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에서 식당합니다-100화 (100/125)

100화. 한 입만

리넬은 잠시 말을 흐리다가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하며 덧붙였다.

“그거야 당연히 흥미로우니까 그런 거지. 나도 꽤 오래 살아서 항상 무료하거든.”

“더 재밌는 구경거리로 만들기 위해서라는 건가? 악질이네.”

“그게 이런 좋은 정보를 준 사람한테 할 소리야?”

리넬은 짐짓 기분 나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진짜 불쾌한 건 아닌지 금세 표정을 풀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도 그놈들한테 당한 게 있거든. 그래서 이왕이면 네가 처리해줬으면 좋겠어.”

“직접 못 하는 일을 나한테 떠넘기는 거네.”

“힘으로는 내가 못 당하는 걸 아는데 어떻게 덤비겠어? 이렇게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거지.”

아무렇지 않은 듯 눈썹을 까딱이며 말하는데, 왠지 모르게 눈빛이 슬퍼 보였다.

그러나 빛 때문에 그림자가 져서 그랬던 것인지, 다시 보니 오히려 웃음기가 보였다.

“뭐, 이만하면 용건은 끝난 것 같네.”

“더 알려줄 건 없는 건가?”

“지금은. 혹시 더 전할 게 있으면 여기로 찾아오면 되는 거지?”

고개를 끄덕이자 리넬이 가볍게 몸을 일으켰다.

그러면서 뒤늦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여긴… 네 집이야? 동굴에서 사는 거? 설마 문명이 이 정도로밖에 발달 못 한 세계는 아니겠지?”

“당연히 아니지. 여긴 동굴형 던전이야. 세 개의 차원에 연결할 수 있는 내 공간이고, 식당이기도 해.”

“식당이라고? 그러고 보니….”

리넬은 얼굴에서 당황스러움을 지우지 못한 채 조금 더 유심히 주변을 살폈다.

“…진짜 식당이잖아? 설마 여기서 네가 직접 요리해서 판다는 말은 아닐 테고….”

“왜 아니야? 당연히 그 말이지.”

“아니, 초월자가 이렇게 살고 있다고?”

너무 황당해하는 리넬의 모습에 내가 더 황당했다.

“이게 뭐 이상한 건가?”

“이상해!”

“어떤 점에서?”

“아니, 초월자라면 이 세계에서 네가 가장 강할 거 아냐! 그 힘으로 얼마든지 세상을 주무를 수 있잖아? 공포심을 이용해 착취할 수도 있고, 악인으로 남기 싫으면 상황을 만들어서라도 영웅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칭송받으며 떵떵거리며 살아도 되고! 다른 초월자들은 다들 그렇게 하는데?”

“다들 그런다고?”

“아니 물론 전부 다는 아니겠지만….”

내 의문에 확신에 차 말하던 리넬의 목소리가 조금 줄어들었다.

그러나 잠깐 기억을 더듬는 듯 눈동자를 굴리던 그녀는 다시 확신에 차 말했다.

“아무튼 대부분 그렇게 해. 생각해보니까 내가 만난 초월자 중 일부 특이한 자들은 그냥 다른 인간들 사이에서 평범하게 사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식당을 하는 건 진짜 처음 보는 것 같아. 내가 꽤 많은 세계를 돌아다녀 봤는데 말이야.”

“…그래?”

듣고 보니 내가 별종인가 싶기도 했다.

뭐, 그렇게 우상화되어 대접받고 사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실제로 아스키나 대륙에서는 나를 거의 구원자처럼 여기고 있고.

하지만, 마계는 몰라도 지구에서까지 그렇게 사는 건 그리 좋은 선택은 아닐 것 같다.

‘여기는 좀 특수한 상황이니까.’

겉보기엔 평화로워 보이지만, 실상은 마계와의 충돌로 크고 작은 전투가 매일 계속되고 있다.

차원 단위로 봤을 때는 이게 안정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이유도 모른 채 언제나 몬스터와 대치하는 중인 것이다.

내가 인간의 편에 서서 마계를 싹 쓸어버릴 수는 없다.

그랬다간 또다시 세계의 균형이 무너져버리겠지.

이런 상황에서 내가 앞에 나서서 사람들의 눈에 띄어 버리면, 내 의사와 관계없이 앞장서서 몬스터를 처치해야만 할 것이다.

최선을 다해 놈들을 죽일 수도 없는 이도 저도 아닌 상황 속에서, 지금의 평화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질 것이다.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이 평화로운 일상인데 말이다.

