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성공
초반에 몇 번은 빵과 함께 마구 퍼먹었었다.
그러나 감히 초월자에게 이걸 더 달라는 소리를 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을 한 이후에는 참고 참으며 아주 가끔, 손톱만큼씩만 입에 넣고 최대한 오래 음미하곤 했다.
혹시나 변할까 봐 보존마법까지 걸어두었다.
그렇게 아껴먹었지만 몇 달이 흐른 지금, 유리병을 싹싹 긁어도 딱 한 번 맛볼 정도의 사과잼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마지막 즐거움을 조금 더 미룰지, 아니면 오늘 해치워버릴지 진지하게 고민하느라 타론은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때 그의 뒤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타론 님.”
타론은 흠칫 놀라며 후다닥 사과잼을 품 안에 숨겼다.
그리고 지레 찔려 크게 소리쳤다.
“뭐야!”
“죄송합니다. 밖에서 계속 불렀는데 말씀이 없으셔서 들어왔습니다.”
검푸른 머리에 마치 엘프처럼 뾰족한 귀를 가진 마족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흔치 않은 여성형 마족인 자크란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이 녀석이 찾아오기로 했다는 걸 깜빡 잊고 있었다.
“아아, 아니다. 기다리고 있었어. 앉아.”
자크란은 타론의 말에 따라 그의 앞자리에 앉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뭔가, 고민이 있으십니까?”
조금 전 뒤쪽에서 언뜻 봤을 때, 타론의 표정이 꽤 심각했던 걸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재빠르게 잼을 숨기는 동작은 그저 깊은 상념에서 깨어 놀란 것처럼 보였을 뿐이었고.
“고민이야… 언제나 있지.”
타론은 잔뜩 무게를 잡고 중얼거렸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자크란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조금… 아니, 꽤 심각한 문제가 있어서 보고드리러 왔습니다. 지금 타론 님이 생각하시는 것과 같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럴지도. 뭔지 한번 말해봐.”
눈앞의 마족이 사과잼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을 리는 없지만, 타론은 태연하게 고개를 까딱였다.
“요즘 마계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그… 새로운 마왕이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가설이 점점 기정사실로 되는 모양새입니다.”
“끄응….”
그간 설마설마하던 일이 실제로 일어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타론이 앓는 소리를 냈다.
“결국 전쟁이 벌어지려는 건가.”
“아마도… 그럴 것 같습니다.”
마족들의 세계는 언제나 마왕의 지배하에서 나름의 평화가 유지된다.
물론 그 아래에서 끊이지 않은 싸움은 있지만, 막강한 절대자가 있기에 어느 정도는 제어가 가능한 것이었다.
반대로 말하자면, 마왕이 없는 마계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된다.
강함을 추구하는 대다수의 마족은 마왕의 부재를 마계의 정점에 설 기회로 여기는 것이다.
타론이 태어나기도 전의 과거에 이런 일이 몇 번이나 발생했었다.
그리고 그 개싸움에 가까운 전쟁의 결과는 언제나 참혹했다.
승자도 패자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의 처참함만 남을 게 뻔히 보이는데도, 마족들은 이번만큼은 다를 거라 여기며 온 힘을 다해 싸울 것이다.
“타론 님은 가만히 있으실 생각입니까? 이건… 엄청난 기회 아닙니까.”
자크란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언제나 차분한 모습을 보이던 그녀가 붉은 눈을 빛내고 있었다.
감정 기복이 크지 않아 종종 잊어버리지만 자크란은 마족 중에서도 특히 더 호전적인 편이었다.
안타깝게도 전투에 대한 욕구에 비해 타고난 힘이 강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다른 놈들과 힘을 겨룰 기회가 다시 온다는 생각에 기뻐하고 있는 것이었다.
‘저게 일반적인 마족의 모습이긴 하지.’
타론 또한 자신의 힘에 아주 자신 있었고, 싸움도 즐기는 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좀 달랐다.
“기회… 아직은 모르겠군.”
“모르겠다고요? 대부분 마족들은 마왕의 아래에서 평생을 부하로 살다 죽습니다. 저도, 타론 님도 당연히 그렇게 살아갈 줄 알았는데…. 타론 님은 가능성을 떠나서 이렇게 마계의 최정점에 서기 위해 싸울 기회가 왔다는 것이 기쁘지 않으십니까?”
자크란이 답답해하는 게 느껴졌지만 타론은 입을 열지 않았다.
