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에서 식당합니다-104화 (104/125)

104화. 해냈습니다

본래의 형태를 알 수 없는, 무너진 건물들로 가득한 어느 세계.

그중 한 잔해 위에 누군가 가만히 앉아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소년 같기도, 청년 같기도, 또 어떻게 보면 훨씬 더 나이가 많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갈색 머리 남자.

어떤 감정도 보이지 않는 그의 표정 속에서 겨우 느낄 수 있는 것은 오직 끝없는 권태감뿐이었다.

그와 멀지 않은 곳에 또 다른 누군가가 발을 내디뎠다.

공중에서부터 사뿐히 내려앉은 여자가 남자에게 다가갔다.

“놓쳤어. 진짜 쥐새끼가 따로 없다니까.”

투덜거리는 그녀의 뒤로 후드를 깊게 내려쓴 누군가가 소리 없이 뒤따라왔다.

그는 가래가 끓는듯한 탁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성급했다. 조금만 더 신중했으면 잡을 수 있었는데.”

“내가 잘못했다는 거야? 참나.”

“네가 아니면 누가 잘못했다는 거지?”

“당연히 너지, 투른.”

“나는 분명 좀 더 지켜보자고 말했을 텐데.”

“그래. 그게 잘못한 거라고. 그때 왜 가만히 있었어? 네가 옆에서 좀 도와줬으면 바로 그 자리에서 잡을 수 있었다고.”

“레이나. 그건 근거 없는 네 망상일 뿐이다. 내가 나서건 말건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거다. 타이밍 자체가 좋지 않았다는 말이지.”

“잘났다. 잘났어.”

멍하니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던 잔해 위의 남자가 그들의 소란에 고개를 돌렸다.

“누구 얘길 하는 거야?”

“리넬. 알지?”

“…모르겠는데.”

“아직도 이름 못 외우는 거 좀 너무한 거 아냐? 옛날부터 우리 뒤 캐면서 따라다니는 흰머리 여자 있잖아.”

레이나가 키득거리면서 웃자 남자는 뒤늦게 생각난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이름도 있었어?”

“당연하지! 아무리 그래도 이름이 없겠어? 존은 이럴 때 보면 좀 너무하다니까.”

“뭐, 별로 중요한 건 아니잖아.”

“뭐라고? 존, 네가 시켰던 거야!”

레이나는 조금 전까지 말다툼하던 투른에게 어이없다는 눈길을 보냈다.

투른은 어깨를 으쓱하며 자기도 황당하다는 동작을 취했다.

그도 그럴 것이, 리넬을 잡아 오라는 명령은 수백 년 전 존이 둘에게 직접 했던 것이었다.

합류할 마음도 없으면서 그들의 뒤를 캐내려고 하는 리넬은 죽이기엔 조금 아까운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차원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능력.

그 능력을 이용할 수 있다면 이렇게 꽉 닫힌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기 위해 오랜 세월을 기다려야 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어이가 없긴 했으나, 존이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레이나와 투른은 그러려니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바닥에 피를 많이 흘렸더라고. 마지막에 공격한 게 제대로 먹혔던 것 같아. 도망치긴 했는데 잘하면 이대로 죽어서 다시 나타나지 않을지도 모르겠어. 아, 기억 못 하겠지만 못 잡을 거 같으면 그냥 죽여도 된다고 했었어…. 넌 기억나지, 투른?”

“물론이다.”

존과 레이나, 그리고 투른은 모두 각각의 세계에서 오래전 힘을 얻은 초월자들이었다.

같은 뜻을 가지고 함께 행동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동등한 관계는 아니었다.

오히려 신체의 한계를 벗어난 만큼 힘의 차이는 더 극명해졌다.

레이나와 투른은 서로 자기가 더 강하고 뛰어나다고 여겼다.

그러나 둘 다 존에게만큼은 절대 이길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존은 레이나와 투른이 살아온 것보다 훨씬 더 오래전부터 세상에 존재해왔다.

“…그렇군.”

존이라는, 어느 세계에서건 지극히 평범한 이름을 가진 남자는 곧 흥미를 잃고 다시 그들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길은 황폐한 아래쪽 땅을 향했다.

이 세계는 세 파괴자가 수백 년 전 정복한 곳이었다.

