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좋은 기회
평소 육식을 즐기는 베로와 구름이였지만, 배추전은 마음에 드는지 빠르게 삼키고 다시 얼굴을 들이밀었다.
“하나 더 달라고?”
“웡!”
묻자마자 나란히 고개를 끄덕이는 베로와 구름이에게 전을 한 개씩 더 물려줬더니 잘도 받아먹는다.
낯선 음식에 고개만 갸웃거리던 슬라임들도 어느샌가 배춧잎을 부여잡고 잘 먹고 있다.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리넬이 다시 돌아온다면 지금 대책 없이 뭐 하는 거냐고 한마디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때가 올 때까지 전전긍긍하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아직 시간적인 여유는 있으니 일상을 계속 유지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준비할 생각이다.
머리를 식힐 때는 식혀줘야 오히려 능률이 높아지는 법이지.
“벌써 다 먹었네?”
“이상하게 질리지도 않고 자꾸 들어가. 이렇게 먹으면 나 혼자 한 포기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봐봐. 애들도 많이 먹었는데 더 먹고 싶은가 봐.”
확실히 자극적이지 않아서 끝도 없이 슬렁슬렁 들어갈 것 같다.
아래를 보니, 지수의 말대로 슬라임들이 공손히 두 손을 내밀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베로와 구름이도 입맛을 다시면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알았다, 알았어.”
무언의 압박에 나는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한참 동안 배추를 구워줘야 했다.
***
칼로스의 성 한쪽 구석에 빗자루와 물걸레를 든 세 마리의 스켈레톤들이 모여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크르르륵?”
“크륵크르르르…. 키엑.”
“키이이 키이이익!”
그중 하나가 무심코 농담 한마디를 던졌는데, 그게 꽤 웃겼는지 두 마리 스켈레톤이 허리를 젖히며 웃기 시작했다.
“크르르르! 키기기기긱!”
“끄그그으으! 르르륵!”
그냥 한 말이었는데 의외로 격한 반응이 돌아오자 농담을 던졌던 스켈레톤도 기분이 좋아졌다.
“키기기기! 크르르르!”
그래서 익살스러운 몸짓을 하며 또 한마디를 덧붙였다.
자기가 생각해도 재치 있는 소리였기에 또 한 번 큰 웃음이 돌아올 거로 예상했다.
그러나,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갑자기 싸하게 가라앉았다.
배를 부여잡고 고개를 덜그럭거리며 웃던 두 스켈레톤에게서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농담을 던졌던 스켈레톤이 조금 당황하며 입을 열었다.
“크르륵…? 키에에에!”
이해를 잘못한 건가 해서 설명을 덧붙였으나 분위기가 전혀 수습되지 않았다.
뭔가 이상했다.
스켈레톤은 침착하게 갑자기 이상해진 친구들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들의 텅 빈 눈은 자신이 아니라 그 너머의 무언가를 향하고 있었다.
게다가 뼈마디가 다닥다닥 맞부딪칠 정도로 잘게 떨고 있다.
공포로 떨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스켈레톤들이 이곳에서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끼기기기긱.
스켈레톤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검은 털 사이에서 빛나는 붉은 눈동자가 그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동시에, 얼음장처럼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뭣들 하는 거냐.”
다다다다닥.
세 스켈레톤이 턱을 달달 떨며 고개를 푹 숙였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서 시시덕거리고 있느냔 말이다! 하라는 일은 다 마치고 이러는 거냐!”
중간에 잠깐 잡담하며 쉬는 정도는 평소 신경도 쓰지 않았는데….
오늘따라 그런 사소한 일이 거슬릴 정도로 기분이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스켈레톤들은 괜한 화풀이에 풀이 죽은 채 흩어졌다.
“게으른 놈들….”
칼로스는 혀를 차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속으로는 스켈레톤들이 크게 잘못한 게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에 불쑥 짜증이 치밀어올라 아무렇게나 분출해버린 것이었다.
못난 자신의 모습을 자각한 칼로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 전, 붉은 머리 마족 타론이 칼로스의 성에 찾아왔었다
저번보다도 더 은밀하게 찾아온 그는 중요한 사실들을 전달하고 빠르게 다시 돌아갔다.
