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의심
킁킁.
킁킁킁.
베로와 구름이가 칼로스의 성 바닥에 코를 대고 씰룩거린다.
칼로스가 전장으로 떠난 지 2주째.
사라진 그의 흔적을 열심히 찾고 있는 것이다.
당분간 보기 어려울 거라 설명은 벌써 해줬는데 혹시 모른다는 생각인지 자꾸 저렇게 냄새를 맡고 다닌다.
삑삑거리며 성안의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는 슬라임들도 칼로스의 행방이 궁금한 것 같다.
시간 날 때마다 자기들 마음대로 들락거리던 곳이다.
그리고 할 일도 없는지 칼로스는 거의 매일 이곳에 있었고.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코빼기도 보이지 않으니 얘들 나름대로 걱정이 되는 모양이다.
‘항상 있던 놈이 사라지니 은근히 허전하긴 하네.’
성에서 일하는 스켈레톤들도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다.
이들은 칼로스가 뭘 하러 갔는지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자신들의 주인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종종 칼로스의 화풀이 대상이 되는 것 같던데 뭐 저렇게 충성스러운 건지.
내가 저놈들이었으면 자유를 찾아 떠났을 것 같건만, 마계의 순리는 알다가도 모르겠다.
쿠우우웅…!
귀로 들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저 인간의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힘의 파장이 느껴진 것이었다.
드넓은 마계의 어느 한 구역에서 방금 거대한 충돌이 일어났다.
몇 시간 잠잠하더니, 다시 격돌이 시작되었나 보다.
‘이 정도 힘이면, 칼로스인가?’
아마도 맞을 거 같다.
현재 마계에서 느껴지는 힘 중 가장 강렬한 걸 보면.
던전의 헌터들 앞에 게이트를 연결하는 것처럼 칼로스에게도 금방 가볼 수 있겠지만 굳이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칼로스가 우위를 점하고 있을 거라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힘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기에 스켈레톤들처럼 걱정이 되지는 않는다.
칼로스는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잘해낼 것 같다.
‘적당히 해야 할 텐데.’
내가 지금 걱정하는 건 칼로스가 지는 것이 아니었다.
현재의 칼로스가 패배할 가능성은 없으니까.
그보다는 다른 마족들의 사상을 최소화하는 게 중요하다.
압도적인 힘으로 빠르게 제압하고 굴복시켜야 하는 것이다.
지금은 상대하는 마족들은 칼로스가 마왕의 자리에 오르고 난 후에는 모두 그의 전력이 될 것이다.
마계 전쟁은 끝이 아니라 진짜 적에 대비하는 준비단계일 뿐이다.
급박했던 상황이라 외부의 적에 관한 얘기까지 자세히 하진 못했지만, 마구잡이로 죽여서는 안 된다는 말을 분명히 해두었다.
보기와 달리 그렇게 멍청한 놈은 아니니 설마 까먹고 날뛰진 않을 것이다.
“그만 돌아가자, 얘들아.”
내 말에도 미련이 남는지 조금 더 성을 둘러보던 몬스터들이 겨우 발길을 돌렸다.
***
점심시간을 넘겨 한성 길드원들도 거의 없는 한산한 식당에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사장님! 잘 지내셨어요?”
나를 발견하자마자 밝게 부르는 사람은 헌터 관리국의 송혜연이었다.
“어서 오세요. 얼굴 뵙는 건 오랜만인 것 같네요.”
“그러게요. 별로 멀지도 않은데 오기가 힘든 건지.”
“바쁘시니까 그렇죠. 앉으세요.”
내가 가리킨 주방 앞자리에 송혜연이 앉았다.
그리고 곧바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맞아요. 엄청 바빠요. 오늘은 마침 외근이 가는 길에 딱 맞아떨어져서 이렇게 들렀는데 평소에는 멀리서 밥 먹을 엄두도 안 나더라고요. 매일 야근이라 저녁에 오기도 힘들고. 진짜 죽겠다니까요.”
나는 그녀의 말에 조금 놀랐다.
바쁘다는 것 자체는 전혀 특별한 일이 아니다.
헌터 관리국은 늘 일손이 모자랐고, 예상치 못한 일들이 여기저기서 발생하는 건 일상이었으니까.
내가 놀란 것은 송혜연의 태도 때문이었다.
일 중독 수준으로 일을 즐기는 사람인데 오늘은 정말로 좀 지친 것처럼 보였다.
“요즘 많이 힘드신가 봐요?”