지금은 생물들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지적 존재는 단 하나도 없고 죽이는 재미조차 없는 미미한 벌레 몇 마리 정도만이 태어났다 죽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곳의 지적 생물들을 모두 말살하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다른 세계의 인간들보다 덩치가 작고 힘이 약했지만 살아남고자 하는 의지는 강한 종족들이었다.

그들은 가진 모든 힘을 다 쏟으며 처절하게 반항했었다.

그래 봤자 미약하기 짝이 없었지만.

잠깐 과거의 일을 떠올리던 존의 입술이 미세하게 꿈틀거리더니 곧 매끄러운 호선을 그렸다.

세상을 망가뜨리고, 망가져 가는 세계와 생명들을 바라보는 일만큼 자극적인 것이 또 있을까?

죽어가며,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 친구, 그들이 살던 세상 자체가 사라지는 그 순간에 뱉어내는 처절한 발악.

멸망 직전에 발산하는 그 에너지만이 존을 진정으로 기쁘게 했다.

존의 얼굴이 찰나의 미소를 지우고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파괴는 정말 재미있었지만, 너무 강한 자극이었기에 그 외의 모든 것은 무의미해졌다.

아니, 이미 모든 것이 무의미해졌기에 세계를 파괴하기 시작했었던가?

너무 오래전의 일이라 가끔은 그 자신조차 헷갈렸다.

이 짓 또한 언젠가는 질릴지도 모른다는 것이 존의 유일한 고민거리였다.

혼자 또 멍한 상태에 빠진 존에게 레이나가 가볍게 말을 걸었다.

“존, 심심하지? 조금만 더 참아. 곧 다음 목적지로 가는 길이 열릴 테니까. 이제 진짜 얼마 안 남았어.”

레이나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듯 활짝 웃었다.

투른 또한 어깨를 들썩이며 킬킬거렸다.

꿈틀.

그때, 아래쪽 흙바닥이 크게 한번 울렁거렸다.

그에 호응하듯 울렁임은 동심원을 그리며 옆으로 퍼져나갔다.

땅속에서 무언가 튀어나오고 싶은 듯 꿈틀거리는 모양이었다.

“쟤네들도 빨리 나오고 싶은가 봐.”

레이나가 아래쪽을 바라보며 흐뭇해했다.

이 땅의 안쪽에는 오직 살육을 위해 만들어진 기괴한 생물 병기들이 잠들어 있었다.

“제대로 깨어나기 직전에 공명하며 몸을 푸는 모양이다. 타이밍이 딱 맞겠군.”

타론이 거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존은 무표정하게 아래를 보다 다시 시선을 돌릴 뿐이었다.

***

칼로스가 돌아왔다.

성 밖에서 마주한 칼로스의 뒤에는 처음 보는 마족들 열댓 명이 비장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중에는 붉은 머리 마족 타론도 포함되어 있었다.

“해냈구나.”

“…해냈습니다.”

덤덤하게 대답하는 것 같지만, 잘 보면 칼로스의 콧구멍이 벌름거리고 있다.

입꼬리도 씰룩씰룩 위로 올라가려고 한다.

언제는 일반 마족들이 감당하기 힘든 자리라며 부담스러워했으면서 막상 그 자리를 차지하고 보니 좋긴 한가 보다.

칼로스는 두 달도 채 걸리지 않아 돌아왔다.

이 넓은 마계에서 수많은 마족 세력 간에 치렀던 전쟁이 끝나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

그러나 저 자신만만한 표정은 나에게 당당할 수 있을 만큼 제대로 모든 것을 끝냈다는 의미겠지.

그러니까, 마계의 마족들이 진심으로 그를 따르게 만들었을 거란 말이다.

조금 전까지 죽이겠다고 달려들던 사이에서 진심이라는 말이 튀어나온다는 것이 인간들의 기준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마치 거짓된 충성처럼 느껴지겠지만, 그렇지 않다.

칼로스가 다른 마족 몇몇이 힘을 모아 뛰어넘을 수 있는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면 속으로 뒤통수칠 생각을 할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칼로스는 전대 마왕에 견줄 만한 막대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

여럿이 한 번에 덤벼들어도 이길 수 없는 압도적인 힘.

칼로스가 그 경지에 도달했기 때문에 마족들이 진짜 고개를 숙인 것이다.

그들에게 감정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런 개인적인 감정보다는 힘을 선망하는 마음이 더 우위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상황이었다.

잠시 딴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칼로스는 조용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뒤의 마족들 또한 침묵한 채 이쪽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놈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옆으로 까딱거리는 걸 보니, 아마 대부분이 내 존재에 대해 명확히 파악하지 못했나 보다.