흩어졌던 전력을 모아 나중에 합류하겠다면서.
그리고 칼로스에게 왜 이렇게 손 놓고 있는 거냐며 따끔한 충고도 한마디 했다.
타론이 현재 파악한 세력들만 해도 만만히 볼 수준이 아니라고 했다.
가능하면 초월자의 힘을 빌리는 게 좋을 거라는 말도 남기고 떠났다.
마계 전쟁이 진짜 코앞에 다가온 것이다.
이제 그냥 지켜보고만 있을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타론은 곧장 충직한 부하들을 불러 모았다.
현재 그의 성에 있는 것은 스켈레톤뿐이지만, 바깥에는 칼로스를 따르는 마족들이 존재했다.
칼로스는 정치력이나 휘하를 관리하는 능력이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힘을 동경하며 따르는 추종자들은 아주 많았다.
절대적인 강자인 마왕을 제외하면 그는 누가 뭐라 해도 현 마계에서 가장 강한 마족이었으니까.
오히려 강한 힘을 타고났기에 그런 능력을 키울 필요가 없었던 이유도 있었다.
꽤 오랜 기간 소홀히 했음에도 부름을 받은 절반 이상의 직속 부하들이 즉각 그의 앞에 나타났다.
그러나 1/3에 가까운 나머지 마족들은 한참을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일부는 아예 소식이 없었고, 몇몇은 올 수 없는 불가피한 이유를 전해왔다.
‘핑계일 뿐이지.’
머리가 있는 마족이라면 모두 전운을 감지하고 있을 터였다.
이런 와중에 명령에 불복종하는 놈은 매우 높은 확률로 딴짓을 꾸미고 있는 것이다.
아군이 아니면 모두가 적인 상황.
이런저런 이유로 신경이 곤두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칼로스는 몇 시간 전, 그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던 수십 명의 마족의 목을 베고 돌아왔다.
정신 못 차리고 덤비는 놈도 있었고, 뒤늦게 어리석었다는 걸 깨닫고 옛정에 기대어 목숨을 구걸하는 놈도 있었다.
어떤 반응을 보이든 모두의 결말은 동일했다.
이런 일에 사정을 봐줄 만큼 물렀다면 이 자리에 설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뒷맛이 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오늘 그가 죽인 마족 중에는, 철석같이 믿었던 부하들도 끼어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예전 같았으면 마왕 직속의 마족들이 딴마음을 품는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텐데, 이렇게나 체계가 흐트러지다니….
‘확실히 마왕의 빈자리가 크구나.’
아쉽거나 그리운 건 전혀 아니었다.
전대 마왕에게 복종했던 것은 다른 마족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두려움에 의한 것이었으니까.
다만 앞으로가 걱정이었다.
과거, 혈기 넘치던 어린 칼로스였다면 지금의 상황을 마냥 즐기며 폭주했을 것이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마왕이 없는 지금, 그 자리를 차지할 가능성이 가장 큰 것은 당연히 이인자인 자신이 아닌가.
그러나 지금의 칼로스는 연륜과 경험이 꽤 쌓인 노련한 마족이었다.
아무리 현재 공식적인 최강자라지만, 자신은 마왕에 비하면 충분히 덤벼볼 만한 상대였다.
아직은 다들 눈치만 보고 있는 듯한데, 누구 하나가 물꼬를 튼다면 너나 할 것 없이 미친 듯이 공격해오겠지.
서로가 서로를 죽이려는 난전이 되겠지만, 칼로스는 그중에서도 반드시 죽여야 하는 공격대상 1순위였다.
아무리 그라 해도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내가 이길 수 있을까?”
문득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에 칼로스는 스스로 놀라고 말았다.
그리고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 깊은 곳에 패배하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숨어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계 제1군단장 칼로스가 어쩌다 이렇게 한심한 놈이 된 것인가…!’
아무래도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 자신감이 많이 떨어져 버린 것 같다.
언제나 자신감 넘치고 당당했으며 뭇 마족들의 존경을 받아왔던 그였다.
이렇게 불안하고 자신 없었던 적이 평생에 없었던 것 같은데….
이건 아무래도 초월자 때문이었다.