지금처럼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들도 줄어들 거고.

생각할수록 그냥 이렇게 사는 게 나에게는 잘 맞는 것 같다.

나는 현재의 삶에 100% 만족 중이니까.

아마 지구의 특수한 상황이 아니더라도 이런 삶을 고수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 그냥 이렇게 사는 게 좋은데? 여유롭게 내가 좋아하는 일 하면서. 네가 말한 것처럼 권력을 휘두르며 사는 건… 글쎄, 처음에 잠깐 정도는 재밌을지 몰라도 결국 허무하지 않을까? 네가 말한 파괴자란 놈들은 네 말처럼 살다가 획 돌아버린 거잖아.”

“그런가? 듣고 보니 맞는 말 같기도 하고….”

그냥 떠오르는 대로 내뱉은 말인데 리넬은 의외로 진지하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더니 나와 눈을 마주치며 싱긋 웃었다.

“아무튼, 다음에 올 때는 좀 친절하게 맞이해줘. 갑자기 죽이려고 들어서 진짜 놀랐다니까.”

그 순간에는 침입자에게 당연히 그렇게 해야 했던 거지만, 도움을 주려 했다는 걸 알고 나니 조금 미안해졌다.

상처는 보이지 않지만, 목에 피를 약간 내기도 했고.

“좋은 정보를 더 들고 오면 당연히 그럴 수 있지. 원한다면 지구의 음식도 맛보여줄게.”

“그거 조금 기대되네.”

리넬은 미소로 답하며 허공에 가볍게 손짓했다.

그녀는 앞쪽에 생성된 게이트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

던전을 떠나는 리넬의 표정은 완전히 굳어있었다.

최현호와 마주했을 때 여유롭게 생글거리던 것과는 완전 딴판이었다.

“이번에는 뭐가 좀 다르려나…?”

오늘 만난 초월자는 여태껏 봐온 자들과는 뭔가 달랐다.

힘을 떠나서 생각이나 태도 같은 것들이 초월자 같지 않고 그저 평범한 인간에 가까운 듯했다.

이걸 좋다, 나쁘다로 평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런 작은 차이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결과를 낼 수도 있지 않을까?

리넬은 곧 고개를 저었다.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큰 법이다.

이미 수많은 기대와 좌절을 겪어왔으면서 또 어리석게 희망을 품을 뻔했다.

희미한 가능성에 기대어 벌써 몇 번째 같은 시도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번에도 거의 습관적으로 파괴되기 직전의 세계를 찾아왔지만….

“기대하지 말자.”

리넬은 작게 중얼거리면서 주변을 보았다.

이곳은 어딘지 모를 또 다른 세계였다.

그러나 이곳이 어디든 그녀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특별한 목적지가 없기에 정처 없이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

치이이이익-

뜨겁게 달궈진 팬.

그 위에 놓인 건 노릇노릇하게 익어가는 배춧잎이었다.

가스레인지를 앞에 두고, 나는 잠시 다른 생각에 빠졌다.

어제 갑작스럽게 나타난 방문자에 의해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동안은 홀로 짐작만 하고 있었는데, 그게 나만의 망상이 아닌, 실제로 다가오고 있는 위험이라는 걸 확실히 알게 된 것이다.

머리는 복잡해졌는데, 그와 별개로 마음은 오히려 편해졌다.

위험이 확실시되었는데, 마음이 편해지다니.

아이러니하지만 정말로 그랬다.

어정쩡한 평화 속에서는 뭘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지만, 지금은 뚜렷한 방향이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할 일은 리넬에게서 얻은 정보를 토대로 내 터전을 지킬 대책을 마련하는 것.

휘릭!

머리로는 딴생각을 하면서도 눈과 손은 요리를 보며 착실하게 움직였다.

깔끔하게 뒤집힌 배춧잎의 반대 면이 또다시 익기 시작했다.

“지금 뭐 만드는 거야?”

등 뒤쪽에서 슬쩍 머리를 들이밀며 지수가 물었다.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기니

“배추전이야. 이제 거의 다 됐으니까 상 좀 펴놔.”

“배추전? 들어만 봤지 한 번도 안 먹어봤는데.”

중얼거리며 뒤도는 지수의 목소리에 힘이 빠졌다.

뭔가 굉장히 맛있는 야식을 기대했는데, 그게 겨우 배추였다는 것에 조금 실망한 것 같았다.

원래도 채소보다는 고기를 더 좋아하는 애라서 더더욱 그럴 것이다.