‘그나저나 왜 이러는 거지?’

칼로스가 붉은 눈을 반짝이며 나를 진짜로 빤히 쳐다보고 있다.

이런 시선을 보내는 건 처음인데, 뭘 원하는 건가 싶었다.

짧은 고민 후, 설마 하며 한마디 내뱉어보았다.

“잘했다.”

“……!”

그 말에 칼로스의 입꼬리가 위로 쑤우욱 올라갔다.

칭찬을 기대했던 건가?

“진짜 최선을 다했습니다. 단 하루도 쉬지 않고 마계 전역을 이동하며 최대한 짧은 시간에 모두를 제압하려고 했습니다.”

“알고 있어.”

“고난과 역경이 있었지만 굴하지 않고 밀고 나가 완벽히 성공했습니다.”

“그래, 잘했다고.”

“이 성과가 현호 님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에 들어.”

“이제 두 달 전보다도 더욱 안정적으로 힘을 운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번 보시겠습니까?”

“아니, 괜찮아.”

“그럼 있다가 보여드리겠습니다. 아마 꽤 놀라실 것 같군요. 지금의 저는 그때와는 또 다른 존재가 되었으니.”

“안 보여줘도 된다고. 이제 그만해….”

어디까지 할 거냐….

이러다 생색과 자랑이 끝도 없이 길어질 것 같아서 끊어낼 수밖에 없었다.

요상한 분위기에 칼로스 뒤쪽의 마족들이 작게 술렁이기 시작했다.

조금 혼란스러운 듯했는데, 타론이 한쪽 팔을 높이 들자 다시 침묵했다.

칼로스에게 손짓하자 놈이 내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목소리를 최대한 낮춰 물었다.

“근데 쟤들은 왜 데리고 온 거냐?”

“제 직속 부하들입니다. 인사라도 시켜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무슨 그런 쓸데없는 짓을. 빨리 가라 그래.”

“예? 필요 없는 겁니까?”

“당연하지.”

“아, 알겠습니다.”

함께 속닥이던 칼로스가 허리를 세우고 근엄하게 뒤돌아 명령했다.

“물러가거라.”

“예, 마왕님.”

타론이 대표로 대답하고 다른 마족들을 이끌며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

타론의 새로운 부하들이 떠나간 칼로스의 성은 다시 예전과 같은 분위기로 돌아왔다.

달라진 점이라면 마왕의 직속 부하가 되었다는 사실에 흥분한 스켈레톤들이 평소보다 더 덜그럭거리며 움직인다는 것뿐이었다.

마주 보고 앉은 칼로스가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현호 님에 대해서 미리 설명은 해뒀습니다. 반발이 조금 있긴 했지만 제가 모두 해결했고요. 아직 속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한 놈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힘을 보여주시면 바로 굴복할 겁니다. 어차피 제 말을 거스르지는 않을 테니 굳이 안 그러셔도 되고요.”

“….”

칼로스는 뭔가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칼로스.”

“네, 현호 님.”

“마왕은 내가 아니라 너야.”

“그건 알고 있습니다.”

“아니, 제대로 모르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나는 마왕도 아니고 마족도 아니야.”

“하지만….”

“그러니까 네 마족 부하들을 나에게 인사시켜주거나, 모두가 내 명령을 듣게 하도록 만들 필요도 없어. 타론 하나 정도만 알아도 큰 문제는 없을 테니까. 네 부하들은 온전히 네가 통솔하고, 네 말을 따르도록 해야지. 나에게까지 넘어올 필요는 없어.”

“…….”

확실히 선을 긋자 칼로스가 잠시 침묵했다.

“…그렇군요. 무의식중에 그런 생각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일깨워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왕이라는 이 자리는 온전히 제가 감당해야 하는 무거운 자리일 터.”

칼로스는 혼자 깨달음을 얻은 듯 중얼거렸다.

사실 괜히 여러 마족들과 엮이게 되면 분명 귀찮은 일들이 나에게까지 넘어올 수 있다는 생각이 컸던 거지만.

“아무튼, 그렇다고 지금부터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라는 건 아니고. 전에도 대충 얘기했듯이 큰 문제가 생길 것 같거든.”

“그럼 제가 뭘 하면 되는 겁니까?”

칼로스는 내 말을 전적으로 따를 기세로 물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