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탐색
“그냥 오래전부터 마족들 사이에서 떠도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진짜인지 아닌지 확실하지가 않아요. 그 크리판이라는 놈을 실제로 봤다는 마족은 입만 열면 거짓말하기로 유명한 허풍쟁이들뿐입니다.”
“흠… 그래?”
“네. 그리고 만약 진짜 존재한다고 해도 제가 그걸 어떻게 꿀꺽하겠습니까? 그게 그렇게 쉬운 거였으면 그놈이 수만 년 동안 살아남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지만… 미안한 마음은 들지 않는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지금 같은 상황에 그런 걸 까먹고 있었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어쨌든 지금은 이 얘기를 더 들어봐야 한다.
“너는 그게 거짓 소문이라 생각하는 거냐?”
“……저는… 아뇨. 아무래도 크리판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저는 전대 마왕의 최측근이었습니다. 대부분의 행적을 저에게 알리고 움직이셨죠. 그런데 가끔 목적지를 알리지 않고 어딘가로 훌쩍 떠났다가 돌아오실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아무것도 없던 몸에 아물어가는 상처 같은 것들이 생겨있더군요. 감히 누가 마왕의 몸에 흠집을 낼 수 있나 싶어서 물어본 적이 있는데 그냥 뭘 연구하다가 흔적이 남았을 뿐이라고 해서 넘어갔었죠.”
“그게 사실 크리판을 잡으러 갔던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네. 당시에는 감히 그 말에 반문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크리판을 잡으러 갔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가능성일 뿐이지만.”
“그럼 크리판은 이미 전대 마왕의 손에 죽은 거 아닌가?”
칼로스가 고개를 저었다.
“오래전부터 전대 마왕님을 모셨는데, 알아챌 정도로 강해졌다는 변화는 느낀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떠났다 돌아올 때면 항상 표정이 좋지 않았고요.”
“흐음…. 여러 번 시도했는데도 실패했다는 거네. 그렇게 오래됐으면 역대 다른 마왕들도 분명 시도했을 텐데.”
“그런 것까지는 모르겠습니다.”
“뭐가 그렇게 어려운 거지? 단순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강한 건가?”
내가 뱉은 말이었지만, 이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마왕의 힘을 얻은 후, 나는 마계 전체의 기운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여태까지 칼로스가 말한 정도로 강한 마력이 느껴진 적은 없었다.
그 말대로라면 크리판은 역대 마왕보다 강할 테니 그 존재감을 느끼지 못할 수가 없을 텐데 말이다.
내 의문을 느낀 듯 칼로스가 급히 말을 덧붙였다.
“힘도 힘이겠지만 또 다른 복잡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 또한 전해오는 이야기지만요.”
“얘기해봐.”
“크리판은 잠을 많이 잡니다. 수만 년 동안 깨어있던 시간으로만 따지면 인간의 수명 정도밖에 안 될 겁니다. 그것보다도 더 적을 수도 있고요.”
“그렇게나 많이 잔다고? 그러면 자고 있을 때 잡으면 되는 거잖아? 전혀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
“그게 또 그렇지가 않습니다.”
“왜지?”
“잠든 크리판은 죽여봤자 소용없다고 합니다. 그놈은 수면 중에 심장이 완전히 멈춰버려서 죽여도 마력을 얻을 수 없다고 들었습니다.”
“뭐 그딴 게 다 있어? 네 말은, 잠든 상태에서는 죽은 거나 마찬가지라는 거잖아?”
칼로스가 자신 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아마도요?”
당연한 의문이 하나 떠올랐다.
“깨우는 건?”
“안 됩니다. 한 번 잠들면 짧게는 수년, 길게는 수백 년 동안 자는 놈이라 크게 소리 내거나 건드린다고 깨어나지는 않는답니다. 게다가 잘 때는 너무 취약해서 깨우겠답시고 잘못 건드렸다가는 마력이고 뭐고 그냥 죽어버릴 수가 있다고….”
“나 참. 가지가지 하는군.”
아무리 인간의 상식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마계라지만, 한낱 마물이 수만 년간 살아왔다는 건 믿기 어려운 얘기였다.