“솔직히 그러네요…. 지난번 블랙 옥토퍼스 건도 그렇고…. 요즘 따라 잘 안 풀리는 일이 너무 많아서요.”
“…블랙 옥토퍼스 일은 그때 공식 발표하고 마무리된 거 아닙니까? 꽤 지난 것 같은데 아직 해결이 안 됐나 봐요?”
“그런 건 아닌데, 내부적인 이슈가 있어서요.”
송혜연이 눈썹을 찡긋하며 어물쩍 넘겼다.
더는 말할 수 없다는 의미.
하지만 말하지 않아도 나는 실상을 알고 있다.
그리고 속으로 조금 찔렸다.
그건 베로가 저지른 사건이었고, 즉, 베로를 관리하지 못한 내가 한 일이기도 했으니까.
‘아직도 그 일 때문에 고생 중이었다니.’
인간의 상식과 능력으로는 절대 알아낼 수 없는 문제인데 그걸 풀려고 하니, 힘이 들 수밖에 없다.
“뭐 드시고 싶으세요? 만들어드릴게요.”
“음…. 혹시 파스타 같은 것도 돼요?”
“물론입니다. 뭐 좋아하세요? 토마토 스파게티? 아니면 크림?”
“음…. 아, 알리오 올리오가 먹고 싶어요. 마늘 향이 엄청 진하게 나는.”
“그것도 좋죠.”
팔을 걷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요리에 들어가기 전에 차 한 잔을 먼저 내주었다.
달각.
따뜻한 물 위에 꽃잎이 동동 떠 있다.
“와, 뭐예요? 너무 예쁘다.”
“꽃차예요. 한번 마셔보세요.”
송혜연은 찻잔을 들어 올려 꽃의 향기를 깊게 음미했다.
그것만으로도 조금 곤두서있던 표정이 자연스럽게 풀렸다.
통증 완화가 주 효능이지만, 신경 안정 효과도 있으니 스트레스를 조금이라도 풀어줄 수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요즘 고생하는 것에 내 탓도 조금은 있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어 서둘러 한 잔 준 것이었다.
송혜연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꽃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그럼 시작해볼까.’
냄비에 물을 담고 불 위에 올렸다.
알리오 올리오.
정확한 명칭은 알리오 에 올리오(Aglio e Olio).
이탈리아어로 알리오는 마늘, 올리오는 올리브유를 뜻하므로, ‘마늘과 올리브유’라는 아주 정직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이름 그대로 마늘과 올리브유를 사용해 만드는 아주 간단한 파스타이고, 만드는 게 어렵지는 않다.
하지만 그게 맛을 내기 쉽다는 의미는 아니다.
별다른 소스 없이 마늘과 올리브유만으로 파스타의 풍미를 살려야 한다는 말이니까.
보글보글보글.
소금과 올리브유를 넣은 물이 끓기 시작했다.
촤르르륵!
파스타 면을 동전만큼 쥐어 냄비에 넓게 펼치며 담아주었다.
딱딱했던 면이 곧 부드럽게 휘어지며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다음으로 깐 마늘을 한 움큼 꺼내어 도마 위에 올렸다.
탁탁탁탁탁!
그리고 빠른 속도로 썰었다.
절반 정도는 완전히 다지고 나머지는 편 썰기를 했다.
휘리리릭!
팬에 올리브유를 넉넉하게 두르고 썬 마늘을 모두 부었다.
기름이 곧 달아오르고 지글지글 마늘이 익어간다.
마늘이 갈색빛을 띠기 시작하면 여기서부터는 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전분이 나와 뿌옇게 변한 면수도 한 국자 부어준다.
치이이이익!
거의 다 익은 면을 팬으로 옮겨 담아 조금 더 익혀준다.
이제 마지막 단계인 만테까레만이 남아있다.
유화(乳化)라고도 하는데, 올리브유와 면수가 잘 섞여서 끈적한 소스처럼 만들어 면에 코팅되도록 하는 것이다.
불을 끄고 팬에 스냅을 주었다.
파스타 면이 위로 살짝 솟았다 떨어진다.
공기와 마찰하며 묽은 액체 상태였던 면수와 기름이 점차 크림화되었다.
넓은 접시에 알리오 올리오를 깔끔하게 올리고 마늘도 남기지 않고 올려주었다.
“치즈 좋아하세요?”
“아, 네, 네!”
물 흐르듯 흘러러 가는 요리 과정을 넋을 잃고 구경하던 송혜연이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탈리아에서는 알리오 올리오에 이렇게 치즈를 뿌리지 않는다고 알고 있지만….