이미 몇 달 전, 타론은 이런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원래 칼로스의 편에 설 생각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미리 친분을 다져놓을 겸 지난번에 한 번 찾아가 보기도 한 거였다.
하지만 그저 가능성을 열어놓은 거였지, 100% 칼로스와 함께하겠다는 결론을 내렸던 건 아니었다.
칼로스는 현재 공식적으로 가장 강한 마족이지만 마왕만큼의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만일 타론을 포함한 다른 군단장들이 모두 힘을 합쳐 공격하면, 칼로스의 세력을 이길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하는 것이다.
칼로스의 편에 서서 조금 편하게 승리를 쟁취하는 것도 좋지만, 칼로스를 물리친 후 다른 마족들을 모두 죽이고 일인자의 자리에 오르는 것도 꽤 구미 당기는 일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마왕의 부재가 확정된 것이 아니었기에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간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엄청난 변수가 생긴 것이다.
‘초월자….’
칼로스의 옆에 있던 그 남자.
그가 가볍게 힘을 방출했던 순간을 떠올리기만 해도 등골이 오싹했다.
타론은 흠칫 떨리려는 몸을 겨우 진정시켰다.
두려워서, 그리고 말해봤자 과거의 자신처럼 믿지 않을 게 뻔해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만약 그가 관여한다면, 그리고 칼로스의 편에 서준다면 다른 마족들이 얼마나 힘을 합치든 아무 영향을 미칠 수 없을 것이다.
마왕과 유사한,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큰 힘을 가졌을지도 모르는 인간이었다.
드래곤에게 슬라임 수천 마리가 달려드는 거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만, 초월자가 마족들 간의 일에 관여할지, 그리고 칼로스의 편에 서 줄지는 미지수였다.
그때 보았던 칼로스는 분명 초월자에게 절절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초월자는 칼로스를 아주 자연스럽게 부려 먹었고.
명백히 상하가 있는 관계에서 그가 굳이 칼로스를 위해 힘을 써줄까?
생각해봐도 알 수 없는 문제였다.
“…타론 님.”
대답 없는 타론의 모습에 함께 침묵하던 자크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신중한 것도 좋지만 고민이 너무 길어지면 안 될 겁니다. 제가 알아본 바로는 5군단장과 8군단장이 최대한 빠르게 칼로스 님을 칠 준비를 거의 끝냈다고 들었습니다.”
“뭐, 벌써?”
생각보다 상황이 급박하게 흘러가는 것에 타론의 눈이 조금 커졌다.
자크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지난번 5군단장의 영역 근처에서 일어났던 사건 기억하십니까?
“알고 있다.”
모호한 물음이었지만 마계에서도 원체 조용한 지역이었기에 뭘 말하는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아무것도 없던 황야에 지진이라도 난 듯 뒤집혔던 그 사건.
“당시 그 땅에서 흘러나왔던 기운이 칼로스 님의 것과 유사했다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제대로 마왕 자리에 오를 준비를 하는 거라 여기는 것 같더군요.”
“칼로스 님이 그랬다고?”
“추측일 뿐이지만… 위협하기 위해 굳이 자기 영역을 벗어나 힘을 보였다는 얘기도 있고요. 원래 알고 있던 것 이상으로 강해서 다들 급히 움직이는 모양입니다.”
“…….”
칼로스가 굳이 그런 행동을 했을까?
아닐 것 같긴 한데, 그렇다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타론 님, 5군단장이 타론 님을 자기들 쪽으로 끌어들이고 싶어 하는 것 같더군요. 저에게 은밀히 생각을 떠보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타론 님이 혹시 벌써 칼로스 님에게 붙은 건 아닌지 의심스러워서 쉽사리 다가오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초월자가 있는 이상, 그가 칼로스에게 힘을 실어주지 않을지라도 칼로스의 편에 설 수밖에 없다.
피 터지는 싸움도 좋지만 타론은 이왕이면 살아남고 싶었다.
“알겠다. 생각을 좀 정리해보겠다.”
타론이 자크란에게 말했다.
굳이 결론을 확실히 전하지는 않았다.
자크란은 꽤 신뢰하는 부하 중 하나였지만 그렇다고 모든 생각을 공유할 필요는 없다.
특히나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누구든 믿기보단 경계하는 게 더 나을 것이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시간이….”
“시간이 얼마 없다고? 알고 있으니 그만 나가봐.”
“네.”
자크란은 자신이 타론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는 걸 깨닫고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아무래도 한 번 더 찾아가야겠지.”
