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에서 식당합니다-107화 (107/125)

107화. 까다롭네

드르륵.

나는 옆에 있던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제대로 얘기를 들어볼 생각이었다.

“뭐 때문에 말을 바꾼 거지?”

“말을 바꿨다기보다는… 전에 말하지 않았던 진실을 더 알려주는 것뿐이야. 너는 그놈들을 이길 수 없어.”

“……그러면 애초에 왜 날 찾아온 건데? 놀리기라도 하려는 건가?”

“그런 건 아니야. 그저… 만에 하나의 기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뿐. 하지만 그런 걸 기대하며 너에게 모두 떠넘기는 건 못 할 짓인 것 같아.”

“떠넘기는 게 아니라 내가 해야 할 일이지. 어차피 너와는 관계없는 세계니까.”

“…어쨌거나 놈들은 너와는 차원이 달라.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이런 심경의 변화가 생긴 이유는?”

“날 살려줬으니, 나도 네 목숨을 한 번 살려주려는 거야. 네 가족만이라도 데리고 떠나. 아직 무사한 다른 세계에서 새롭게 살아가면 되는 거잖아.”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갈 생각은 전혀 없어.”

의견이 합치될 수 없는 소모적인 대화였다.

문득 의문이 생겼다.

“너는 뭐 때문에 이렇게 이 일에 깊게 끼어드는 거지?”

“말했잖아. 재미라고.”

“재미? 그 표정으로?”

리넬의 얼굴이 더더욱 일그러졌다.

누구보다 괴로운 표정을 하고 있으면서 재미있어서 하는 일이라니 너무 모순적이지 않은가.

그저 피 터지는 싸움 구경을 즐기려는 제삼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모습이다.

“나는….”

리넬은 말문이 막힌 듯 조용히 숨을 몰아쉬었다.

“설마 나를 도와주는 척하면서 사실 그놈들 편인 거냐? 아니면 뭔가 다른 꿍꿍이가….”

“아, 아니야!”

“그게 아니면 뭔데?”

“그런 게 아니라 나는 그저… 복수하고 싶을 뿐이야.”

“복수?”

“…그래. 복수. 내가 살던 세계 또한 그놈들에게 완전히 파괴되었거든.”

“……!”

리넬의 푸른 눈동자가 빛을 잃은 것처럼 어두워졌다.

떠올리기 싫은 기억에 갇힌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때 나는… 도망쳤어 내 힘으로는 절대 그자들을 막지 못한다는 걸 알고. 그렇다고 그곳에서 죽고 싶지도 않아서, 모른 척 다른 곳으로 떠나버렸어.”

“그런….”

“그렇게 보지 마! 어쩔 수 없었어! 너도 알 수 있잖아. 나는 너보다도 훨씬 약하다는 거! 도망치거나 같이 죽거나 둘 중 하나인데,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했는데!”

리넬이 악을 쓰며 소리쳤다.

나에게 화를 내는 것 같지만, 그게 아니다.

스스로에게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자 혼자 울분을 토하던 리넬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이 리넬과 같은 입장이었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내가 뭘 하든 이길 수 없는 적이 존재하고, 모두가 죽을 운명이라는 게 확실할 때.

혼자만이 살아남을 길이 있다면 그걸 선택하지 않을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글쎄. 죄책감은 안고 가야 할지 몰라도, 그 선택 자체를 비겁하다고 손가락질할 수는 없지 않을까.

그것보다는…….

“그때의 결정을 후회하고 있어?”

“……그랬었지. 다시 돌아왔을 때, 숨을 쉬는 그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다는 걸 알게 됐을 때, 후회했어. 내가 살던 집도, 고향도, 매일 인사하던 이웃들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 가족들이야 오래전에 모두 죽었으니 그래도 견딜 만할 거로 생각했는데… 막상 나와 같은 근원을 가진 존재가 단 하나도 남아있지 않으니… 견딜 수 없이 괴롭더군. 결과가 달라지진 않는다고 해도…. 내가 뭔가 더 해야 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위험이 다가온다는 걸 모두에게 알렸어야 했나. 지금 생각해봐도 뭐가 답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후회했다는 거군.”

“…그래.”

“도망쳤고, 그 결론이 후회였는데, 또다시 나에게 도망이라는 얘기를 꺼냈던 건가?”

“그건…….”

“네 말 대로라면 나 또한 도망쳐봤자 후회만 남을 것 같은데.”

“그래도 너는 나와 다르니까 더 시간을 들여서 힘을 키우면….”

