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진실
“잠깐 잠들었습니다.”
“뭣?”
국장은 홱 소리가 날 정도로 빠르게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지금껏 여유롭던 태도가 완전히 사라졌다.
“너… 정체가 뭐냐. 나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침착하려 하지만 목소리가 떨린다.
눈에는 적개심이 가득하다.
당연히 예상대로 흘러갈 거로 생각했던 상황이 엇나가자 크게 당황한 것이다.
“무슨 짓이라뇨.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너무 억울한데요? 국장님이야말로 저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그랬던 겁니까?”
“뭐, 뭐?”
“생각해보십시오. 누가 먼저 치사하게 굴었는지. 경호원을 보내는 척해놓고 급습하려 하다니. 제가 대체 뭘 했다고요.”
“뭐, 뭘 하다니, 블랙 옥토퍼스 사건의 범인이라고 방금 본인 입으로 자백하지 않았나!”
“제가 자백을 했다고요? 정말로 그렇게 말했던가요?”
“자백까지는 아니라도….”
“국장님. 지금 너무 놀라신 것 같은데, 좀 진정하시죠. 저는 그저 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조치를 빠르게 한 것뿐입니다. 먼저 신뢰할 수 없게 만든 건 국장님 쪽입니다.”
몇 마디 이야기하는 사이 박문석은 조금 평상심을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
논리적으로 반박할 말은 없을 테니 입은 다물고 있었지만 표정으로는 여전히 나를 불신하고 있었다.
“이제 진짜 듣는 귀 없이 허심탄회하게 얘기 나눠보는 게 어떨까요?”
“…내가 그쪽을 어떻게 믿지요? 내 경호원이 잠들었는지 죽었는지도 모를 마당에.”
“아주 푹 자고 있으니 확인해보셔도 좋습니다.”
“…….”
“제가 지금 국장님께 해를 끼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건 아시지 않습니까? 어차피 주변의 모두가 국장님이 이곳에서 저와 만나고 있다는 걸 아는데요. 뭐, 애초에 그럴 생각도 없고요.”
드르륵.
국장은 잠깐 침묵 후 넘어진 의자를 세워 털썩 앉았다.
감정을 드러내던 얼굴이 다시 포커페이스를 되찾았다.
“솔직히 말해서, 많이 당황했습니다. 이렇게 생각했던 계획이 틀어져 버린 건 거의 처음이라…. 그래서 분별없이 행동해버린 것 같군요. 좋습니다. 그러면 이야기를 해봅시다. 아까 그 사건과 관계있다는 말은 무슨 의미였습니까? 진실입니까, 아니면 그냥 내 속내를 읽고 나를 놀리려고 한 말입니까?”
“국장님.”
“……?”
“그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먼저 하나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무슨 질문을… 그럼 먼저 해보십시오.”
“국장님은 대한민국 헌터 관리국의 수장으로서, 어느 정도의 권력을 가지고 계십니까?”
“뭐……?”
질문이 갑작스러웠는지 박문석이 황당한 얼굴로 바보 같은 소리를 냈다.
“당연히 국내에서의 권력을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제 질문은 국제 사회에서의 영향력에 관한 것이죠.”
상당히 무례한 질문이었다.
대한민국 헌터관리국 국장으로서의 능력뿐 아니라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까지 스스로 평가해보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당연하게도 뒤늦게 내 말을 이해한 박문석이 표정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는 불쾌한 감정을 속으로 삼키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다시 원래의 노련함을 되찾은 것이다.
“…내 입으로 말하기는 뭐하지만, 대한민국은 국제 헌터 사회에서 단단한 입지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땅덩어리도 크지 않고 인구도 적지만 비율적으로 따지면 뛰어난 헌터 수도 많은 편이고요. 나 또한 수년간 국장 자리를 지키면서 우리나라의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지만, 국내 헌터들을 잘 관리하는 것만큼 국제 사회에서 발언권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니까요.”
“그거 다행이군요.”