얇은 계란 반죽이 노르스름하게 익은 배추전 여러 장을 접시에 담아 옮겼다.

찍어 먹을 간장 소스도 간단하게 만들었다.

젓가락 두 짝을 챙겨 온 지수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평소 맛있는 음식을 먹기 전에 항상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내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그만큼 오늘 메뉴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는 거다.

그리고 예상대로 지수는 젓가락을 잠시 들었다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까 저녁을 많이 먹어서 그런가 별로 안 땡기네.”

“맛만 한 번 봐.”

“굳이 안 먹어봐도 될 것 같아. 평범한 배추를 그냥 구운 거 아니야? 내가 아는 배추 맛이겠지, 뭐.”

“아닐걸? 딱 한 입만 먹어보고 판단하는 게 어때?”

“음….”

“정 싫으면 어쩔 수 없고.”

망설이는 지수를 두고 나는 젓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따끈따끈하게 김이 올라오는 배추전 한 장을 길게 찢었다.

그리고 반쪽짜리 배추를 젓가락으로 차곡차곡 접어서 간장에 찍은 후 입에 넣었다.

아삭하면서도 부드러운 식감에 배추를 덮은 얇은 계란 반죽의 맛이 고소하게 어우러진다.

배추 자체의 달큰한 맛과 간장의 맛이 더해지면서, 그냥 배추 맛 정도가 아니라 예상치 못한 아예 새로운 요리를 먹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럼 한 입만 먹어봐야지.”

내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자 최지수도 궁금하기는 한지 다시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빠트리지 않고 간장에 콕 찍은 다음 한입에 밀어 넣는다.

그리고 한입 씹는 순간, 최지수의 눈이 커다래졌다.

“어어?”

입은 계속 우물거리면서 나를 쳐다본다.

“이거 뭐야? 무슨 맛이 이래?”

어이가 없는지 황당한 웃음을 지으며 묻는다.

“맛 괜찮지?”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말을 흐리던 지수가 다시 한번 배춧잎 한 장을 찢어서 입에 넣었다.

“어이없어 진짜. 너무 맛있잖아. 그냥 배추에 밀가루 묻혀 구운 건데 어떻게 이런 맛이 나는 거야? 무슨 비법 같은 게 있어?”

“아니. 그냥 네 말대로 배추 구운 거야. 그게 원래 이런 맛이 나는 거고.”

“말도 안 돼. 이렇게 맛있는 걸 왜 몰랐지?”

아까의 영혼 없어 보이던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다.

지수는 후다닥 냉장고로 달려가 막걸리 한 통을 꺼내왔다.

“그건 또 언제 사다 놓은 거야? 그리고 아까는 배부르다면서?”

“몰라. 그새 꺼졌나 봐. 아, 애들도 불러서 같이 먹자! 이런 거 먹여도 괜찮은 거 아냐?”

“걔네는 못 먹는 게 없어. 그냥 동물이 아니잖아.”

“하긴…. 그런데 요즘 왜 이렇게 여기로 잘 안 나오는 거야? 못 본 지 꽤 된 것 같은데.”

한때 제집처럼 드나들던 녀석들은 요즘 들어 이쪽으로 잘 넘어오지 않았다.

베로가 크게 사고 쳤던 시점 이후부터였다.

황진성과 놀이를 시작한 후로 다시 밝아지긴 했지만, 그때 자기도 충격이었던지 베로는 제 발로 지구의 집으로 넘어오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 생각이 보여서 나도 굳이 이리로 불러내지 않았고.

슬라임들과 구름이 또한 베로를 따라 주로 던전에서 놀았다.

게이트를 열어 몬스터들을 부르자 얼마 지나지 않아 줄줄이 걸어 나왔다.

선두에 선 것은 세 마리의 슬라임들.

“삐이이이?”

“삐이잇!”

“삐이이익!”

“얘들아!”

한창 바쁜 시기를 보내는 중인 지수에게 가장 먼저 슬라임들이 다다다 뛰어가 찰싹 붙었다.

베로는 조금 머쓱하게 두리번거리며 걸어 나왔고, 구름이는 마냥 신나서 폴짝폴짝 뛰었다.

몬스터들에게 둘러싸인 지수는, 오랜만의 재회에 크게 기뻐했다.

그리고 식기 전에 먹어야 한다면서 서둘러 배추전을 한 장씩 나눠주었다.

“삐이?”

다짜고짜 들이미는 배추전을 받아들고, 슬라임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베로와 구름이는 입에 직접 물려줘서 생각할 것도 없이 우물우물 씹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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