반박하던 리넬이 말을 중단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도 앞뒤가 안 맞는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네 일이 아니라 내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후회했던 일을 또 한 번 반복할 필요는 없지 않겠어? 물론 너와 나는 다른 사람이고 상황도 다르지만, 그러니 더더욱 같은 선택을 할 이유가 없겠지.”

“…….”

“아무튼, 네가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지는 이제 알겠어. 여전히 네 힘으로는 복수할 수 없으니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서라도 복수하고 싶은 거겠지.”

“……맞아. 그거라도 해야, 놈들의 최후를 내가 확인이라도 할 수 있어야, 내가 비겁하게 도망쳐서 살아남은 것에 조금이라도 의미가 생길 거로 생각했어. 비겁하고 야비하지만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속죄니까.”

리넬은 스스로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나는 딱히 뭐라고 할 생각이 없었다.

나를 이용하려고 한 거든 아니든, 미리 찾아와서 알려준 것 자체로 큰 도움이 되었으니까.

“그럼, 할 얘기는 그게 다인 거지?”

“……어쨌든 잘 생각해봐. 파괴자들은 과거에 내가 봤을 때보다도 더 강해진 것 같으니까. 그들은 제자리에 머물러있지 않고 성장하고 있어.”

“그건 새겨들을게. 결정은 내가 하겠지만.”

“…….”

잠시 정적이 맴도는 가운데, 바깥에서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철컥.

“나 왔어!”

최지수가 마트에서 돌아온 것이다.

비닐봉지를 부스럭거리며 이것저것 꺼내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리넬을 그대로 두고 방 밖으로 나갔다.

지수는 죽 하나를 얼굴 가까이에 들고 설명을 읽고 있었다.

“보자…. 그냥 전자레인지에 돌리기만 하면 되네? 너무 쉽잖아?”

“나 또 나가봐야겠다.”

“또? 좀 전에 들어왔잖아.”

“급한 일이 생겨서. 며칠 못 들어올지도 몰라.”

“어? 그래도 좀 쉬어야 하는 거 아니야?”

“아니, 괜찮아. 리넬… 저 사람은 네가 계속 보살펴줘. 아직 다 나은 건 아니니까.”

“아, 어…. 알겠어.”

당황해하는 지수를 두고 게이트를 열었다.

휴식 같은 걸 할 여유는 전혀 없었다.

***

나는 또다시 협곡에 발을 내디뎠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다시 돌아온 것 같다.

‘도망치라고? 어차피 안 될 거니까 다 내팽개치고?’

그런 게 될 리가 있나.

리넬뿐만 아니라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목숨을 최우선으로 여길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 없다.

나는 지난 50여 년간을 홀로 헤매다 겨우 지구로 돌아왔다.

오직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악착같이 버텨내면서도, 내심 다시는 못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항상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기적처럼 다시 돌아온 이곳에서 전에 없이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좋은 사람, 몬스터들과 함께 보내는 일상은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이 일상을 또다시 허무하게 잃을 수는 없다.

반드시 지켜내고 말 것이다.

“……!”

홀로 결심하던 중, 이상한 것이 감지되었다.

절벽과 절벽 사이로 길게 이어진 협곡.

길은 수십 미터로 넓지만, 절벽이 워낙 높고 위쪽에는 암석이 불규칙하게 튀어나와 있어 빛이 잘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까지 살펴본 곳과 크게 다르지 않은 풍경이다.

협곡 이곳저곳에는 큼직한 암석들이 여기저기 떨어져 있다.

그런데 이곳에 뭔가 부자연스러운 것이 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스쳐 갈 법한 평범한 암석 하나에 주목했다.

내 몸집보다 조금 더 큰, 불규칙한 모양의 회색 암석이었다.

“이거구나.”

주변에는 자아가 없는, 그저 살아있기만 한 마물들이 돌아다니고 있다.

“키이이이….”

“크르르륵!”

어두운 곳이라 그런지, 약한 마물들이라 그런지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규칙성 없이 제멋대로 생긴 놈들은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자기들끼리 마주치는 순간 싸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더 강한 놈이 약한 놈을 잡아먹었다.

마물들은 방향성 없이 이동하다 벽에 부딪히기도 했는데 딱 이 암석, 아니 암석 쪽으로는 오지 않았다.

무언가 마물들을 막아내고 있는 것이었다.

가까이 다가가 부자연스러운 마력의 흔적에 정신을 집중했다.

누군가 여기 수작을 부렸는데, 이게 영 낯설지 않다.

아주 정교하고 섬세하게 엮인 마력은 보통 수준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전대 마왕의 마력이군.’

이로써 확실해졌다.