“나를 놀리거나 조롱하기 위한, 허튼 질문은 아닐 거로 생각해서 진지하게 대답한 겁니다. 하지만, 그 이유까지는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네요. 이제 대답해주시죠. 이런 질문을 한 이유는 뭡니까? 그리고 아까 그냥 넘겼던 질문에 대한 대답도 제대로 해주었으면 합니다.”
이번에는 꼭 답을 듣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눈빛이었다.
“두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함께 해야 할 것 같군요. 우선 너무 놀라지 말고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아까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블랙 옥토퍼스 사건과 저는 관계가 있습니다.”
박문석은 묻고 싶은 것이 많아 보였으나 입을 열지는 않았다.
당부했듯이 먼저 내 얘기를 모두 들어볼 생각인 것 같다.
물론 나는 베로에 대한 얘기를 꺼낼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저 거짓과 약간의 진실을 섞어 그를 설득하기 위해 꺼낸 이야기일 뿐.
“제가 그 일을 벌였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뉴스에서 나온 것과 달리 제대로 해결되지 않았을 거라는 것도요.”
“……!”
“검은 몬스터가 어디에서 나타났던 것인지, 그리고 그놈이 정말 나중에 발견된 블랙 옥토퍼스가 맞는지…. 아니라면 그 검은 몬스터는 어디로 사라진 것이고, 블랙 옥토퍼스는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명쾌한 결론을 내릴 수 있었습니까? 아마 아닐 겁니다.”
“그 말은 당신은 우리가 모르는 부분까지 다 알고 있다는 거로 들리는데….”
“다는 아니지만, 조금 더 알고 있는 건 맞겠지요. 제가 아는 건 던전이 있는 세계와 우리가 사는 지구의 경계가 점점 더 불안정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때문에 지금까지 모아온 데이터로는 파악할 수 없는 일이 생기는 거고요. 그리고 진짜 중요한 것은….”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박문석의 눈을 응시하며 천천히
“이 불안정한 상태가 결국, 두 번째 대격변으로 이어질 거라는 것입니다.”
“방금, 두 번째 대격변이라고 말한 겁니까??”
“네. 15년 전에 처음 발생했던, 동시다발적인 수많은 던전브레이크가 다시 한번 발생할 거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때보다도 더 심각한 수준으로 발생할 수도 있고요.”
“그런….”
식탁 위에 올라와 있던 국장의 손이 눈에 보일 정도로 덜덜 떨렸다.
“아주 가까운 시일 내에 벌어질 일입니다. 이대로 손 놓고 있다가는 이번에야말로 인류가 멸종하고 말 거예요. 지금부터 빠르게,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대비해야 합니다.”
“자, 잠깐. 그 전에 대체 어떻게 그런 걸 아는 겁니까? 솔직히…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렵군요.”
“이해합니다. 국장님 입장에서는 안 그래도 수상한 놈이 갑자기 이상한 소릴 지껄이는 거나 마찬가지일 테니까요. 하지만 믿어주셔야 해요.”
“……”
“솔직히 저도 미해결 사건에 대해 알고 있다는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믿지 않을 거, 오해받을 거 감수하고 얘기한 겁니다.”
의심받을 걸 감안하고 솔직하게 말했다는 걸 어필했다.
내 말에 국장의 표정이 조금 흔들리는 게 보였다.
그러나 미간의 주름만 더해질 뿐 고개를 끄덕이거나 알겠다는 대답은 나오지 않는다.
‘역시 이렇게는 안 되는 건가.’
하긴 순순히 믿는 게 더 이상하다.
특별한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일개 헌터가 혼자 주장하는 것뿐이니까.
그렇다면 겁을 주고 협박하는 방향으로 가야 할 것 같은데….
내가 무슨 깡패도 아니고, 협력해야 하는 상황이니 좋게 좋게 가고 싶었다.
하지만 정 안 된다면 협박으로라도 내 말을 듣게 해야 할 것이다.
그때, 박문석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잠깐 손 한번 내밀어보시겠습니까?”
“손이요?”
“네. 하나만 확인해보고 싶습니다.”
“알겠습니다.”
나는 국장이 원하는 대로 한 손을 내밀었다.
그는 내 손목을 잡고 숨을 크게 내쉬었다.