칼로스를 추궁하고 대답을 들으면서도 아무래도 누군가 꾸며낸 이야기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만약, 크게 활동하지 않고 죽은 유사할 정도로 깊은 잠에 빠진 채 살아가는 거라면, 그렇게 해서 생명력을 거의 소모하지 않는 거라면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마계 서쪽의 협곡이라고 했지?”
“네. 가장 깊은 협곡입니다. 그런데 그쪽 지역은 땅이 험하고 온통 협곡투성이라… 가장 깊은지 어떤지 파악하기도 어렵습니다. 저도 정확한 위치는 모릅니다.”
“직접 가봐야 알겠군.”
“저도 갈까요?”
“됐어. 어딘지 모른다면서. 네가 아는 건 다 얘기한 거지?”
“네. 지금 더 생각나는 건 없습니다.”
“그래. 넌 애들 좀 돌보고 있어.”
“또요?”
“스켈레톤한테 맡기면 되잖아. 물론 문제가 생길 경우 책임은 네가 져야 하는 거고.”
“알겠습니다….”
나는 내 던전으로 돌아와 빈 공간에 자리 잡았다.
베로와 몬스터들을 칼로스의 성으로 보냈으니 방해받을 걱정은 없다.
정자세로 앉아 완전한 집중 상태에 빠져들었다.
마계의 서쪽으로 방향을 잡고, 집중하고, 또 집중했다.
평소보다 훨씬 더 깊게 몰입하여 그 기운을 느꼈다.
나 자체가 마계라는 생물이 된 것처럼, 그곳의 생태계가 생생하게 느껴진다.
크고 작은 몬스터들, 마룡으로 추정되는 강력한 기운부터 공격력이 거의 없는 마물 덩어리까지.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크리판으로 추정할 수 있을 만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로 죽은 거나 마찬가지인 상태로 잠들어있는 걸까?
아니면 크리판이라는 건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 허구의 마물일지도 모른다.
“…안 되겠다.”
반나절가량 흐른 후,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장소가 정확히 특정되지 않아서 무작정 찾는 것보다 여기서 놈의 존재를 확실히 파악해보려는 생각이었으나 아무래도 좋은 방법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다.
현재로서는 크리판이라는 마물에게 기댈 수밖에 없다.
설령 그놈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허무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 해도, 샅샅이 확인해봐야 하는 것이다.
마계의 서쪽으로 게이트의 위치를 조정하고, 바깥으로 나섰다.
게이트 바깥은 수천 미터 높이의 허공이었다.
아래쪽에는 이렇게 높은 곳에서 보아도 어마어마하게 느껴질 정도로 넓고 복잡한 돌산과 협곡이 있다.
지구의 것은 갖다 댈 수도 없을 정도로 넓고 복잡해서 꼭 미로처럼 보인다.
나는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땅 위에 섰다.
그리고 깊은 협곡 안쪽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
주말의 이른 아침.
“하아아암.”
기지개를 켜며 밖으로 나오던 최지수가 흠칫 놀란다.
“뭐야, 지금 들어왔어?”
“어….”
“얼굴이 왜 이렇게 어두워? 어디 아픈 거야?”
“아니야. 그냥 좀 피곤해서.”
“요 며칠 뭘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거야? 잠은 자는 거 맞아?”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여주었다.
사실 잠은 전혀 자지 않았다.
벌써 며칠째, 24시간 풀로 협곡을 탐색하고 있다.
던전 식당은 잠시 휴업 중이고, 한성 휴게소만 열어두었다.
초조한 마음에 밤에 잠잘 시간도 아깝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몸이 아프거나 피곤한 건 아니다.
며칠 밤을 새우거나 굶는다고 해서 컨디션에 지장이 갈 만한 신체는 아니니까.
그러나 표정이 밝을 수는 없었다.
벌써 절반 이상의 협곡을 뒤졌는데도 크리판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만일 남은 협곡마저 다 탐색하고도 크리판을 찾지 못하면 다음으로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가 복잡했다.
아직 잠기운이 남아있는지, 최지수가 또 한 번 하품을 하다 뭔가 생각난 듯 나를 불렀다.
“아, 맞다. 그 여자분, 깨어났는데 아직 못 봤지?”
“뭐? 언제?”