타론은 털썩 자리에 앉아 품 안에 넣었던 유리병을 꺼냈다.
그리고 고개를 젖혀 남은 약간의 사과잼을 입에 탈탈 털어 넣었다.
***
구름이가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고 있다.
이제 중형견과 비슷한 크기가 되었고, 슬라임과 비교했을 때도 차이가 별로 나지 않았다.
민들레 홀씨처럼 가늘던 흰 털에는 이제 윤기가 흐르고, 옅은 갈색이었던 코는 새까맣게 변했다.
이 정도면 청소년기가 아닐까 싶다.
더 자랄 일이 없는 슬라임들은 그런 구름이를 종종 신기해했다.
호빵이는 양팔을 길게 벌려 구름이의 몸길이를 재어보려고 하고, 찐빵이는 통통한 팔을 뻗어 구름이의 몸 두께를 재보려는 듯한 행동을 하고 있다.
“삐이잇!”
“삐이….”
그리고는 서로 마주 보고 고개를 끄덕인다.
아마 이전에 쟀던 것보다 얼마나 더 커졌는지 의견을 나누는 게 아닐까?
만두는 바로 옆에 엉덩이를 깔고 주저앉아 그 모습을 구경하고 있다.
주변에서 저렇게 어수선하게 구는 게 성가실 만도 한데, 구름이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있다.
끄으으응….
온몸에 힘을 주고 눈을 질끈 감은 채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다.
구름이는 아주 진지할 텐데 보기에는 그냥 귀엽기만 하다.
‘얼음을 만들어보려는 거겠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얼음여우의 본능이 발동되는 모양인지 요즘 들어 아주 열심이다.
어느 순간, 구름이에게서 냉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근처에 붙어있던 호빵이와 짠빵이가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만두 옆으로 다가가 나란히 앉아 구름이를 보았다.
응원하는 건지 소리를 내기도 하고 두 손을 들어 흔들기도 한다.
그때였다.
파지직…!
공기 중에서 갈라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존재하지 않았던 무언가가 나타났다.
설마설마하며 그것을 바라보던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얼음? 성공한 건가?”
구름이가 드디어 얼음을 만들어낸 것이다.
막연히 아직 너무 어려서 당연히 실패할 거로 생각했는데, 갑작스러운 성과였다.
“삐이이이!”
“삐이이이익!”
“삐이잇!”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만 깜빡거리던 슬라임들이 환호하며 일어났다.
그리고 구름이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덩실거렸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 땅에 떨어진 얼음을 주워들었다.
주먹보다 훨씬 작았으나, 분명 아주 차가운 얼음 한 덩어리였다.
“구름아, 해냈구나!”
기특한 마음에 머리를 토닥이며 칭찬해주었다.
구름이는 스스로도 뿌듯한지 눈을 길게 감으며 꼬리를 살랑거렸다.
그때, 뒤쪽에서 익숙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베로가 찾아온 것이었다.
많이 뛰었는지 혓바닥을 내밀고 헥헥대고 있었는데, 표정만큼은 아주 밝았다.
까만 코에 촉촉하게 윤기가 흘렀다.
‘너무 재밌게 놀았나 본데?’
베로는 지금 황진성과 즐거운 놀이시간을 보내고 돌아온 참이었다.
나는 황진성에게 이용하지 않고 게이트가 없는 던전 안쪽 공간 일부를 공개해 그곳에서 가끔 베로와 놀아주는 시간을 갖도록 했다.
근처를 지나다닐 때 대충 봤더니 베로 혼자 신나서 일방적으로 날뛰고, 황진성은 굉장히 버거워하는 모습이었다.
아마 오늘도 얼굴이 핼쑥해져서 돌아갔을 것이다.
그렇다고 황진성이 얻는 것도 없이 이러는 건 아니었다.
그는 보기보다 멍청하지 않았다.
두어 번 베로와 놀아주고 난 다음에, 나에게 베로에게 자기 능력을 써봐도 되냐고 물었던 것이다.
베로와 황진성의 힘 차이는 장성한 어른과 갓난아기에 비할 수 있을 정도로 크다.
황진성은 한 번이라도 공격을 성공시키는 것을 목표로 열심히 능력을 쓰고, 베로는 그가 발산하는 줄기를 장난감처럼 붙잡아 뜯으며 즐거워했다.
나름 상부상조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계속 열심히 한다면 나중에는 황진성이 얻어가는 게 훨씬 많을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