‘각성자라는 소문이 있었지.’
공식적으로 발표한 것도, 특별한 능력을 보여준 적도 없다.
그러나 국장이 처음 이곳에 들어오는 순간 그 소문이 사실이라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강력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쨌든 비각성자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점점 박문석의 기운이 연기처럼 솟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어떤 능력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뭔가 하려는 것 같다.
“아까 했던 말, 다시 한번 해주시겠습니까?”
“곧 두 번째 대격변이 일어날 거라는 거요?”
“……진실이었군요.”
박문석이 손을 떼며 중얼거렸다.
짧은 순간 동안 얼굴의 핏기가 급격히 사라져 심하게 창백해졌다.
그는 손수건을 꺼내 이마의 식은땀을 닦았다.
“제 말의 진의를 읽은 겁니까? 각성 능력으로?”
“네. 사실 각성 이후로 몇 번 써본 적이 없는 능력입니다. 유용하긴 하지만 그렇게 대단한 능력도 아닌 것 같은데 쓸 때마다 몸 상태가 급격히 나빠지지요. 한 번만 써도 수명이 닳는 느낌이라 최대한 안 쓰려고 했지만… 이번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네요.”
예상외의 능력 때문에 조금 더 쉽게 풀린 것 같다.
설득하기 위해 뭘 더 할 것 없이 내 말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이제 뭘 어떻게 하면 좋을 것 같습니까?”
박문석의 물음에 나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해외 출장을 가신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이틀 후 미국으로 떠나야 하죠. 국제헌터협회에서 개최하는 가장 큰 회담이 열릴 거고 그곳에 세계 각국의 수장들이 모일 겁니다. 헌터계에서 가장 큰 이벤트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날, 그곳에서 세계를 설득해야 합니다.”
“내 영향력을 물었던 게 이것 때문이군요.”
“네. 아무리 얘기해줘봤자 듣는 사람이 없으면 소용없으니까요.”
“…입지가 단단하다고 말했지만, 이건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뭘 어떻게 말해도 허무맹랑하게만 들릴 것 같은데.”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현호 씨도요?”
“네. 제가 꺼낸 얘긴데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지요. 가서 뭐라도 해서 도움을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뭔가… 생각하는 게 있는 모양이군요.”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나를 보던 국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합시다. 돌아가서 같이 갈 수 있도록 해놓겠습니다. 그런데….”
“아직 꺼림칙한 부분이 있는 건가? 그럼 던전을 더 조사해보셔도 됩니다.”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송혜연 팀장은 최고의 던전 전문가입니다. 송 팀장이 문제를 찾지 못했다고 하면, 그 누가 확인해도 같은 결과를 얻겠지요. 못 믿어서 그런 게 아니라, 혹시 현호 씨도 잘못된 정보를 진실로 믿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정작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되면 뒷감당을 어떻게 해야 할지….”
국장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사실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가는 게 가장 좋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이런저런 이해관계가 많이 얽혀있으니, 그렇게 쉽게 넘어갈 수 없을 것이다.
“그런 리스크 때문에 모른 척할 수는 없죠. 수십억 명의 목숨이 달린 일입니다.”
“…생각을 많이 해봐야겠군요. 우선 이틀 뒤에 같이 떠나는 거로 알아두세요. 비서를 통해 다시 알려 드리겠습니다.”
“네, 국장님.”
뒤돌아 걸어간 박문석이 은신이 풀린 채 던전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잠이 든 경호원을 손끝으로 건드렸다.
툭툭.
삐딱하게 기울어져 고른 숨을 내쉬던 그가 화들짝 놀라며 경기를 일으켰다.
“…커, 커헉!”
“이만 일어나게.”
“이게 어떻게…. 구, 국장님! 괜찮으십니까?”
“자네야말로 괜찮은가?”
“저요? 제가 뭘…. 그러고 보니 이게 어떻게 된 건지….”
“기억이 안 나는가 보군. 방금 전까지 자다가 깨어났어. 아주 코까지 제대로 골던데 많이 피곤했나 봐?”
쯧쯧 혀를 차는 국장의 모습에 경호원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