“어젯밤에. 방에 있다가 거실에서 소리가 나길래 나가봤더니 혼자 일어나서 돌아다니고 있더라고. 당황한 것 같아서 물도 주고 진정시켰어.”
“지금 어딨는데?”
“손님 방에. 아직 완전히 나은 건 아닌지, 금방 다시 잠들더라고.”
“…너 지금 나가서 죽 좀 사 올래?”
“아, 그러니까. 내가 어제 뭐 먹어야 하는 거 아니냐니까 고개만 젓더라고.”
“그래도 대충 입고 가까운 데 갔다 와. 너 먹고 싶은 거도 사 오고.”
지수는 내가 건넨 카드를 슥 집어서 후다닥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
지수를 보내고, 나는 리넬이 있던 손님 방으로 들어갔다.
은발의 여자가 어느새 눈을 뜨고 침대에 걸터앉아있었다.
내가 오길 기다렸던 듯 차분히 눈을 마주쳤다.
“깨어있었네.”
“……잠들지 않았어. 어제저녁에 깨어난 후로는 계속 일어나 있었지. 밖에 있는 여자… 네 가족인가?”
“동생이야.”
“동생…….”
리넬은 들릴 듯 말듯 단어를 조용히 읊조리다 고개를 들었다.
“아무튼, 네 동생이 걱정하는 것 같아서 그냥 잠든 척했던 것뿐이야. 일어난 직후에는 좀 혼란스러웠는데 네가 쓰는 언어가 들리기에 네 세계일 거라 짐작했어.”
“몸은 다 회복한 거야? 거의 누더기 꼴이었는데, 이 정도로 멀쩡해지다니. 회복력 하나는 나보다 더 좋은 것 같네.”
리넬이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지수가 평소에 집에서 입는 편한 일상복을 입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러워 보였다.
“어느 정도. 아직 완전히 괜찮다고는 말 못 하겠군. 다치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려면 시간이 꽤 많이 필요할 것 같아. …어쨌든 살려줘서 고맙다. 어떻게 찾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니겠지.”
“무슨 소리냐? 직접 내 던전에 찾아 들어왔으면서. 또 다른 침입자가 나타난 줄 알고 얼마나 놀랐었는데.”
“내가 그곳으로 찾아갔다고?”
“그래. 살려달라고 온 거 아니었나?”
“…전혀 기억이 안 나. 무의식중에 이동했었나 봐.”
무의식중에 찾은 곳이 딱 한 번 와본 내 던전이라니 어지간히 갈 데가 없는가 보다.
“다친 건 역시, 그놈들 때문이었겠지?”
“맞아. 언제 본격적으로 움직일지 지켜보다가 너한테 알려주려고 좀 무리해서 접근했더니 딱 들켜버렸지.”
“그럼 뭐 더 알아낸 건 없어?”
“아쉽지만… 너무 빨리 들켜서 말 한 마디도 엿듣지 못했어.”
“그럼 괜히 찾아가서 다치기만 한 거네.”
“그런 셈이네….”
리넬이 피식 웃었다.
허탈하고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혹시 작은 정보라도 더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었기에 나 또한 허탈해졌다.
그러나 죽을 위기를 겨우 벗어난 사람이니 실망한 티가 나지 않게 표정을 관리했다.
“하는 수 없지, 뭐. 그럼 별다르게 해줄 얘기는 없는 거네?”
“아니, 있어.”
“뭔데?”
리넬은 잠시 침묵했다.
나는 재촉하지 않고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리넬이 생각을 마친 듯 입을 열었다.
“…도망쳐.”
“뭐?”
귀를 의심하게 하는 말이었다.
황당해하며 반문했는데 리넬은 오히려 더 똑똑히 말했다.
“도망치라고. 놈들이 찾아오기 전에 빨리. 내가 도와줄게.”
“아니, 잠깐만.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어차피 안 돼. 다 버리고, 네 몸 하나만 건사해서 이곳에서 벗어나는 게 최선이야. 다른 차원으로 가는 문을 내가 열어줄 테니까 그리로 피해 있어. 아니, 같이 가면 되겠네.”
“언제는 잘 대비해서 막아야 한다면서? 지금 장난하는 거냐?”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
리넬의 푸른 눈동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내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