‘정통보다는 역시 입맛에 맞춰 먹는 게 최고지.’
나는 치즈 덩어리를 쓱쓱 갈아서 듬뿍 얹어주었다.
흰 치즈가 눈처럼 소복이 쌓였다.
마지막으로 파슬리를 대신하여 아스키나 대륙에서 가져온 허브인 신트 가루를 톡톡 뿌렸다.
“여기, 다 됐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익은 마늘 향과 고소한 치즈 향이 솔솔 올라온다.
보기엔 좀 밋밋해 보이지만, 맛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송혜연은 포크에 한입 크기로 돌돌 면을 말아 입에 넣었다.
“으음!”
우물우물 씹으면서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리고 입에 있는 것을 꿀꺽 삼키고 입을 열었다.
“진짜 맛있어요! 지금까지 먹어본 것보다 오늘 이게 제일 맛있는 것 같아요! 사장님, 양식도 되게 잘하시네요!”
“알리오 올리오는 저도 좋아해서 자주 해 먹거든요. 손이 많이 가는 것도 아니고 해서.”
“저도 자주 해 먹긴 하는데… 흠, 왜 이렇게 다른 걸까요….”
송혜연은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아주 깨끗하게 그릇을 비워 나를 뿌듯하게 만들었다.
신트 가루도 효과를 발휘했는지 아까 식당에 발을 들였을 때에 비해 얼굴이 훨씬 밝아졌다.
나는 남은 꽃차를 좀 챙겨 송혜연에게 주었다.
식당을 떠나기 전 송혜연이 조금 머뭇거리다가 말문을 열었다.
“아, 그리고 사장님께 알려드릴 게 하나 있는데요….”
“뭐죠?”
“며칠 후에 국장님께서 식당에 방문하실 것 같아요.”
“국장이라면, 헌터 관리국 국장 말입니까?”
“네. 박문석 국장님이요.”
“갑자기 여긴 무슨 일로….”
“예전에 처음 식당에 대해 보고드렸을 때부터 오고 싶어 하시긴 했어요. 희귀한 능력이니 직접 확인해보고 싶다고요. 또 워낙 소문도 많이 나 있고 계속 얘기도 드렸었거든요.”
“그럼 그냥 식사하러 오는 건가요?”
“그렇게 말하긴 하셨는데요. 제가 또 국장님과 일한 지가 오래돼서 무슨 생각이신지 대충은 알아채거든요. 그런데 음….”
뜸 들이는 걸 보니 그렇게 순수한 의도만 있는 것은 아닌 듯하다.
“아무래도 국장님이 현호 씨를 의심하고 있는 것 같아요.”
“…어떤 의심 말이죠?”
“블랙 옥토퍼스 건 말이에요. 자세히 말하긴 좀 그래서 아까 대충 넘겼는데 사실 정말 이상한 부분이 있거든요. 전에 보고하면서 살짝 이곳 얘기를 꺼냈는데 뒤늦게 거기에 꽂히신 게 아닌가 싶어요. 관련 있다고 의심한 게 아니라 이론적인 가능성에 대해 말했던 건데…. 괜히 말을 꺼내서….”
“아, 그런 거면 괜찮아요. 직접 와보시면 의심할 게 없다는 걸 아시겠죠.”
“그러니까요. 현호 씨가 나쁜 일을 저지를 사람도 아니고, 여긴 엄청나게 안정적이라서 문제 생길 부분이 없는데 뭘 의심하시는 건지….”
송혜연이 동굴의 벽을 쓸면서 중얼거렸다.
송혜연은 던전에 대해 아주 잘 알고 똑똑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그 틀 안에 너무 갇혀있다.
지식과 상식을 벗어난 존재가 있다거나, 말도 안 되는 예외의 상황에 대해 가정하기보다는 머릿속에 있는 지식에 더 의존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그게 논리적이고 맞는 생각이다.
그러나 나라는 상식 밖의 존재가 있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완전히 길을 잃고 마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국장은 논리보다는 감을 더 따르는 사람일 수도 있겠다.
나는 머릿속으로 성격을 살짝 짐작해보았다.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요. 오히려 이 기회에 TV에서만 보던 국장님을 직접 만날 수 있어서 좋은데요?”
내가 씩 웃으며 말하자 송혜연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방금 한 말은 100% 진심이었다.
조만간 직접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제 발로 찾아와준다면 더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