이 협곡에 마왕이 와야 할 이유는 단 하나뿐일 것이다.

이놈이 바로 그 수만 년을 살았다는 크리판이라는 의미.

“자기가 먹으려고 꼭꼭 숨겨놓았구먼. 이래서 이놈을 직접 목격한 마족이 없었던 거로군.”

협곡 자체가 복잡하긴 하지만, 특별히 숨어있는 거라고 보기 어려웠다.

여러 마물이나 몬스터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을 뿐 아니라, 혹여나 크리판을 찾으러 온 마족이 있었다면 바로 발견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잠든 상태에서는 얻을 것도 없다지만, 생각 없는 마족이나 마물에게 공격당하면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허무하게 죽어버렸겠지.

전대 마왕은 그런 상황을 막기 위해 최선의 조치를 해둔 것이다.

나라서 발견한 것이지, 다른 마족이라면 쳐다도 안 보고 지나쳤을 거다.

그럴 리 없지만 설령 알아챈다고 하더라도 바깥에서는 흠집 하나 낼 수 없을 정도로 강한 결계를 만들어놓았다.

아주 정성을 다해 만들어진 결계였다.

전대 마왕이 뭘 해놨는지 확인할수록 확신이 생겼다.

이건 크리판이고, 이렇게 꼭꼭 숨겨놓아야 할 정도로 귀중한 것이라고.

크리판이 살아온 세월을 생각하면 아마 전대 마왕만 결계를 쳤던 게 아닐 것이다.

아마 그 전, 그 전의 전으로 쭉 거슬러 올라간 먼 옛날부터 이런 일이 반복되었을 것이다.

전대 마왕의 결계를 엇비슷한 수준의 다음 마왕만이 풀어내고, 다시 자신의 결계를 만들기를 반복하지 않았을까.

아무리 깨어있는 시간이 적다 해도 지금까지 분명 수많은 마왕들이 무수히 많이 시도했을 거다.

그런데도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다는 건 이 얌전해 보이는 놈이 보통이 아니라는 거겠지.

크리판을 발견한 건 아주 기쁜 일이다.

그러나 이게 다는 아니다.

이놈이 스스로 깨어나야만 뭐라도 해볼 수 있을 텐데….

이거 참 산 넘어 산이다.

나는 고요하게 잠들어있는 크리판의 겉을 손으로 슬슬 쓸어보았다.

거칠고 짧은 털의 질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완전히 몸을 웅크리고 있어서 정확히 어떻게 생긴 건지는 전혀 모르겠다.

크리판의 겉모습이나 능력 같은 건 전혀 알려지지 않았으니 짐작도 안 간다.

살짝 건드려보았으나 미동도 없다.

괜히 과격하게 깨우다가 이대로 죽어버리면 수만 년 치 마력이 그대로 증발해버릴 거고.

‘까다롭네.’

참 희한한 마물이었다.

이렇게 가까이 왔는데도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숨을 쉬는 것도 아니고 마력 또한 느껴지지 않으니….

‘잠깐.’

아니다.

나는 다시 크리판의 몸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극한까지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두근.

크리판의 아주 깊은 곳에서 순간 미미한 박동 같은 것이 느껴졌다.

나조차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쳤을 정도로 미약하다.

두어 번의 박동 후 크리판의 심장은 다시 잠잠해져서 움직임을 멈췄다.

나는 손을 털며 눈을 떴다.

칼로스가 말하기를, 전대 마왕이 가장 최근 이놈을 찾아 떠났던 것이 200년도 전이라고 했다.

주기가 명확하진 않지만 빠르면 수년 만에 잠에서 깨기도 하는 놈이었다.

그러니 지금쯤이면 깨어날 가능성이 꽤 크다.

어쩌면 이 미미하고 불규칙한 박동이 깨어나려는 징조일지도 모른다.

나는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순간 바로 알아챌 수 있도록 크리판의 주변에 나의 결계를 설치했다.

그리고 이놈이 늦지 않게 깨어나 주기만을 바라며 게이트를 열고 마계를 벗어났다.

***

크리판을 발견하고 돌아온 다음 날 아침, 급한 목소리로 전화가 걸려왔다.

- 현호 씨,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됐어요?

헌터 관리국의 송혜연이었다.

요 며칠 크리판을 찾는 데 몰두하느라 다른 일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식당도 휴업했고, 연락도 받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송혜연의 부재중 전화가 여러 개 찍혀있었던 것 같은데 놓쳤던 것 같다.

“그런데 목소리가 왜 그래요?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어요?”

- 네! 지금 국장님이 식당으로 가고 계세요!

“…지금이요? 갑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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