체감상 마왕보다도 강한 것 같은 그의 앞에서 칼로스는 언제나 하찮은 미물이 된 기분이 들었다.
실제 초월자도 그것과 비슷하게 취급하는 것 같기도 하고….
싸움은커녕, 그가 최근 가장 열심히 했던 일은 베로와 슬라임들, 그리고 구름와 같은 하찮은 몬스터들 돌보기가 아니었던가.
그래도 전대 마왕은 그의 힘을 꽤 인정해줬던 것 같은데 초월자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는 것 같고.
1년이 넘게 이렇게 지냈으니 자신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장 황당한 것은 칼로스 자신이었다.
이제는 이런 환경에 완전히 적응해버린 것이다.
지금의 복작복작한 성 분위기도 좋았고, 몬스터들을 돌보는 일도 꽤 만족스러웠다.
특히 구름이가 놀러 오는 건 항상 기다릴 정도로 좋았다.
또한, 초월자가 시키는 일들을 해내고 가끔 무심한 칭찬을 들을 때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으니, 가장 답 없는 건 결국 자기 자신이었다.
‘일단은… 알려야겠지.’
급한 대로 처리할 일은 처리했다.
다음 수순은 당연히 전쟁이지만 그 전에 초월자에게 상황을 보고할 필요는 있었다.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이 떠오르는 걸 보면, 이제 완전히 그의 부하가 되어버린 것 같다고 칼로스는 생각했다.
이제는 그런 생각에도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
칼로스는 평소보다 목소리를 훨씬 깔고 마계의 현황에 대해 말했다.
이전에도 대충 들은 적이 있었기에 긴 설명은 필요 없었다.
“전쟁이라…. 목적은 비어있는 마왕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것이고….”
“그렇습니다.”
“거기서 네가 이길 수 있게 도와달라는 말인가?”
“꼭 그런 건 아니고…. 당분간 성을 비울 것 같아서 미리 알려드리려고….”
“뭐야, 자신 있나 보네? 하긴 제1군단장인가 뭔가라고 했었지?”
“맞습니다. 그런데 자신 있는 건 아니고…. 도와주실 수 있으면 좀 더 좋을 것 같은데…. 또 꼭 그래야만 한다는 것도 아니고요….”
칼로스가 털이 북슬북슬한 볼을 긁적이며 어물쩍거렸다.
뭘 좀 해줬으면 좋겠는데 나에게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말하기도 어려우니까 저러고 있는 것이다.
‘마계 전쟁이라….’
차라리 좋은 기회가 될지도 모르겠다.
“좋아. 도와줄게.”
“…! 어, 어떻게요? 혹시 마왕이 되시려는 겁니까!”
“응? 아닌데?”
“아, 아니군요.”
칼로스는 왜인지 실망한 얼굴이었다.
“뭐냐? 내가 마왕이 되기를 바라는 거야? 그냥 도와주는 정도가 아니라?”
“아니, 그게…. 도와주셔서 승리한다고 하더라도, 그 후가 또 문제라서 그럽니다. 저에게 전대 마왕만큼의 압도적인 힘이 있는 게 아니니 계속 반발하는 세력들이 생길 게 뻔해서…. 사실 마왕의 힘을 가지고 탄생한 게 아닌 일반 마족들이 감당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거든요. 저도 마찬가지고….”
“흠…. 그것도 그렇겠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그렇다고 내가 마왕이 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마계 최고의 권력자가 되고 싶었던 적도 없고, 들어보니 만만한 자리도 아니다.
편하게 놀고먹는 게 아니라 해야 할 일도 많고 책임도 많은 자리인 것이다.
또한 그러려면 적극적으로 전쟁에 끼어들어 힘을 보여줘야 할 테고.
내가 너무 힘을 과도하게 쓰면 차원의 균형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이래저래 시간도 많이 쏟아야 할 테니 좋은 점이 하나도 없다.
그보다는….
“네가 강해지면 될 거 아니야?”
“제가요?”
칼로스가 멍청한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 스스로를 가리켰다.
나는 씩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칼로스를 아주 강력한 마왕으로 만들고 내가 그를 주무르는 것이 가장 편하고 효율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