.
무엇보다 제대로 놈을 잡지 못했으니 언제, 어디서든 그 몬스터가 다시 나타나 사람들을 공격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인 것이다.
물론 바로 그 몬스터인 베로는 얌전히 던전에서 자숙하고 있으나 그걸 알고 있는 사람은 오직 나밖에 없으니….
며칠 안 보이면 흐지부지되지 않을까 싶어서 모른 척하고 있었는데 전혀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외출을 꺼리고 있고 일 때문에 밖으로 나가더라도 불안감에 떨고 있는 상태였다.
게다가 상당수의 헌터들이 동원되어 밤낮없이 고생하는 중이니, 모른 척 그냥 넘기기에는 마음이 많이 불편했다.
그래서 지난 새벽, 아무도 보지 않는 틈을 타서 손을 좀 써놨다.
하늘공원 근처 숲속에 죽은 몬스터 한 마리를 놓아두고 온 것이다.
나쁜 짓이라도 하는 것처럼 주위를 둘러보며 몰래 작업하는 기분이 좀 묘하긴 했는데, 당장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으니 할 수 없었다.
여전히 계속 수색 중인 것 같으니 금방 발견되겠지 싶었다.
그리고 역시, 오전에 습관처럼 켜둔 TV에서 속보가 흘러나왔다.
얼마 전 도심 한복판에 나타났다 도망친 몬스터를 몇 시간 전에 발견해 처리했고,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난 곳도 확인하여 해결했다는 소식이었다.
“이걸 이렇게 넘어가네?”
솔직히 내가 생각하고 실행하면서도 이 정도로 넘어갈 수 있긴 할까, 혹시 다른 문제가 하나 더 생기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있었다.
왜냐하면 하늘공원에 가져다 둔 것은, 검고 크다는 것 이외에는 베로와 공통점이 하나도 없는 마물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며칠간 마계를 좀 둘러봤는데 의외로 베로처럼 완전히 새까맣고 커다란 몬스터는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바로, 전에 베로가 어디선가 잡아 왔던 문어처럼 생긴 몬스터였다.
그때 그놈 하나 더 잡아 올 수 있냐고 베로에게 물어봤더니 반나절 만에 금방 잡아 온 것이다.
내가 모르는 마계의 어느 곳에 이놈들이 모여 사는 거처가 있는 모양이었다.
어느 세월에 베로랑 비슷한 몬스터를 찾겠나 싶어서 그놈의 시체를 하늘공원에 가져다 놓았고.
확실한 마무리를 위해 시간을 끄는 것보다 어설프더라도 빨리 조치를 취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베로가 처음 발견된 것은 유동 인구가 꽤 많은 사거리 한복판.
목격자가 한둘이 아니었을 거고 그중에서는 베로의 생김새를 똑똑히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을 거다.
누가 봐도 개나 늑대처럼 보이는 베로와 달리 문어 마물은 눈알이 수십 개, 다리도 수십 개 정도 달린 징그러운 놈인데....
상황이 어떻게 흘러간 건지 확인하기 위해 TV 앞에 가서 뉴스에 집중했다.
[…블랙 옥토퍼스는 처음으로 발견된 몬스터로, 현재까지 어떤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는 명확히 확인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전문가들은 목격자들의 진술을 토대로 외형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갖추고 있을 것으로 추측하고…….]
방송은 추측이라는 단어를 쓰면서도 문어 몬스터가 그날 나타났던 놈이 맞는다는 전제로 계속 진행되었다.
또한 처음에 나왔던 S급 던전 브레이크를 찾아내 수습했다는 말은 완전 거짓말이었다.
아마 윗선에서는 진실과 거짓을 섞은 내용을 공표하여 시민들의 불안감을 잠재우는 걸 최우선으로 생각한 듯하다.
“일단 저게 최선이긴 하겠네.”
그 점을 노리고 대충 느낌만 비슷한 몬스터를 던져줬던 건데 생각보다 잘 먹힌 것 같다.
어떻든 사회의 혼란을 막아서는 게 우선일 테니, 사태를 매듭지을 만한 조그마한 명분이 필요했던 거겠지.
뉴스에서 나온 내용은 명확한 근거 없는 심증일 뿐이고, 실제로 해결되지 않은 점들이 많으니 정치권과 헌터 관리국 내부적으로는 더 혼란스러운 상황일지도 모르겠다.
‘거기까지는 내가 손쓸 수 없는 부분이지.’
이만하면 내가 할 건 다 했고, 이번 일은 어느 정도 마무리된 것 같다.
그러나, 아직 해결하지 못한 또 다른 문제가 하나 있다.
“베로?”
“…….”
그게 뭐냐면….
“베로? 거기서 혼자 뭐해?”
“…….”
그날 혼낸 이후로 베로가 너무 주눅 들어버렸다는 것이다.
완전히 풀죽은 모습으로 구석에 자리 잡고 벽만 보고 엎드려 있는 게 안쓰럽기 짝이 없다.
이것저것 먹을 것도 줘 보고, 이제 괜찮다고 얘기도 여러 번 해줬는데 그 순간만 잠시 밝아질 뿐, 얼마 지나지 않아 저렇게 다시 시무룩해진다.
아무래도 자기 때문에 다른 애들까지도 마음껏 집을 드나들 수 없게 됐다는 게 크게 속상한 것 같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그 일을 그냥 넘어가거나, 다시 자유롭게 풀어주는 건 안 될 일 아닌가.
시간이 지나면 또 풀릴 거로 생각하지만, 그래도 계속 이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신경이 많이 쓰였다.
뭐 좋은 방법이 없는지 고민 좀 해봐야 할 것 같다.
***
“저… 부르셨다고 들었는데요.”
쭈뼛거리며 다가오는 비실비실한 남자.
황진성이 가까이 오기 싫은 티를 팍팍 내며 아주 천천히 다가왔다.
베로가 도심에서 소란을 일으켰던 그 날 이후로, 황진성은 내 앞에 코빼기도 드러내지 않았었다.
분명 길드 활동은 계속하고 있고, 던전도 들락거리는 걸 아는데 내가 있는 식당에는 전혀 오지 않는 거였다.
물론 이전에도 그랬지만, 지금은 내가 휴게소를 지나다니면서도 마주치지 못한 거로 봐서 작정하고 피하고 있는 듯했다.
나름 해명하긴 했었는데, 황진성이 보기에 여전히 껄끄러운 부분이 있는 것 같다.
그렇다고 입단속을 더 할 필요는 없겠지만.
“맞아. 얘기 좀 하고 싶어서 불렀는데, 시간 괜찮지?”
“네… 뭐…….”
“내가 다른 길드원들 통해서 들은 얘기가 있는데….”
운을 떼자마자 황진성은 긴장한 듯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지레 겁먹은 듯 말을 끊으며 끼어들었다.
“저, 아무 얘기도 안 하고 다녔는데요? 진짜로! 무슨 일 있었냐고 묻는 말에도 그냥 별일 없었다고 했어요. 그래서 욕 엄청 먹었는데….”
“그게 아니라… 핸드폰 망가졌다고 들었는데, 아니야?”
“아…. 그, 그건 맞아요.”
“새 거 샀어?”
“아뇨. 일단 전에 썼던 거 잠깐 쓰는 중이에요. 좀 바빠서 알아볼 시간이 없어서….”
“그래? 그럼….”
나는 미리 준비해둔 돈 봉투를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
“이, 이게 뭡니까?”
“보상금. 그걸로 새로 하나 마련해.”
“네?”
황진성은 경계의 눈빛으로 봉투를 바라보다가 받아들었다.
그리고 슬쩍 내용물을 보고 눈을 크며 나를 보았다.
“내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 넉넉하게 넣어뒀으니까 좋은 거로 하나 사.”
“어, 어….”
이런 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지 완전히 당황한 모습이었다.
“싫어? 그러면 어쩔 수 없는 거고.”
“아뇨! 안 싫죠…. 가, 감사히 받겠습니다….”
황진성이 어색하게 눈치를 살피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눈동자가 불안하게 움직이는 것이, 머릿속이 복잡해 보였다.
표정이 좀 풀어진 걸 보면 생각보다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아직 어려서 그런지 얼굴에 생각이 그대로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